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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축구가 아시아 맹주로 군림하던 1970년대에도 동남아축구는 꽤 실력이 있었다.

1960~1970년대 메르데카컵, 킹스컵, 머라이언컵 등 동남아에서 개최되던 이들 대회는 축구팬뿐만 아니라 온 국민들의 관심의 대상이었고, 차범근, 이회택, 조광래, 이영무, 신현호 같은 걸출한 축구스타들이 그라운드를 누비며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돌이켜 보건대, 당시 아시아축구의 강자로 군림하던 한국 축구가 유독 미안마, 태국, 말레이시아와 경기 때마다 매번 고전을 겪었던 기억이 지금까지도 생생히 남아 있다.

박정희 이름 단 대회, 2회 연속 우승 빼앗은 버마 대표팀

 1971년 당시 서울운동장(구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제1회 박정희대통령컵쟁탈국제축구대회 모습.
 1971년 당시 서울운동장(구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제1회 박정희대통령컵쟁탈국제축구대회 모습.
ⓒ e영상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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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동남아축구를 대표하는 맹주는 지금은 축구변방으로 추락한, 미얀마(현재 FIFA랭킹 155위)였다. 막강한 공격력을 앞세운 당시 미얀마 축구는 아시아권에선 한국축구를 위협하는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었다. 그 외에도 잠시 반짝하다 끝나긴 했지만, 캄보디아 축구 역시도 만만치 않은 실력을 과시해 올드 축구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

특히, 당시 '버마'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미얀마의 축구는 훗날 박스컵(PARK'S CUP)으로 이름을 바꾼 1971년 제1회 박정희 대통령컵 쟁탈국제축구대회에서 우리나라 국가대표팀인 화랑과 함께 무승부로 결국 재경기까지 치른 가운데 공동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2회 대회에선 미얀마가 단독우승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당시 준결승에서 전반 23분 미얀마 공격수 몽예뉜이 날린 25m 중거리 슛 한 방이 차범근이 공격을 주도한 한국 대표팀을 1-0으로 꺾자, 흑백TV로 전후반 90분 경기가 끝났을 때 이를 지켜보던 많은 한국 축구 팬들이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미얀마 축구와의 악연이 끝난 건 아니었다. 한국팀은 그 이듬해인 1973년 9월 열린 제3회 대회에서도 또다시 미얀마와 준결승에서 만났고, 전반 30분 미얀마 공격수 몽틴윈이 헤딩 슛을 성공시켜 또다시 1-0으로 승리를 거둠으로써, 한국축구의 자존심마저 무너뜨리고 말았다. 결국 자신의 이름을 딴 3회 대회마저 공동우승컵을 차지한 미얀마와 캄보디아에 밀려 3위로 머물자, 시상식을 마친 뒤 박정희 대통령이 당시 경호실장이었던 차지철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는 일화가 지금까지 전해진다.

 박대통령의 이름을 딴 제1회 국제축구대회에서 동남아축구강호 미얀마(당시 버마)가 한국과 무승부끝에 공동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미얀마는 3회 대회까지 연거푸 우승을 차지해 아시아 축구강호로 명성높던 한국축구의 체면을 구기게 했다.
 박대통령의 이름을 딴 제1회 국제축구대회에서 동남아축구강호 미얀마(당시 버마)가 한국과 무승부끝에 공동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미얀마는 3회 대회까지 연거푸 우승을 차지해 아시아 축구강호로 명성높던 한국축구의 체면을 구기게 했다.
ⓒ e영상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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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방에서 열린 대회에서 2년 연속으로 강적 미얀마에 패해 결승진출이 좌절되자, 한국축구는 한동안 미얀마 축구의 공포에서 헤어나질 못했다. 마치 중국축구가 유독 한국에만 약해 붙여진 별명인 '공한증'처럼 한국축구 역시 '공미증'에 시달린 것이다. 그나마 한국축구가 미얀마축구 콤플렉스를 조금씩 극복하기 시작한 것은 같은 해 12월 태국 방콕에서 열린 킹스컵 4강전에서 미얀마를 2-0으로 꺾으며, 3개월 전 패배를 설욕한 후부터였다.

