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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방송을 준비하고 있는 아이들 진행자와 엔지니어를 겸한 아이들의 모습이 대견했다. 학교에선 전혀 알지 못했던 재능이었다.
▲ 생방송을 준비하고 있는 아이들 진행자와 엔지니어를 겸한 아이들의 모습이 대견했다. 학교에선 전혀 알지 못했던 재능이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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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저희들이 진행하는 방송에 한 번 나와 주실 수 있으세요?"

며칠 전 영준(가명)이가 교무실에 찾아와 뜬금없는 부탁을 했다. 구체적인 내용을 묻기 보다 그냥 농담 받아치듯 '학생이 있는 곳에 교사가 있는 법'이라며 그러겠노라고 했다. 그의 '방송'이라는 말을 '인터뷰' 정도로 받아들였기에 부담 같은 건 애초 느끼지 않았다. 다만 약속한 시간이 남들 다 쉬는 일요일 오후라는 게 조금 떨떠름하긴 했다.

그런데, 막상 약속 장소로 가보니 진짜 '방송'이 기다리고 있었다. 열 평 남짓한 조그만 공간이었지만 녹음실을 두 개나 갖춘 어엿한 라디오 방송국이었다. 존재는 알았지만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88.9MHz '광주시민방송'이 그 자리에 터 잡고 있었다. 입구에 그 흔한 간판 하나 걸려있지 않아 후줄근한 낡은 건물에 들어설 때만 해도 무슨 다단계 업체인 줄로 알았다.

광주시민방송이 말하는 5.18

영준이는 같은 반 친구와 함께 녹음실 안에서 헤드셋을 낀 채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준비한 자료를 챙기고 컴퓨터 화면을 모니터링하는가 하면, 콘솔 박스 앞에서 음량을 체크하는 등 일사불란하게 역할을 분담하는 모습이 꽤나 오랫동안 해본 솜씨였다. 교복 대신 사복을 입고 있어 더욱 그렇게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학교에선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낯선 모습이다.

고등학생이라 주중에는 짬을 낼 수가 없어 주말 오후에만 나와 녹화를 하고 있단다. 라디오를 매개로 지역사회의 또래 아이들과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 방송을 진행하고 있는데, 벌써 4개월이 넘었다고 했다. 공중선전력이 10와트가 채 안 돼 청취 가능 지역이 반경 20km 남짓에 불과하지만,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공감의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며 뿌듯해 했다.

영문도 모른 채 헤드셋을 끼고 마이크 앞에 앉았다. 그러곤 바로 생방송이 시작됐다. 보통은 녹화 방송인데, 오늘만은 특집 생방송이라고 했다. 영준이로부터 건네받은 사전 정보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질문에 짤막한 답변만 준비해오면 되는 것이었다. 생방송은커녕 라디오 방송이라는 것조차 모른 채 그야말로 '애드립'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더욱이 꼬박 한 시간짜리 방송이었다. 전에 이 꼭지를 한 번이라도 들어봤다면 모를까, 질문 내용은커녕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지조차 몰라 당황스러웠다. 아무리 게스트라지만 대답하는 건 둘째 치고 마이크 앞에 앉아있는 것 자체가 조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중간에 음악이 나가는 동안 간신히 헤드셋을 벗을 수 있었지만, 다음에 이어질 대화 주제에 대해 서로 조율하기엔 시간이 턱없이 짧았다.

솔직히 아이들이 진행하는 어설픈 라디오 방송을 누가 들을까 싶었지만, 스마트폰으로 쉴 새 없이 청취자들의 댓글이 올라왔다. 주제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가 하면, 방송 내용에 대해 실시간으로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댓글의 양과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영상 매체가 범람하는 이 시대에 언뜻 고루해 보이는 라디오를 켜고 듣는 이들이 아직 남아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녹음실 밖의 피디 역시 분주한 모습이었지만, 준비부터 진행까지 일절 간섭을 하지 않았다. 방송을 처음 시작할 때를 제외하고는 엔지니어부터 각본과 진행에 이르기까지 모두 아이들의 손으로 제작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강조했다. 처음엔 서툴러도 경험이 한두 번 쌓이다 보면 전문적인 기술을 스스로 터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가르치는 것보다 믿고 격려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고 덧붙였다.

정신 없이 한 시간이 후딱 지나갔다. 돌이켜 보면 생방송 중 '지뢰밭'은 곳곳에 있었다. 애초 찬바람이 부는 10월에 5.18을 주제 삼는 것부터가 조금 어색했다. 하지만 영준이는 전두환 정권이 광주 학살 이후 대통령 간선제를 골자로 한 헌법을 개정한 날이 10월 27일이었다면서, 5.18과 10월을 능수능란하게 연결시켰다. 날짜는 나도 몰랐는데, 그만큼 철저히 공부를 한 것이다.

