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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반 의견을 밝히는 서울 독산고 학생들.
 찬반 의견을 밝히는 서울 독산고 학생들.
ⓒ 윤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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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혐오발언을 '표현의 자유'로 보호하면 더욱더 혐오스럽게 바뀝니다. 초3때 들은 김치녀란 말이 지금 된장녀, ×치녀(×× 김치녀의 줄임말)로 더 자극적으로 바뀌었어요."(반대 의견)
"그럼 일간베스트(일베) 사이트를 강제로 닫고 (형사) 처벌만 하면 혐오발언이 없어질까요? 이렇게 되면 뒤에 숨어서 더욱 악랄하고 무섭게 변해갈 겁니다."(찬성 의견)

지난 24일 오후 1시에 시작한 서울 독산고 2학년 4반 <법과정치> 수업. 학생들 사이에 불꽃 튀는 논쟁이 벌어졌다. 이번 토론수업의 주제는 "혐오발언도 '표현의 자유'로 보호해야 하는가?"다.

교사는 사회자, 진행자, 조정자...학생들이 이끄는 수업

찬반진영으로 나눠 앉은 학생들은 상대 쪽을 설득하기 위해 미리 준비한 논거를 줄줄이 내놓았다. 이 논거는 '혐오발언자 니코 이야기' 대본을 사전에 읽은 뒤 모둠 토의를 통해 미리 준비해 놓은 것이다.

"애들아 떨리니? 나도 떨려"라고 아이들을 안심시킨 뒤 수업을 시작한 신기숙 교사는 공정한 사회자, 진행자, 조정자 노릇만 했다. 이날 신 교사는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해보지 않은 '보이텔스바흐 합의에 기반한 논쟁수업'을 공개했다.

보이텔스바흐 합의란 보혁갈등이 첨예하던 1976년 구서독의 보혁 진영이 합의한 교육원칙이다. 이 원칙은 현재 교육선진국의 정치, 역사수업에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다. 내용은 '학생 교화 금지', '사회에서 논쟁이 되는 주제는 교실에서도 논쟁 재현' 등이다.

서울 독산고 논쟁수업에 학생으로 참여한 조희연 서울시교육감.
 서울 독산고 논쟁수업에 학생으로 참여한 조희연 서울시교육감.
ⓒ 윤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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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논쟁수업에 참여한 30여 명의 학생 가운데엔 조희연 서울시교육감도 끼어 있었다. 조 교육감이 '보이텔스바흐 논쟁학습'을 직접 경험해보려고 학생 자리에 앉은 것이다. 이 교육청은 올해부터 보이텔스바흐 합의에 기반을 둔 서울형 민주시민교육을 적극 권장하고 있다.

학생들의 논쟁은 찬반 의견발표에 이어 찬반 의견에 대한 반론과 재반론으로 이어졌다. 이미 학생들은 이전 3개 차시에 걸쳐 혐오발언의 뜻, 혐오 표현으로 인한 인권침해 사례, 관련 헌법 조문 등을 살펴봤기 때문에 자기 의견을 자신 있게 내보였다.

"혐오발언은 인간 존엄성을 해칩니다. 표현의 자유에도 책임이 따라야 합니다. 타인의 인권을 침해서는 안 되지요."(반대 의견)
"우리가 혐오발언을 방치하자고 주장하는 건 아닙니다. 규제와 처벌보다는 대화와 협력으로 이 문제를 풀어가자는 겁니다."(찬성 의견)

이날 대부분의 학생들은 친구들의 발표에 귀를 기울였다. '멋진 발언'에 대해서는 찬반 내용에 상관없이 환호성을 터뜨렸다. 잠을 자는 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

찬반진영의 마무리 발언까지 모두 들은 신 교사는 "오늘 찬반논쟁 결과에 대해 최종투표를 해보자"고 제안했다. 그런 뒤 투표용지를 머리 위로 들도록 했다. 찬성은 9명, 반대는 15명이었다.

이끌지 않는 교사, 아이들 반응은 "후련해요"

서울 독산고 교실벽에 붙어 있는 수업결과물.
 서울 독산고 교실벽에 붙어 있는 수업결과물.
ⓒ 윤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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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교육감은 학생들 앞에서 한 마무리 발언에서 "오늘 표현의 자유에 대해 논쟁수업을 했는데 이것은 언론의 자유, 선거활동의 자유 등과 논리구조에서 동일하다"면서 "앞으로 이런 토론을 끝까지 밀어붙여주시면 부쩍 성숙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를 나타냈다.

이날 학생 위치에서 수업에 직접 참여한 조 교육감은 찬반 투표용지를 손으로 들지는 않았다. 수업이 끝난 뒤 그 이유를 물어봤더니 "학생들에게 특정 정답을 유도할 것 같아 기권했다"면서 "나는 당연히 '반대'표"라고 말했다.

수업을 마친 학생 4명에게 '수업한 선생님이 정답을 얘기하지 않아 답답하지 않았느냐'고 물어봤다. 이들이 입을 모아 답한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선생님이 중립을 지켜야 우리가 마음껏 생각할 수 있죠. 정답을 알려주지 않으니 우리가 우리 생각을 말할 수 있어서 후련해요."


태그:#보이텔스바흐 교육합의, #서울 독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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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서 교육기사를 쓰고 있습니다. '살아움직이며실천하는진짜기자'가 꿈입니다. 제보는 bulgo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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