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vN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더니. 일본 TBS 드라마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아래 <니게하지>)는 '초식남'(초식동물처럼 온순하고 착한 남자)의 연애담과 가사 노동의 소중함을 주제로 계약결혼이지만 진짜 가정을 꾸리는 것에 집중한다. 그러나 바다 건너 한국 tvN 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아래 <이번 생>)에서의 계약결혼은 가족과 결혼에 대한 현실적인 담론으로 변모했다.
 
여전히 일본 드라마 <니게하지>와 설정이 비슷하다는 의심을 지울 수는 없다. 그러나 회를 거듭할수록 왜 <이번 생>의 제작진이 '리메이크' 하지 않았는지 이해가 된다. 바다를 사이에 둔 두 드라마에서 계약 결혼을 그리는 양상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윤난중 작가는 KBS 2TV 드라마 <직장의 신>(2013), tvN 드라마 <호구의 사랑>(2015)을 통해 공감 어린 현실을 그리는 데 발군의 능력을 보여왔다. <이번 생>에서도 역시 윤난중 작가는 2017년을 살아가는 청춘들의 현실을 윤지호(정소민 분), 우수지(이솜 분), 양호랑(김가은 분) 세 명의 서른 살 동창생들을 통해 실감나게 그려낸다.

본의 아니게 '우리'가 되어버린 세희와 지호
 

ⓒ tvN <이번 생은 처음이라> 공식 페이스북

 
세입자가 필요했던 남세희(이민기 분)와 오갈 데 없이 고향으로 돌아가려던 전직 보조작가 윤지호는 의기투합해 '집주인과 세입자의 월세 결혼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두 사람의 계약은 순조로웠다. 평생 살 집에 대한 경제적 보조와 분리수거, 고양이 밥 줄 사람이 필요했던 남세희와 청소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고양이를 애지중지하며 돌아갈 곳도 없는 윤지호는 더할 나위없는 찰떡궁합이었으니까.

정작 두 사람의 순조로운 2년 약정 동거 프로젝트의 함정은 현실 대한민국의 결혼 제도다. 남세희의 아버지는 결혼만 하면 더 이상 어머니와 이혼을 운운하지 않겠다고 했고 윤지호의 어머니는 물심양면으로 서울 생활을 지원해왔다. 그러나 막상 남세희, 윤지호가 양가에 인사만 드리고 결혼 과정을 생략하려 하자 두 사람은 "동거는 결혼이 아니다"고 반기를 들기 시작한다.

지난해 방영된 EBS <다큐 프라임> '부부는 무엇으로 사는가' 편은 한국의 부부를 전통적 가족 간 결합과 개인의 자유로운 결합, 그 과도기에 있는 형태로 본다. 젊은이들이 자유로운 연애에서 결혼으로 가는 과정에는 가족 제도의 체계적 결합이 필수적이다. 대부분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결혼 후의 집이라던가 결혼식 비용 등에서 부모들의 도움을 받는다. 또한 결혼을 두 사람의 결합이라기보다는 가족과 가족의 결합으로 여긴다. 그러다 보니 양가 간 경제적 균형에서 비롯된 갈등이 비일비재하게 속출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게다가 부모 세대는 물론 결혼 당사자까지 그간 자신이 다른 친지들의 결혼식 때 낸 축의금을 다시 수확하는 과정이라 여기는 게 오늘날의 결혼식이다.

남세희와 윤지호는 '결혼'으로 면피하며 그들의 동거를 합리화하려 한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결혼식이라는 통과 의례이자 난코스를 본의 아니게 통과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상견례, 결혼식을 통해 '우리'라는 확대 가족의 범주에 자신들을 끼워넣게 되어버리고 만다. 그 과정은 코피를 쏟을 정도로 번거로운 과정이고 또 여전히 자신을 믿어주는 어머니의 정을 다시금 깨닫고 가족의 울타리를 재확인하는 시간이다. 그런가 하면 그저 집주인과 세입자라는 형식의 '중력'을 깨뜨리는 본의 아닌 '우리'라는 공동체의 탄생 순간으로 드라마는 기록한다.