이렇듯 당시 미얀마를 필두로 동남아축구는 예상보다 훨씬 강했다. 지금까지도 많은 올드축구팬들은 과거 동남아 축구를 기억한다. 그랬던, 동남아 축구가 급격히 기울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중반부터다. 한국이 32년 만에 월드컵 본선 진출 쾌거를 이룬 데 이어 막강한 자본력까지 갖춘 일본축구가 기술축구로 더욱 강해지고, 사우디에 이란, 이라크 등 중동의 전통강호들이 득세하는 가운데,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에 이어 호주까지 아시아 축구권에 들어서면서부터다.

그런데 최근 들어 갑자기 동남아축구가 부활의 날개짓을 퍼덕이기 시작했다. 여느 유럽국가 못지않은 축구 팬들의 뜨거운 열기와 관심에 힘을 받아 축구마케팅시장이 커지면서 부터다. 태국과 베트남, 말레이시아, 캄보디아 등 이들 국가는 단 한 번도 월드컵 본선에 진출해보지 못한 나라들이지만, 요즘 축구에 대한 관심과 열기는 유럽 프리미어리그 못지않다. 축구경기가 열리는 밤이면 대형TV가 설치된 현지 시내 노천 카페와 술집들은 축구 팬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 올림픽스타디움은 A매치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6만 관중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어 시내에 교통대란이 일어날 정도다.

동남아에서 큰 성과 못 거둔 한국 감독들

 동남아의 가난한 나라 캄보디아도 6만관중이 몰릴 정도로 축구에 대한 관심과 열기가 뜨겁다.
 동남아의 가난한 나라 캄보디아도 6만관중이 몰릴 정도로 축구에 대한 관심과 열기가 뜨겁다.
ⓒ 박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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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국 축구의 실력을 한 단계 끌어올리기 위해 외국인 선수들과 감독을 영입하는 것도 동남아국가들 사이에선 흔한 일이 된 지 이미 오래다. 근래 6억 인구를 바탕으로 동남아 경제가 살아난 덕도 있다. 대기업들의 광고후원이 늘자 막강해진 자금력을 바탕으로 각국 축협들이 경쟁적으로 축구선진국 출신 우수한 지도자 영입에 열을 올리고 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이들 동남아국가들은 대부분 유럽 출신 축구 감독보다는 아시아 출신 감독들을 선호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축구기술로만 따지면 유럽이 훨씬 앞서지만, 선수들과 교감은 동양 출신 감독이 더 낫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동남아 국가들은 한국축구협회에도 종종 러브콜을 보내온다.

한국의 축구 실력이 예전만 못함에도 불구하고 동남아에선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를 비롯해 과거 명성을 여전히 기억하는 현지 축구관계자들이 많은 것도 이유로 해석된다. 그 덕분에 여러 한국인 감독들이 동남아로 진출할 기회를 꾸준히 얻었다. 국가대표팀 감독뿐만 아니라 프로팀 감독으로 진출한 한국출신 감독들도 적지 않다.

캄보디아 축구는 전 한국여자국가대표팀 감독을 지낸 이태훈 감독을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영입했으며, 홍콩은 김판곤 감독에게, 미얀마는 박성화 감독에게 각각 지휘봉을 맡겼다. 이로 인해 한때나마 한국 축구의 기술이 동남아 축구에 보급돼 과거 영광 부활에 큰 기여를 하게 될 것이란 기대감으로 부풀게 했다. 이를 계기로 열성적인 일부 한국축구팬들은 동남아축구에도 조금씩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년이 지난 지금,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한국출신감독들이 기대만큼 큰 성과는 거두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우선 캄보디아는 이태훈 감독이 거의 7년 가까이 국가대표팀과 올림픽팀을 이끌었지만, 그동안 거두어들인 성적은 초라하다. 러시아 월드컵 2차 조별리그에서 단 1승도 거두지 못한 채 탈락하는 비운을 겪어야 했다.

