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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추억의 잇템이 있기 마련입니다. 리바이스 대신 '뱅뱅'이나 '잠뱅이'로 남다른 자태를 뽐내기도 했고, '루카스' 가방을 매고 으쓱 했었죠. '하두리캠'에 열광하고, '나이트클럽'에서 열라 놀던 그때, 우리의 20세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것은 장미입니다...) [편집자말]
얼마 전 중학생 아들이 운동화를 사야 한다기에 따라나섰다. 남들은 부모에게 부담이 될까 봐 브랜드 운동화를 사주겠다고 해도 마다한다는데, 아들은 이미 점찍어둔 브랜드가 있었다.

운동화 메이커가 즐비한 상가를 지나다 문득 '프로스펙스'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내 기억 속에 있는 흰색으로 쫙 빠진 라인에 큼직한 마크가 길게 뻗은 예전 모습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름만으로도 내가 학창시절 신었던 기억에 마냥 반갑다. 슬며시 웃음부터 나온다. 내친김에 아들에게 권해봤다.

"아들, 이거 어때? 국산 메이커에 디자인도 단순하고... 교복뿐만 아니라 다양한 옷들과 매치할 수 있겠는걸?"
"아니, 촌스럽게? 그러니까 아재 소리 듣는 거예요. 요즘 그거 신는 애들이 어디 있어요?"

예전의 내 기억으로는 꽤 멋진 운동화로 기억되는데, 아들은 단번에 거절했다. 결국, 아들은 '나이키'와 '아디다스' 그리고 '뉴발란스' 매장을 돌다 결국 하나를 골랐다. 아들이 고른 신발을 살펴보고 또 신은 걸 보니 멋져 보이는 건 사실이었다. 그랬다. 우리가 말하는 '운동화'는 이제 아이들에게 더 이상 운동할 때 신는 신발이 아니었다. 운동화는 이제 패션의 완성이었다. 그리고 이제 청소년 사이에서는 엄연한 '패션 아이템'의 일부분으로 자리를 잡았다.

'신발제국' 프로-스펙스, "아식스맨이 스포츠맨!"을 기억하십니까

1983년 3월 24일 프로스펙스 지면광고(동아일보)
 1983년 3월 24일 프로스펙스 지면광고(동아일보)
ⓒ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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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당시 나는 중학교 3학년이었다. 당시 주력 아이템인 '나이키' '프로스펙스' '아식스' 등으로 이어지는 라인업은 가히 선망의 아이템이었다. 아마도 그 당시의 열풍이 지금의 패션 슈즈 시장의 기폭제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국내 제조사 화승이 만든 '나이키'와 '신발제국'으로 불린 국제상사에서 만든 '프로스펙스'는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며 이때부터 신발 시장은 브랜드 열풍에 빠져들었다.

학교에서 신는 운동화는 부의 상징이었다. 하이틴 스타가 나오는 운동화 광고는 꿈에서까지 우리를 처절하게 괴롭혔다. 스타가 신은 날렵한 운동화 디자인을 상상하는 것으로도 덩달아 스타가 된 것 같았다. 지금은 '아이폰6'를 '아식스(6)'라고 부른다지만, 당시 가장 유명한 운동화 CF는 '아식스'였다. TV에서 "아식스맨이 스포츠맨!"이라는 구호로 마무리되는 강렬한 로고송은 34년이 지난 지금도 뇌리에 박혀있다.

실은 운동화가 우리나라 시장에 나온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지금의 운동화와 비슷한 제품이 등장한 것은 일제강점기였고, 착용감이 좋고 잘 벗겨지지 않아 '편리화'나 '경제화'로 불렸다. 그러던 것이 서양에서 들어온 신식 운동 종목에서 성과를 발휘하기 시작했고 특히 발을 보호하는 데는 이만한 게 없었다. 이후 '운동화'라는 이름으로 알려지며 변신을 거듭하게 된 것이다.

획일적인 교복 세대라 운동화 하나로 성별·신분은 물론 부모의 경제적 지위를 가늠하는 지표가 되던 시절이었다. 당시의 물가를 고려하고 2만~3만 원에 이르는 운동화 가격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등골브레이커'의 기원이었다. 시험을 잘 봤다고 엄마가 처음으로 사준 새 운동화를 잃어버리고 눈물을 흘리며 실내화를 신고 귀가하는 일은 드물지 않은 사건이었다. 이것 또한 남의 일이 아니었다.

신발을 사수하기 위한 신발주머니는 선택이 아닌 필수 아이템이었지만 꾼들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새 운동화를 사수하기 위한 나름의 비결은 눈물겨웠다. 오죽하면 새 운동화를 지키기 위해 쉬는 시간이면 소변까지 참으며 복도에서 한참이나 지키고 섰다가 들어왔을까. 어디 그뿐인가. 어차피 스케이트로 갈아신어야 하는데, 롤러장 한번 가기 위해 왜 그토록 새 운동화를 사달라고 떼를 썼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타이거' '아티스' '까발로' ... 운동화의 춘추전국시대

1984년 10월 13일 아식스 지면광고(동아일보)
 1984년 10월 13일 아식스 지면광고(동아일보)
ⓒ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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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내가 살던 시골 도시에도 '미즈노'와 '아식스' 대리점이 들어섰다. '아식스'는 일본에서 들어왔다는 이유로 나름의 인기가 있었다. 가격은 '나이키'부터 '프로월드컵'까지 그렇게 큰 차이는 없었다. 지금과는 다르게 당시의 운동화는 진짜 운동할 때 신거나 교복과 함께 신는 신발이었다. 하지만 나름 서열이 분명하게 존재했다.