<이번 생>에서 가장 현실적인 이해관계로 함께한 두 사람은 가장 운명적인 제도인 '결혼'으로 묶이며 한국의 가족제도가 여전히 강고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는 '회수를 건넌 탱자'의 정체성을 실감나게 살린다. 본의 아니게 생애 처음으로 '우리'가 된 남세희와 윤지호가 앞으로 만들어낼 에피소드들은 드라마의 다음 관전 포인트가 된다.

원석과 호랑의 결혼에 대한 동상이몽
 

ⓒ tvN <이번 생은 처음이라> 공식 페이스북


윤지호의 친구 호랑과 수지는 <이번 생>의 한국적인 정체성을 더해주는 데 한몫하는 인물들이다. 특히 옥탑방에서 남자친구와 동거하고 있는 양호랑은 허무맹랑하게도 아직 '현모양처'를 꿈꾼다. 호랑의 '결혼 로망'은 또 다른 각도에서 결혼에 대한 이 시대의 현실을 건드린다.

서른 살을 넘어 마흔 혹은 오십 살이 되어서도 임신은 가능하다고들 하지만 양호랑에게 서른은 마치 '마지노선'처럼 느껴진다. 그도 그럴것이 양호랑은 고등학생 시절부터 깨가 쏟아지는 신혼집에서 살림하고 아이를 키우는 결혼생활을 꿈꿔왔다. 호랑의 조바심에도 동거남 심원석(김민석 분)은 철이 없는 건지, 생각이 없는건지 동문서답만 한다. 양호랑은 프러포즈 해달라는 의미로 "소파 갖고 싶다"고 말했지만 눈치 없는 심원석은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12개월 할부로 진짜 소파를 사 오는 식이다.

심원석의 입장은 현실적이다. 애플리케이션 개발자로 일하는 심원석은 투자를 받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다. 그에게 누군가를 책임진다는 일은 하늘의 별처럼 먼 미래의 이야기다. 양호랑을 사랑하지만 결혼은 그에겐 사랑과는 별개의 '책임'이란 무게를 더한 다른 범주의 문제가 된다.

어쩌면 호랑과 원석의 갈등이야말로 남세희, 윤지호 커플보다 조금 더 현실에 한발을 들여놓은 에피소드가 될 수도 있다. 이미 <이번 생>은 계약결혼이 진짜 가족간의 결합이 되어버린 남세희, 윤지호의 결혼을 통해 남세희의 번듯한 직장과 집이 관건이었다는 사실을 짚었다. 그런데 미래가 불투명한, 옥탑방에 사는 애플리케이션 개발자에게 결혼이란 '무책임'이라기보다 오히려 '책임감 있는 소신'이 되는게 오늘의 현실이다.

결혼도, 연애도 사치, 우선은 직장에서 살아남기가 먼저인 수지
 
 tvN 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 스틸 컷.

tvN 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 스틸 컷. ⓒ tvN

 
우수지는 양호랑과 윤지호를 만날 때마다 가장 넉넉하게 그녀들의 지원군이 되어준다. 그러나 우수지야 말로 가장 그녀들 중에 '여유'가 없는 형편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작가'를 꿈꿨던 지호와 여전히 결혼을 포기하지 않은 호랑과 달리 수지는 일찌감치 CEO에의 꿈을 접은 채 대기업에서 여성으로 살아남기에 매진하는 중이니까.

우수지는 남들이 보기엔 그럴 듯한 직장의 대리다. 그러나 직장 동료들의 성희롱 발언에도 웃어 넘겨야 하고 친구들과 모처럼 노래방에 가더라도 급한 일 때문에 부리나케 직장으로 출동해야 한다. "남자는 그저 '성욕'의 대상일 뿐, 사랑 따위 사치"라고 여기는 수지야 말로 이 시대의 또 다른 청춘 현실이다.

이렇듯 <이번 생>은 '88만 원 세대'가 된 서른 살, 88년생들의 씁쓸한 현실을 다각도로 그려내며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고 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합니다.
이번 생은 처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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