생뚱맞은 선곡이라고 여겼지만, 아이들이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로 방송을 시작해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끝낸 것도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5.18을 직접 겪은 이들의 증언을 발췌해 또래 아이들의 눈높이로 재해석해 소개하는 대목도 인상적이었다. 5.18에 대해 아이들 스스로 조사하고, 소개하고, 공감을 이끌어내는 모습은 학교교육을 부끄럽게 만들기 충분했다.

이야기는 영화 <택시 운전사>로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꽃잎>과 <박하사탕>, <화려한 휴가>와 <26년>에 이르기까지 5.18을 다룬 영화들이 연이어 화제로 올렸다. 방송을 준비하기 위해 부러 다 찾아보았다는 아이들은 그 영화들의 차이점을 마치 평론가처럼 짚어냈다. 이전 영화를 통해 대놓고 말할 수 없었던 엄혹한 시대를 떠올렸다면서, <택시 운전사>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5.18에 대한 장삼이사들의 진상규명 요구라고 해석했다.

또, 아이들은 지금 옛 광주 교도소에서 5.18 당시 암매장된 유해를 수습하려는 움직임에 대해서도 다뤘다. 그들이 역사 교사인 나를 게스트로 초대한 것도, 10월에 굳이 5.18을 주제로 다룬 것도 결국 정부의 5.18 진상규명 작업을 촉구하고 응원하기 위해서였던 거다. 비록 전국적인 파급력을 지닌 공중파 방송은 아닐지라도 아이들 나름의 방식대로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는 셈이다.

진정한 배움은 학교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사실 둘은 학교에서 특별히 눈에 띄는 아이는 아니다. 공부를 아주 잘한다거나, 그렇다고 남다른 특기를 지닌 것도 아닌, 그저 지극히 평범한 아이들이다. 하지만 그에겐 학교에서라면 도저히 알 수 없었을 '재능'이 있었고, 우연히 인연을 맺게 된 마을공동체 라디오 방송이라는 매체를 통해 다른 이들과 그것을 공유하게 됐던 것이다.

함께 방송을 하며 지켜본 그들의 '재능'이란 기술이나 학업 역량 따위가 아니라, 우리 사회와 역사에 대한 관심이 불러일으킨 '선한 의지'라는 생각을 했다. 방송을 진행하는 요령과 기술은 부족했을지언정 그들의 마음은 따뜻했고, 의지는 충만했다. 내신과 수능이라는 계량화된 성적으로는 결코 드러낼 수 없는 소중한 능력이다.

진정한 배움은 학교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는 세간의 이야기를 다시금 성찰하게 됐다. 과연 학교 수업이었다면 방송에서 나눈 이야기들을 저들과 할 수 있었을까. 전가의 보도처럼 시험과 성적이라는 굴레를 씌워, 한 시간짜리 생방송을 보란 듯 만들어낸 저들의 입을 틀어막았을 게 틀림없다. 그때 한 댓글이 눈에 들어왔다. '역사수업은 이런 토론으로 이뤄져야 한다.'

엔딩 곡이 나갈 즈음, 옆 녹음실은 이어질 방송을 준비하느라 여학생 몇몇이 총총 걸음을 하고 있었다. 그들도 주말 시간 라디오 방송을 이용해 그들만의 '재능'을 다른 이들과 공유하게 될 것이다. 그들의 분주한 발걸음은 무척 가벼워 보였고, 표정은 더없이 행복해 보였다. 이곳이 학교 교실이었대도 그랬을까. 그들에겐 여기가 진짜 학교인지도 모르겠다.

마을공동체 미디어 지원 촉구 서명지 '깨어있는 시민'을 키워내고 있는 마을공동체 미디어가 부디 사라지지 않기를 소망한다.
▲ 마을공동체 미디어 지원 촉구 서명지 '깨어있는 시민'을 키워내고 있는 마을공동체 미디어가 부디 사라지지 않기를 소망한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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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을 마치고 나오는 길, 입구 근처 탁자 위에 놓인 서명 용지가 눈에 들어왔다. '마을미디어지원센터 설립 및 운영에 관한 조례'의 입법을 청원하는 내용이었다. 광주시민방송을 비롯한 지역 밀착 공동체 라디오 방송들이 폐국의 위기를 맞고 있다며, 주민들이 직접 제작에 참여하는 마을공동체 미디어에 대한 정부와 지자체, 교육청의 지원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광주시민방송의 세세한 운영 방식과 재정 여건 등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평가할 능력은 없다. 하지만 100명에 가까운 지역 주민들이 변변한 출연료도 없이 수십 개의 방송을 직접 만들고 공유하는 모습만으로도 존재의 이유는 충분하다고 믿는다. 더욱이 적지 않은 아이들이 이곳에 와서 꿈과 재능을 펼치며 '깨어있는 시민'으로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는데, 그 싹을 자를 수는 없지 않는가. 아무튼 오늘도 아이들은 나의 스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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