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

가족보다 이 말이 더 어울리는 단어가 있을까? 일찍이 레프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리나>의 첫 문장에서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제각기 다르다'고 했다. 그 가정, 가족의 불행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아마도 그건 각 사회가 가족 혹은 가족 구성원에게 성문법이 아니지만 이와 다름없이 강제하는 역할에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20세기를 지나 21세기에도 여전히 우리 사회 가족에게 요구되는 역할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가장'으로서의 아버지, '현모양처' 어머니, 그리고 그에 부응해 '공부 잘 해서 입신양명에 애쓰고 말 잘 듣는' 자식들일 것이다. 15일 방영된 KBS 2TV <드라마 스페셜> '나쁜 가족들'(아래 <나쁜 가족들>)은 제목 그대로, 그 역할에 있어 가장 '나쁜' 집합체가 등장한다.

이 작품은 <드라마 스페셜> 중 명작으로 손꼽히는 <빨간 선생님> <개인주의자 지영씨>를 쓴 권혜지 작가의 신작이다. 1985년을 배경으로 선생님과 제자의 갈등을 시대적 유감으로 풀어낸 <빨간 선생님>이나 오피스텔의 개인주의를 현대 사회에서 고립된 개인으로 풀어낸 <개인주의자 지영씨>에 이어 권혜지 작가는 이번에도 만만치 않은 사연을 그저 무겁지만은 않게 그려냈다.

이보다 더 나쁠 수 없는 가족

 KBS 2TV <드라마 스페셜-나쁜 가족들>에는 제목 그대로 가장 '나쁜' 형태의 가족이 등장한다.

KBS 2TV <드라마 스페셜> '나쁜 가족들'에는 제목 그대로 가장 '나쁜' 형태의 가족이 등장한다. ⓒ KBS


드라마는 6년 전 갓 청소년이 된 나나(홍서영 분)네 가족에게 생긴 일부터 시작된다. 아빠 김정국(이준혁 분)과 엄마 박명화(신은경 분), 그리고 나나는 군대를 다 마치지 못하고 의가사 제대한 오빠 민국(송지호 분)을 데리러 간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엄마와 아빠의 '부부 정체성'에 대한 질문에 김정국과 박명화는 미로에 빠지고 만다. 머리에 붕대를 감고 나온 오빠, 그 오빠를 물고 빠는 할머니, 그런 할머니를 질색하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오빠 그리고 실랑이를 벌이는 가족들.

6년 뒤 다시 가족은 나나의 자퇴 문제로 한자리에 모인다. 이들이 모인 곳은 뜻밖에도 경찰서다. 도망치는 나나의 머리끄덩이를 잡다 청소년 학대 혐의로 온 가족이 호출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이 가족 가관이다. 담임 선생님이 나나의 자퇴를 의논하고자 전화를 건 순간 아버지 김정국은 노조 투쟁을 하느라 "딸이라도 자기 일은 자신이 알아서 결정하라"며 전화를 끊는다. 딸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남자친구에게 돈을 주면서까지 이별을 회유하던 엄마는 의외로 바람 한번 피워보는 게 소원인 막장 엄마다. 심지어 경찰서에 찾아온 나나의 담임이 바로 전날 엄마와 은밀한 문자를 주고받았던 그 문제적 남자(?)다. 오빠는 다를까? 할머니만 오면 줄행랑을 치는 오빠는 의가사 제대 후 무위도식(無爲徒食)의 경지에 빠져있다.

말 안 듣는 제자와 선생님의 갈등을 시대의 풍경으로 풀어낸 <빨간 선생님>처럼 <나쁜 가족들>은 해체 일보 직전의 가족들을 내세우며 21세기 가족의 현실을 짚는다. 가장이어야 할 아버지 김정국은 홀어머니의 지극한 편애에 대한 반발로 가장의 역할을 내팽개친 채 노조활동에만 몰두한다. 학창시절 사고를 쳐 엄마가 된 박명화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는 연애라 말하지만 사실 다른 남자와 한번 자보는 게 소원이고 가족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부산 발령을 자청할 정도다. 이 부부를 보면 이들을 마주한 경찰이나 선생님의 표정에도 드러나듯 '부모가 이 모양인데 아이들은 오죽할까?'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사고 때문에 인지도 하기 전에 부모가 된 김정국과 박명화가 맞닥뜨린 부모, 가족의 현실은 만만치 않다. 할머니의 과잉 보살핌 때문에 품 안의 자식으로 자라난 아들은 서울대 법대를 갔지만 군대 폭력으로 의가사 제대를 하고 현실 부적응자가 됐다. 부모에게 "왜 결혼했냐"는 도발적 질문을 던졌던 나나는 "내 인생은 내 것"이라며 자퇴와 가출을 통해 가족으로부터 탈출을 꿈꾼다.

