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국제영화제


중장년에 접어든 사람들은 막막한 기분을 느낄 때가 있다고 합니다. 아무리 사회적으로 성공했더라도, 가정이나 일터에서 자신이 예전만큼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힘이 쭉 빠진다는 거죠. 그래서 이 나잇대가 되면 골프나 등산, 낚시 같은 새로운 취미를 즐기거나, 반려동물을 키우고 텃밭을 가꾸기 시작하는 경우가 많아집니다.

이 영화 <뽀빠이>의 주인공 타나가 바로 딱 그런 상황입니다. 그는 태국의 중견 건축가로서 20여 년 전 방콕 중심가의 랜드마크인 가든 스퀘어를 만들었던 장본인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회사에서 신세대인 새 사장에게 무시당하는 것 같고, 오랫동안 함께 해 온 아내와의 관계도 예전 같지 않아 심각한 위기감을 느낍니다.

그런데 이때, 기적과도 같은 일이 생깁니다. 방콕 시내에서 길거리 공연을 하는 늙은 코끼리 한 마리를 본 것입니다. 그는 이 코끼리가 어릴 적 시골집에서 길렀던 '뽀빠이'임을 확신합니다. 당시 즐겨 보던 만화 영화 시리즈 <뽀빠이>의 주제가를 흥얼거리자 곧바로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죠. 타나는 주인에게 돈을 주고 코끼리를 사서 집으로 데려오고, 우여곡절 끝에 뽀빠이와 함께 고향 마을로 떠나게 됩니다.

본격 '코끼리' 로드 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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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내용만 놓고 보면 독특한 이야기나 설정은 없습니다. 여느 로드 무비처럼 타나와 뽀빠이는 노숙자, 트랜스젠더, 경찰 등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만납니다. 길 위에는 삶과 죽음이 있고, 사랑과 미움이 있으며, 웃음과 낭만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코끼리라는 특별한 존재입니다. 코끼리와 인간이 단짝이 되어 떠나는 도보 여행은 낯설고 이국적이면서도 따뜻합니다. 표면적으로는 타나가 뽀빠이를 데리고 떠난 여행이지만, 실질적으로 영화 내내 타나를 돌보고 그를 치유의 길로 인도하는 것은 뽀빠이입니다.

기본에 충실한 이 영화의 각본은 여러모로 뛰어납니다. 특히 설정 부분에서 시간대를 뒤섞어 관객이 인물에 대한 흥미와 관심을 유지하게 한 것, 중심 플롯의 주제를 변주한 서브플롯들이 인물의 내적 변화 과정과 정교하게 맞물리도록 구성한 것 등이 돋보이는 부분입니다.

감독의 연출력도 좋습니다. 작가로서 인물의 감정이 드러나는 순간을 포착하는 관찰력과 그것을 논리적으로 배열할 줄 아는 능력을 제대로 갖추고 있습니다. 특별한 기교 없이 샷의 크기 변화와 편집 타이밍만으로 블랙 코미디와 휴먼 드라마를 오가는 재미를 선사하기도 합니다.

젊은 여성 감독의 범상치 않은 데뷔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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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본을 직접 쓰고 연출한 싱가포르 출신의 젊은 여성 감독 커스텐 탄(Kirsten Tan)은 이 영화가 장편 데뷔작입니다. 단편 시절부터 주목받았고, 2006년에는 전주국제영화제가 주최한 '아시아 젊은 영화인을 위한 포럼(AYFF)'에 초청받아 한국에서 체류한 적도 있습니다. 또한 태국에서 자유로운 삶을 만끽하며 다양한 문화적 경험을 하기도 했지요. 현재는 영화과 석사 과정에 입학했던 미국 뉴욕에서 8년째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방랑자이자 국외자로서 살아온 삶의 경험이 이 영화를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영화 속 타나 같은 중장년층 남자들이 겪는 심리적 문제는 결국 '내가 이런 취급을 당할 사람이 아닌데 여기서 왜 이러고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 비롯됩니다. 하지만 누구도 완벽할 수는 없고, 사람들은 실제보다 자신을 과대 평가하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부풀려진 자아상을 바로 잡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제일 좋은 방법이지요. 그것이 바로 희한하게 웃기면서도 가슴 한 구석을 시리게 만드는 이 영화의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뽀빠이>는 올해 초 선댄스 영화제에서 월드시네마 극영화 부문 각본상을 받은 작품으로, 얼마 전에는 내년 아카데미 영화제 외국어 영화상에 싱가포르 대표로 추천받기도 했습니다. 부산영화제 아시아영화의 창 부문 초청작이며 17일 오후 4시, 19일 저녁 8시, 20일 오전 11시 등 모두 세 번의 상영이 남아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권오윤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cinekwon.wordpress.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뽀빠이 커스텐 탄 BI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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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책에 관심 많은 영화인. 두 아이의 아빠. 주말 핫케익 담당.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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