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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단체의 회원으로 오래 있다 보면 가끔 그런 전화를 받곤 한다. 자신이나 혹은 주변 사람이 성폭력 피해를 입었는데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연락. 그러나 사실 대부분의 경우 나 역시도 해줄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그저 피해 사실을 듣고 또 들은 다음 알고 있는 성폭력 상담소의 연락처를 전달해 주는 것 외에는 말이다.

절박한 목소리 앞에서 어느 누구나 전할 수 있는 답을 말할 때면 미안함과 안타까움이 들곤 한다. 그리고 동시에 그런 생각도 든다. 아마 내가 단체에 몸을 담고 있지 않았다면,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나를 신뢰할 만한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다면, 아마 나는 평생 몰랐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쩌면 누군가는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냥 경찰에 신고하면 되는 일이 아니냐고.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여성가족부의 '2016년도 전국 성폭력 실태조사'를 살펴 보자. 보고서에 따르면 성폭력('폭행/협박을 수반한 성추행, 강간미수, 강간') 가해자의 70%는 피해자가 이미 알고 있던 사람이라고 한다.

여러 사례에서 보듯 그 '아는 사람'이란 대부분 피해자의 가족, 친척, 학교나 직장 동기와 선배다. 때문에 신고를 비롯한 피해 호소는 단순히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속한 집단의 문제가 되어 버린다.(물론 이것이 옳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특정 공동체 내에서 발생한 성폭력은 당연히 집단 전체가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맞다)

왜 성폭력 신고율은 낮은가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성폭력 사건을 제대로 다룰 만한 역량을 갖춘 공동체는 매우 드물다. 심지어 학생회나 노조, 시민단체조차도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상황이 이런데 성폭력 피해자를 둘러싼 편견(가령 피해 여성을 '꽃뱀'으로 모는 경우)과 잘못된 인식('처신을 잘못해서 그런 일이 발생한 것이 아니냐')까지 만연하다.

한편 이에 반해 성폭력, 특히 성추행의 경우 범죄의 특성상 정황을 제외하곤 목격자나 결정적인 증거물이 남는 경우는 많지 않다. 한마디로 피해자는 매우 불리한 구도에서 자신의 피해를 호소해야만 하는 것이다. 오히려 이를 이용해 가해자가 피해자를 협박하거나 문제를 해결해야 할 책임자들이 사건을 덮기에 급급한 사태가 늘상 발생한다.

또한 이 모든 난관을 뚫고 결국 경찰에 신고를 한다고 해도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사법기관은커녕 관공서 근처도 갈 일이 드물었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경찰·검찰·법원을 들락날락하는 싸움을 시작한다는 게 쉽게 내릴 수 있는 결단이 아니다. 성폭력 무고죄의 존재는 피해자가 하루 아침에 가해자로 몰릴지 모른다는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여기에 가해자 변호인과 수사 기관, 재판부의 인권 의식 부재로 피해자가 또 다른 고통을 겪는 일은 부지기수다.

그 결과 앞서 언급한 보고서에 따르면, 성폭력 피해의 신고율은 1.9%에 불과했다. 여성의 경우 피해 사실을 주변에 털어 놓는 경우가 48.1% 밖에 되지 않으며 이마저도 대부분 주변 친구나 이웃에 한정된다.

은폐된 범죄, 성폭력

 할리우드 영화제작자 하비 와인스틴(harvey weinstein)
 할리우드 영화제작자 하비 와인스틴(harvey weinstein)
ⓒ EPA/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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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성폭력은 사회적으로 은폐된 범죄다. 모두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규모, 심각성, 성격 등이 제대로 공유가 된 적이 없다. 특히나 일상에서 직접적으로 성적인 추행과 폭력을 경험하거나 혹은 이를 동성 집단 내에서 전해 듣는 여성들과 달리 남성들의 경우는 그 무지함이 심각한 정도다.

여성들과 성범죄를 이야기하면 대부분 대중교통 성추행이나 공동체 내 성폭력을 이야기 하지만 남성들은 '조두순'부터 찾는다. 이들에게 성폭력은 여전히 '어두운 길에서 낯선(그리고 어딘가 문제가 있는) 사람'에 의해 저질러지는 일이다. 그래서 자신이 생각한 각본과 다른 피해자의 이야기를 들으면 의심하고 회의한다. 그래서 피해 호소는 더욱 어렵게 되고 가해의 은폐는 쉬워지는 악순환이 발생한다.

이런 상황의 대표적인 사례가 최근 사람들을 경악케한 하비 웨인스타인 사건일 것이다. 할리우드의 유명 제작자로 이름을 떨쳤던 웨인스타인이 실은 30년 동안 여성 연예인들을 성폭행하거나 성추행 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잘 알려진 안젤리나 졸리, 기네스 펠트로, 레아 세이두, 아시아 아르젠토 외에도 무수한 무명 배우들과 웨인스타인 컴퍼니의 직원들이 피해를 입었다.