나나는 부모 같지 않은 김정국, 박명화에게 "차라리 이혼하는 게 낫다"고 도발적인 조언을 했지만 그래도 딸의 자퇴만은 막아보겠다며 김정국, 박명화는 가족으로 거듭나는 선택을 한다. 가장의 책임을 회피했던 김정국은 아들의 취업과 노조 위원장 자리를 바꿨고 부산으로 탈출을 꿈꾸던 엄마는 어떻게든 나나를 졸업시키기 위해 눈물의 휴직을 감내한다. 이른바 우리 사회가 규정한 아빠와 엄마의 역할을 다하는 대신 자신을 희생한 것이다. 그러나 부부의 헌신(?)은 물거품이 됐고 다시 가족은 경찰서에 나란히 앉는 신세가 된다.

21세기 가족을 묻다

 드라마 속 '나쁜' 가족들은 역설적으로 오늘날 가족으로 살아가는 방식을 묻는다

드라마 속 '나쁜' 가족들은 역설적으로 오늘날 가족으로 살아가는 방식을 묻는다. ⓒ KBS


부부의 가족되기 실패 해프닝은 역설적으로 오늘날 가족으로 살아가는 방식을 묻는다. 이들은 시어머니의 그 길고 긴 레퍼토리, "내 인생 희생해서 너희들을 키웠다"는 역사의 방식을 답습했지만 실패했다. 드라마는 이들의 실패담을 통해 자기희생 위에 견고한 성채를 쌓아온 우리 사회 가족 제도를 근본부터 회의한다.

이 드라마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장면, 전혀 가족 같지 않은 이들이 한 차에 어쩔 수 없이 끼어 앉은 장면이야말로 피하고 도망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우리 사회 가족의 처지를 적나라하게 상징한다. 음주운전을 피하고자 자리를 바꿔보려 하지만 결국 실패하는 장면은 불가피하게 서로에게 책임이 부과되는 가족의 현장이다. 거기서 도망친 박명화는 다음날 나나의 담임 선생님과 하룻밤을 보내고 호텔에서 나오다가 시어머니 칠순 잔치에 온 가족들과 마주친다. 이 장면은 드라마의 갈등을 불꽃놀이처럼 점화한다.

결국 알량한 부모의 위신이나 희생을 향한 억지 노력마저도 수포가 된 후, 비로소 부모들은 솔직해진다. 자신들 역시 아직은 어른답지 않음을, 부모로 시간을 보냈지만 여전히 부모로서 자신 없음을, 부모라는 정해진 틀에 가두기엔 자신의 삶에 대한 욕구가 너무도 뜨거움을, 그리고 이 사회가 제시한 부모라는 제복에 맞추기엔 개인의 삶이 너무도 자유분방하게 커버렸음을.

그러나 <나쁜 가족들>은 비관주의에 허우적거리지 않는다. 군대 내 폭력, 노조 투쟁, 그리고 섹스리스 부부, 히키코모리, 가출 청소년 등 심각한 우리 사회 문제들이 가족들을 통해 나열되지만 오히려 드라마의 결론은 불꽃축제의 결말처럼 훈훈하다. 들여다보면 비극이지만 어쩌면 가족이란 테두리 안에서 해결을 모색해보면 안 될 것도 없다며 드라마는 사회가 끼워 준 색안경을 벗어버린다. 애써 제도에 끼워 맞추기보다 각자 자신의 현실을 솔직하게 토로하고 인정하는 것으로 가족은 새롭게 시작된다. 자식을 위한 억지 부장 역할 대신 원하던 노조로 돌아간 아빠, '잘 나가는 서울대생 아들' '군대 폭력의 트라우마'를 떨쳐내고 이제 숟가락 얹는 생활을 마무리할 준비를 하는 오빠, 원하던 자유를 찾아 떠나는 엄마, 그리고 자퇴를 하고 방황하기 위해 가방을 짊어진 딸까지. 사회가 원하는 가족의 역할은 아니지만 각자의 삶을 사는 것으로 이 가족은 기사회생한다. 21세기 가족의 생존기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합니다.
드라마 스페셜 -나쁜 가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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