고가에 속하는 라인으로는 '나이키' '프로스펙스' '아식스' '미즈노' 등이 있었고 그 뒤를 '프로월드컵'과 '스펙스' '타이거' '아티스' '까발로' 등이 뒤를 이었다. 특히 검정 바탕에 노란 줄무늬가 있는 '타이거'는 이중 안전핀으로 유명했다. 그 외에도 많은 브랜드가 있었지만 그다지 존재감은 없었다.


1980년대는 그야말로 운동화의 춘추전국시대였다. 그중 토종 메이커인 '프로스펙스'는 1990년대까지 '나이키'보다 점유율이 훨씬 높을 만큼 큰 인기를 누렸다. 2007년 국제상사에서 LS네트웍스로 인수된 이후 로고를 여러 차례 바꾸고 인지도를 높이고 있지만, 예전의 영광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후 1990년대 초반까지 운동화의 강자는 단연 '나이키'와 '아디다스'였다. 틈새시장을 노리고 이랜드가 야심차게 도입한 '푸마'는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했지만 2000년대 초반 '스피드캣'이 연 매출 1000억 원을 돌파하며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이후 2006년 EXR코리아의 '컨버스'가 혜성처럼 등장해 전국에 100여 개의 매장을 돌파했고, 2008년에는 '컨버스'의 뒤를 이어 '나이키 포스'가 계보를 이었다.

드디어 '뉴발란스'의 시대가 도래했다. 2009년 1월, 이효리가 SBS <패밀리가 떴다>에서 신고 나온 시청자들이 듣도 보도 못한 이 레어아이템은 전국을 요동치기 시작했다. 바로 '뉴발'이었다. '스피드캣' 이후 그다지 빛을 보지 못했던 이랜드는 '뉴발란스'로 단숨에 과거의 위상을 되찾았다.

운동화 하나에 들썩였던 사람들

현빈의 신발은 대유행을 몰고왔다. 드라마 <시크릿가든> 중 한 장면.
 현빈의 신발은 대유행을 몰고왔다. 드라마 <시크릿가든> 중 한 장면.
ⓒ SBS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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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전 국민의 드라마였던 <시크릿가든>은 나이키 운동화를 날개 돋힌 듯 팔리게 했다. 극중 현빈이 신었던 나이키 '루나 글라이드2'는 방송에 한 번 등장한 후 없어서 못 팔 정도가 돼버렸다. 국내에서 사지 못하니 해외로 눈을 돌렸고, 이로 인해 해외직구가 활성화되는 원동력이 됐다. 다음해, '프로스펙스'는 국민 동생 김연아의 인기를 등에 업고 '연아 워킹화'를 출시했다, 이름만 워킹화였지, 연간 200만 켤레를 팔아 치웠으니 국민 신발이나 다름 없었다.

2013년, '리복'은 1980년대에 내놓았던 'GL6000'을 다시 선보인다. 여기에도 모델로 기용된 원더걸스 소희의 인기가 주효했다. 특히 중고등학생 사이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또다시 2014년은 '제2의 뉴발의 시대'였다. 명성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2009년 매출 600억 원으로 시작한 '뉴발란스'는 2014년 출시한 '999 체리블라썸'과 '880 달마시안'의 인기에 힘입어 매출 5000억 원을 가볍게 넘겼다. 이외에도 우리와 함께했던 운동화의 역사는 무궁무진하다.

이제 운동화는 단순한 신발이 아니다. 하루가 멀다고 다양한 디자인에 기능성을 갖춘 운동화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아웃도어 시장의 난립과 경기 불황 등 끊임없는 시련 속에서도 운동화의 변신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사전적인 의미로 운동화는 '운동할 때 신는 신발'이지만 사실 평상시에 신고 다니기에는 가장 편한 신발이기 때문이다.

또 운동 경기에서 몸값이 천정부지인 선수들 못지않게 주목을 받는 것도 바로 운동화다. 유명 운동화 브랜드의 각축장이 월드컵인 것처럼 스포츠와 운동화도 결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운도남(운동화 신은 도시 남자)와 운도녀는 이제 어디서나 쉽게 만날 수 있다. 어떤 브랜드가 우리와 함께할지 모르지만, 운동화는 앞으로도 또 그렇게 우리의 추억과 함께할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신발 한 켤레'로 세상 다 가진 기분

그거 아는가? 나이키 신발 하나면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은 기분. 나도 그랬듯이 부잣집 아들이 아니었던 대부분의 서민이 '나이키'와 '아디다스'가 꿈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그 꿈에 그리던 운동화를 신고 잊혀버린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

몇 해 전 배우 최민수는 아내 강주은씨와 함께 아들을 위해 <꼬마 운동화>라는 노래를 직접 만들고 불렀다. 이 노래는 "아직 세상을 모르는 내 아들의 작은 운동화" "수많은 길을 찾아서 수많은 꿈을 향해서 많은 길을 갈 거야, 그리고 때론 길을 잃겠지" "막다른 길을 만나도 돌아가면 되는 거야 부끄러워하지 말고 씩씩하게 걸어가렴" 등의 예쁜 희망을 노랫말에 담았다.

<꼬마 운동화> 노랫말처럼 우리 아이들이 새롭게 변신할 어떤 운동화를 신더라도 안전한 곳만 뛰어다니며 멋진 희망을 찾아가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태그:#운동화, #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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