누군가는 큰 영향력을 지닌 스타들조차 진작에 폭로하지 않은 것에 의문을 가질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웨인스타인이 할리우드에서 무시 못할 권력을 가진 것을 차치하더라도, 일단 그는 겉보기엔 작품성 있는 영화를 만드는 의식 있는 예술인이었다. 민주당을 지지하는 자유주의자였으며 여성주의 운동에 힘을 보태고 관련 영화를 배급까지 했다. 이런 하비 웨인스타인을 성폭력 가해자라고 지목했을 때 더 힘든 싸움을 해야 하는 건 어느 쪽일까? 누가 매장될까? 답이 너무도 명백히 보이지 않는가?

 한국여성민우회는 '헐리웃과 한국 여성영화인들의 성폭력 피해 말하기를 지지합니다'라는 성명을 발표하며 #MeToo 운동에 동참했다.
 한국여성민우회는 '헐리웃과 한국 여성영화인들의 성폭력 피해 말하기를 지지합니다'라는 성명을 발표하며 #MeToo 운동에 동참했다.
ⓒ 한국여성민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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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경험을 말하기 시작한 생존자들

이런 상황에서 흥미로운 운동이 등장했다. 바로 '#MeToo' 운동이다. 16일 배우 알리시아 밀라노는 친구의 제안을 받았다며 '만일 성적인 추행이나 폭력을 겪은 모든 여성들이 'Me too'라고 말한다면 사람들에게 문제의 상황과 규모를 알려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이 운동은 10년 전 타라나 브룩이라는 한 운동가가 처음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데브라 메싱, 페트리샤 아퀘트, 레이디 가가 등 많은 수의 스타들이 이 운동에 동참했다. 또한 제니퍼 로렌스와 리즈 위더스푼 역시도 용감하게 자신의 피해 경험을 털어 놓았다. 또한 국내에서도 #MeToo에 함께하는 사람들은 늘고 있으며, 한국여성민우회는 여성영화인들의 성폭력 말하기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며 운동에 동참했다.

미국에서 시작된 운동이지만 아주 낯설지는 않다. 지난해 한국에서도 '#OOO_내_성폭력' 운동을 통해 다양한 분야의 성폭력 사례들이 이야기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MeToo에 대해서 그런 것처럼 이 운동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주요하게는 누군가의 성폭력 피해나 가해 사실을 이야기 하는 것만으로 바뀌는 것은 별로 없을 것이며 운동이 떠들썩한 폭로전으로 끝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결과적으로 지금의 성폭력 말하기가 SNS 밖에서의 제도적, 문화적 변화로 직접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운동이 그 지점까지 도달하지 못한다고 해도 바뀌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리란 전망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다.

 그룹 f(x)의 멤버인 엠버도 #MeToo에 참여했다
 그룹 f(x)의 멤버인 엠버도 #MeToo에 참여했다
ⓒ 트위터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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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Too가 가져올 변화

왜냐하면 앞서 언급했듯 성폭력은 공론화와 사법처리가 무척이나 어렵고, 이런 상황이 성범죄 문제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방해해 피해가 더욱 드러나기 어려운 현실을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수한 여성들이 '나 역시도 그런 일이 있었다'고 피해 사실을 고백하면 어떻게 될까.

전형적인 피해자상을 벗어난 다양한 생존자들이 자신이 겪은 일을 이야기 한다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전형적인 성폭력 서사와는 달리 일상 생활에서, 전혀 그런 일을 하리라 간주되지 않는 남성들로부터 겪었던 피해를 이야기한다면. 성범죄의 무풍지대라 여겨진 분야와 지위에 있던 여성들이 자신이 겪은 폭력을 말한다면. 즉 성폭력을 둘러친 거대한 베일을 벗겨 버린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아마 남성들은 이전에는 무지하거나 혹은 방관해도 괜찮았던 문제들을 직면하게 될 것이다. 성폭력 피해에 찍힌 낙인과 편견 때문에, 이전에는 여성들이 속으로 삼키거나 사적으로만 공유했던 경험들이 수면 위로 올라올 것이다. 알리시아 밀라노의 말처럼 성폭력 사건의 규모와 심각성, 그리고 정확한 유형들이 알려질 것이다.

지금까지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대다수의 성폭력 사건들은 해결은커녕 제대로 된 인식조차 불가능했다. 즉 말하기는 끝이 아니라 변화의 발판이다. 이래도 '폭로'가 할수 있는 일이 없다고 할 것인가. 페미니스트 시인 뮤리엘 루카이저는 '만약 한 여성이 자신의 삶에 대해 진실을 털어놓는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세상은 터져 버릴 것이다'라는 말을 남긴 바 있다. 그리고 그 일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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