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즌 정규리그 챔피언 흥국생명이 2경기 만에 시즌 첫 승을 챙겼다.

박미희 감독이 이끄는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는 21일 인천 계양체육관에서 열린 도드람 2017-2018 V리그 여자부 홈개막전에서 KGC인삼공사를 세트스코어 3-2(23-25.25-19.20-25,25-22,15-5)로 꺾었다. 흥국생명과 인삼공사은 이날 풀세트 경기를 치르면서 이번 시즌 여자부는 개막 후 5경기 연속 풀세트 행진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흥국생명의 외국인 선수 테일러 심슨은 52.6%의 공격 점유율을 기록하며 무려 43득점을 올렸고 '토종 에이스' 이재영도 17득점으로 뒤를 이었다. 흥국생명은 센터 김수지(IBK기업은행 알토스)의 이적으로 높이가 낮아졌음에도 블로킹에서 11-10으로 인삼공사에게 우위를 점했다. 개막전 4블로킹에 이어 이날도 5블로킹을 기록하며 10득점을 올린 '꼬북이' 정시영의 활약 덕분이었다.

 정시영은 흥국생명의 주전센터로서 완벽에 가까운 시즌 초반을 보내고 있다.

정시영은 흥국생명의 주전센터로서 완벽에 가까운 시즌 초반을 보내고 있다. ⓒ 한국배구연맹



어느 포지션에도 정착하지 못했던 어중간한 멀티 플레이어

초등학교 5학년 때 배구를 시작한 정시영은 양날개와 센터를 오가며 다방면에서 재능을 보이던 유망주였다. 경남여고 시절에는 선배 김유리(GS칼텍스 KIXX), 동기 장영은(인삼공사)과 함께 학교를 전국대회 상위권으로 이끌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2011년 신인 드래프트에서는 큰 주목을 받지 못하며 2라운드3순위로 흥국생명에 지명됐다.

야구, 축구, 농구, 배구 등 단체 구기종목에서 여러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다는 점은 선수로서 커다란 장점이다. 하지만 이는 바꿔 말하면 어느 하나 전문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 포지션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불행하게도 정시영은 여기에 해당됐다. 프로 무대에서 센터를 맡기에는 신장(180cm)이 작았고 레프트를 하기엔 수비가 약했다. 그렇다고 외국인 선수의 자리인 라이트를 소화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고질적으로 발목이 좋지 않았던 정시영은 잦은 부상과 재활로 자리를 비우는 경우가 많았다. 2014년 흥국생명의 사령탑으로 부임한 박미희 감독은 정시영을 리시브를 하는 윙스파이커로 키우겠다고 밝히고 집중지도에 들어갔지만 정시영은 2014-2015 시즌 부상으로 단 9경기 출전에 그쳤다. 2015-2016 시즌에는 공윤희, 이한비 등과의 주전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웜업존을 달구는 시간만 늘어갔다.

박미희 감독은 날카로운 서브와 공격력, 그리고 블로킹 능력까지 겸비한 다재다능한 정시영을 더욱 요긴하게 활용하고 싶었다. 하지만 35%에도 채 미치지 못하는 불안한 리시브 성공률이 번번이 정시영의 발목을 잡았다. 결국 정시영은 흥국생명이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한 지난 시즌에도 수비가 좋은 신연경에게 주전 자리를 내주고 원포인트 서버 혹은 점수 차이가 많이 났을 때 투입되는 소위 '가비지 멤버'로 활약했다.

정시영은 2016-2017 시즌이 끝난 후 FA자격을 얻었지만 여자부의 '선수 대이동' 속에서도 한 번도 풀타임 주전으로 활약한 적이 없는 정시영을 찾는 구단은 없었다. 결국 정시영은 7500만 원에 흥국생명과 재계약했는데 기회는 의외의 곳에서 찾아왔다. 지난 2014년 흥국생명에 입단한 후 세 시즌 동안 주전 센터로 활약했던 김수지가 기업은행으로 이적한 것이다.

센터 변신 후 2경기에서 블로킹 9개, 붙박이 주전 등극?

흥국생명은 보상선수 지명과 트레이드를 통해서도 센터를 보강하는 데 실패했고 결국 내부에서 새로운 센터 자원을 구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박미희 감독은 그 동안 날개 공격수로 적응에 실패했던 정시영을 주목했다. 비록 신장이 작다는 약점이 있지만 뛰어난 운동능력과 그 동안 프로에서 쌓인 경험들로 센터 포지션에 적응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한 것이다. 사실 지난 신인 드래프트에서 센터로 흥국생명에 지명된 정시영에게 미들브로커는 그리 낯선 포지션이 아니다.

정시영은 지난 9월 천안·넵스컵에서 센터로 출전하며 가능성을 타진했다. 비록 흥국생명은 조별예선에서 2연패를 당하고 탈락했지만 정시영은 서브 6위(세트당 0.43개), 블로킹 5위(세트당 0.71개)에 오르며 센터로서 적응할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을 보였다. 흥국생명에는 프로 5년 차를 맞는 임해정을 비롯해 이호빈, 황현정 같은 센터요원이 있지만 박미희 감독은 김나희와 파트너를 이룰 흥국생명의 선발 센터로 정시영을 낙점했다.

지난 14일 기업은행과의 개막전에서 선발 센터로 출전한 정시영은 교체 없이 풀타임을 소화하며 8득점을 올렸다. 비록 공격성공률은 30%에 그쳤지만 1개의 서브득점과 4개의 블로킹, 11개의 유효블로킹(자기 팀의 수비로 연결된 블로킹)을 기록하는 쏠쏠한 활약을 펼쳤다. 지난 시즌 센터로 활약한 시간이 거의 없었던 점을 고려하면 합격점을 받기 충분한 활약이었다.

그리고 정시영은 흥국생명이 시즌 첫 승을 거둔 21일 인삼공사전에서 더욱 확실한 존재감을 보여줬다. 양 팀 합쳐서 가장 많은 5개의 블로킹과 한 개의 서브득점을 포함해 개막 두 경기 만에 두 자리 수 득점(10점)을 올린 것이다. 특히 입단 동기 조송화 세터와 본격적으로 호흡을 맞추고 있는 이동 공격은 5개를 시도해 3개나 성공시켰다. 4세트 24-22의 아슬아슬한 리드에서는 경기를 풀세트로 이끄는 귀중한 서브득점을 올리기도 했다.

지난 시즌의 한수지(인삼공사)나 이번 시즌 남자부의 조재영(대한항공)처럼 타 포지션 선수들의 센터 변신은 비교적 잦은 편이다. 체력 소모가 적고 상대적으로 적응하기도 쉬운 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시영처럼 센터로 변신하자마자 전문 센터들을 제치고 블로킹 부문 리그 3위(세트당 0.90개)에 오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센터로서 범상치 않은 재능을 뽐내고 있는 정시영은 2017-2018 시즌 흥국생명의 풀타임 주전 센터가 될 수 있을까.


☞ 관점이 있는 스포츠 뉴스, '오마이스포츠' 페이스북 바로가기

프로배구 도드람 2017-2018 V리그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 정시영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