현재 피파랭킹 172위 동남아 최약체팀을 이끌고 사상 처음 월드컵 1차 예선을 통과한 사실만으로 잘 한 것이란 평가도 있었고, 현지축구팬들도 이 감독의 지휘능력에 좋은 평가를 내렸다. 하지만, 캄보디아 축구협회만큼은 생각이 달랐던 것 같다. 결국 이태호 감독은 금년 3월 브라질 출신 레오나르도 비토리노 감독으로 전격 교체돼 지금은 이나라 15세 이하 유소년팀만을 맡고 있다.

김판곤 홍콩 감독 역시도 피파랭킹 142위 홍콩팀을 수년째 이끌고 있지만, 지난 2012년 AFC 대회에서 사우스차이나 클럽팀을 이끌고 4강에 오른 것 말고는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나선 A매치경기에선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2019 UAE아시안컵 3차 최종라운드 조별리그에서 북한과 1-1 무승부를 기록한 가운데 2위 1승 2무 2패 승점 5점만을 기록, 조2위까지 주어지는 본선진출에 그나마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있는 상황이다.

 캄보디아국가대표팀을 7년간 이끌다 성적부진으로 지난 3월초 물러난 이태훈 전 감독.
 캄보디아국가대표팀을 7년간 이끌다 성적부진으로 지난 3월초 물러난 이태훈 전 감독.
ⓒ 박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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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국가대표팀을 맡았던 박성화 감독의 케이스는 한국축구에 대한 신뢰마저 무너뜨리는 뼈아픈 결과까지 초래했다. 지난 2013년 미얀마대표팀을 이끌던 박 감독은 성적과 무관하게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질러 자리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44년 만에 미얀마 홈에서 열린 제27회 아세안게임(SEA Games)에서 박 감독은 당시 경기룰을 잘못 이해해 결국 미얀마는 4강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조별 리그 마지막 경기를 남긴 상황에서 박 감독이 이끄는 미얀마는 2승1무 승점 7점으로 조 2위였고 3위 인도네시아는 1승1무1패 승점 4점이었다. 골득차는 무려 7점차로 미얀마가 앞서 있었다. 박 감독은 이 경기에서 패하더라도 승점이 같아지지만, 골득실차에서 훨씬 앞서기에 4강 진출이 무난할 것으로 확신했다. 그래서 4강전을 대비해 주전선수의 체력안배를 위해 후보 선수들로만 경기를 치렀다. 결과는 0-1로 패였다.

박 감독은 주심의 경기종료 휘슬이 울리기 직전까지도 미얀마가 당연히 4강에 오른 줄 알았다. 그런데 상대팀 인도네시아가 올라갔다. 경기룰이 월드컵과 다르다는 사실을 오직 박 감독만 몰랐던 것이다. 아세안게임 게임룰은 승자승원칙이 적용된다. 즉, 승점이 같을 경우 골득실과 상관없이 이긴 팀이 오른다는 경기규칙을 박 감독만 몰라서 결국 홈팀 미얀마가 결국 4강에 오르지 못한 것이다.

당시 경기가 끝나자마자 미얀마 관중들이 크게 분노했다. 박 감독을 비난하는 폭동에 가까운 항의가 경기가 끝난 후까지 한 시간 넘게 지속됐다. 경찰 수 백여 명이 동원됐지만, 쓰레기통에 불을 지르고 물병을 집어던지는 군중들의 항의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당시 경기를 참관한 한 관계자는 팬들의 항의가 소요사태에 가까웠다고 당시 상황을 증언했다. 그는 덧붙여 "박 감독이 신변안전에 위협을 느껴 다음날 새벽 급히 비행기표를 끊고 미얀마를 떠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후 미얀마에서는 한국출신 감독을 보지 못하게 됐다. 박 감독 탓으로 돌릴 수는 없지만 그 사건 이후로 다른 동남아국에서도 한국출신 감독들을 찾는 나라도 줄고 입지도 그만큼 좁아졌다. 그리고 그 틈을 타고 어느새 일본축구가 비집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캄보디아를 비롯해 동남아 여러나라에 일본 축구스타 혼다 케이스케가 지원하는 프로축구팀과 축구아카데미가 창설되기 시작했고, 일본축구협회 역시 막강한 자금력을 내세워 자국출신 감독영입을 타진하는 등 스포츠외교로 동남아에서 자신들의 영향력과 입지를 구축하려는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다.

이로 인해 이제는 일본의 축구 실력에 자금력까지 밀려 더 이상 동남아에서 한국축구가 설 자리가 없어진 게 아닌가 하는 우려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던 차에 뜻밖에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박항서 감독에게 거는 기대

 박항서 베트남 축구 대표팀 신임 감독이 지난 11일(현지시간) 베트남 하노이의 베트남 축구협회에서 정식 감독계약 체결식을 가진 뒤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박 감독은 이날 회견에서 "베트남 축구대표팀을 동남아시아 정상, 아시아 정상으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박항서 베트남 축구 대표팀 신임 감독이 지난 11일(현지시간) 베트남 하노이의 베트남 축구협회에서 정식 감독계약 체결식을 가진 뒤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박 감독은 이날 회견에서 "베트남 축구대표팀을 동남아시아 정상, 아시아 정상으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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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항서 감독(58, 전 창원시청감독)이 베트남 국가대표팀을 이끌게 됐다는 소식이다. 박 감독은 이미 언론에 알려진 바와 같이 지난 10월 11일 베트남 호찌민에서 감독직을 수락하는 사인을 했다. 보도내용에 따르면, 계약 기간은 2년 이상이며, 대우는 동남아에선 최고 대우로 알려졌다. 박 감독은 베트남 국가대표팀뿐만 아니라 올림픽 대표팀도 총괄지휘를 맡게 된다. 향후 성적에 따라 계약 기간 연장 및 추가 지불되는 인센티브도 받게 될 것이란 소식이다.

하지만 베트남 대표팀 감독직은 '독이 든 성배'라는 지적이 많다. 지난 1991년 이후 올해까지만 무려 26명의 감독이 교체되었기 때문이다. 박 감독의 책임이 그만큼 무거울 수밖에 없다.

그는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지난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끈 거스 히딩크 감독을 보좌한 감독이다. 히딩크의 기술과 전략을 가장 잘 전수받은 그이기에 그만큼 거는 기대도 크다. 국내언론들도 이 같은 기대감을 드러냈다. 강원FC에서 활약 중인 베트남출신 쯔엉 선수와 같이 한국축구를 잘 아는 선수들과 호흡을 맞춘다면 베트남도 저력을 발휘해 동남아 축구강자로 떠오를 수도 있다. 

박 감독은 국내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베트남에 한국 축구의 우수함을 보여주겠다"고 다짐한 바 있다.

박 감독의 베트남 대표팀 첫 데뷔전은 다음 달 14일 홈에서 열리는 2019 아시안컵 3차 최종조별리그 아프가니스탄전으로 예상된다. 베트남은 지난 10일 C조 경기에서 캄보디아를 상대로 5-0 대승을 거둔 가운데, 같은 조 1위 요르단과 승점은 같지만, 득점에 밀려 2위를 기록 중이다. FIFA랭킹 152위 약체 아프가스니스탄전에서 승리를 거두면, 마지막 남은 요르단과의 경기결과에 상관없이 2019년 아랍에밀레이트(UAE)에서 열리는 AFC아시안컵 본선진출을 확정 짓게 된다. 대진운에 따라 본선에서 한국과도 맞붙을 수가 있다.

현재 전 세계에 나간 한국출신 감독은 이번에 계약한 박항서 베트남 신임감독과 김판곤 홍콩 감독 단 2명 뿐이다. 우리축구팬들이 두 감독에 거는 기대가 유독 큰 이유이기도 하다. 부디 한국축구 감독의 손에 다시 한번 동남아축구가 부활하길 기대해본다.

 대형 베트남국기를 편 채 응원전을 펼치고 있는 베트남축구팬들. 국가대항 A매치가 열리는 날은 항상 이같은 이벤트가 펼쳐진다
 대형 베트남국기를 편 채 응원전을 펼치고 있는 베트남축구팬들. 국가대항 A매치가 열리는 날은 항상 이같은 이벤트가 펼쳐진다
ⓒ 박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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