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네가 아픈 건 네 탓이 아니란다, 사회가 너를 아프게 만든 거야."

어떤 책에서 읽은 구절이다. 몇 년 전으로 기억하는데, 이 문장에 공감되어 이때부터 건강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 같다. 내 어린 시절은 항상 골골거릴 만큼 자주 아팠다. 감기는 기본이고 크게는 '콜레라'도 앓은 경험이 있을 만큼 병원이 내겐 친숙하게 느껴졌다. 당시에 왜 자주 아팠는지 속상하기도 했지만, 어린 나이에 그 원인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단순히 원래 약한가보다 생각할 뿐이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에서야 생각해보건대, 신체의 증상을 비롯해 사회 현상을 설명할 때도 '원래'라는 게 있을까 싶다. 뭐든지 원인이 되는 인자가 있기 때문에 증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 인자를 일으키는 직접적인 개체가 있다 하더라도, 그 개체를 존재하게 하는 원인의 원인은 또 따로 있을 수 있다. 그래선지 요즘은 누가 아프다고 말할 때 진짜 원인이 무엇인지 한 번쯤 고민하게 된다.

평등한 사회에서는 가난해도 병들지 않는다

마이클 마멋의 '건강격차' 가 한글판으로 출간되었다
▲ 건강격차 마이클 마멋의 '건강격차' 가 한글판으로 출간되었다
ⓒ 동녘

관련사진보기

지난달 일본 민의련(민주의료기관 연합회) 사무국에 방문했을 때, 사무국장님으로부터 책 선물을 받았다. 일본어로 된 책이었는데, 한문으로 정확하게 <건강 격차>라고 쓰여 있었다.

건강 불평등의 대가 마이클 마멋이라는 의사가 집필한 책이라는 소개와 함께, 민의련 의사들이 주축이 되어 일본어판으로 발행했다고 한다. 책을 받아봤지만, 일본어를 모르는 관계로 답답한 마음에 속만 끓이게 됐다.

마침 옆에 있던 지인으로부터 한국어판이 최근 발간됐으니 찾아보라는 언질을 받았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구입해 읽기 시작했다. 과연 저자가 얘기하는 건강 격차는 어떤 것이었을까. 책을 읽으면서 점점 빠져들게 되는 묘한 기분. 굉장히 오랜만에 느껴본다.

저자인 마이클 마멋은 사람들이 건강해지는데 도움이 되고 싶어서 의사가 됐다고 한다. 세계보건기구의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 위원회' 위원장, 영국의사협회장, 세계의사협회장을 지냈고,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건강 불평등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다.

저자는 들어가는 말에서 "죽음은 신체적인 문제지만 정신질환을 가진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기대수명이 10~20년 정도 짧다"며, "정신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정신과 신체 모두에서 질병과 사망 위험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하였다.

또한 "정신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그 사람이 나고 자라고 살아가고 일하고 나이 들어가는 환경과 여건에 영향을 받으며, 이 환경과 여건은 다시 그 사회에 존재하는 권력, 돈, 자원의 불평등한 분포에 영향을 받는다"고 단언했다. 의사는 단순히 병을 고치는 것뿐만 아니라, 병을 일으키는 원인까지 치료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덧붙였다.

저자는 사람들이 건강하지 않는 원인에 대해 이 책 전반에 걸쳐 어려 주장을 펼쳤다. 결국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건 '건강 평등'인데, 책의 곳곳엔 극우주의자들로부터 공격받을 수 있는 의료 사회주의적 내용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저자는 여러 데이터를 제시하며 단순히 정치에서 말하는 좌우 문제가 아님을 밝히며 논증한다. 그래선지 책에 그래프와 도표가 다수 포함되어 독자가 이해하기 쉽도록 도왔다.

같은 도시 내에서도 건강 격차가 있다

첫 장에선 두 도시 이야기를 언급한다.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 위치한 칼튼과 렌지라는 동네를 언급하며 두 도시간의 건강 격차를 서술한다. '칼튼'의 기대수명은 1998년 기준 54세 였고, '렌지'의 기대수명은 82세 였다. 기대수명이 28년 차이가 난다.

이렇게 차이 나는 원인은 살아가는 환경이 달라서였다. 칼튼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동네를 이렇게 얘기한다. "걸어 다닐 만한 데가 없어요. 정말 안 좋아요", "손녀를 밖에 나가게 할 수 없어요", "길가는 온통 매춘 여성들이에요". 저자는 칼튼 거주자 한 명을 예로 들었다. 그의 이름은 '지미'였다.

"칼튼의 불안정한 가정에서 태어난 지미는 학교에서는 문제아였고 10대 시절에는 청소년 비행으로 경찰서를 들락거렸다. 그는 제대로 된 일자리를 가져본 적이 없고 이런저런 노동을 했다. 돈이 생기면 술과 마약에 다 썼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청년들의 기대수명이 짧은 건 당연해 보인다. 저자는 이런 현상이 미국이었으면 두 동네의 격차가 '인종' 때문으로 봤을지 모른다고 언급했지만 앞에서 살펴봤듯이 스코틀랜드 글래스고는 '인종' 문제로 들여다 볼 사안은 아니었다. 결국은 '인종'이나 사회계급처럼 단순화된 범주를 넘어서야 이 현상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것이다.

의료시스템이 지역 곳곳에 위치하고 있다면 질병이 발생했을 때 진료받기가 훨씬 수월할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의료시스템과 건강 불평등은 개념부터 다르다고 봤다. 그는 "건강 불평등은 사람들을 병에 걸리게 만드는 여건에서 나온다"면서 "아스피린 결핍이 두통의 원인이 아니듯 의료접근성 부족은 질병의 원인이 아니다"고 단언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건강에 투자한다'라는 말은 대개 병원을 설립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지 않나. 저자는 미국과 영국을 비교했다. 특히 미국은 의료비 지출이 가장 많은 나라이면서도 6명 중 1명꼴로 의료보험이 없어 의료기관에 접근하지 못하는 국가이다.

"미국은 GDP의 17%를 의료비로 지출한다. 영국의 1인당 의료비 지출은 미국의 40%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렇게 돈을 들여서 미국인의 건강이 좋은가? 별로 그렇지 않다. 55~64세의 백인 미국인과 백인 영국인의 건강을 조사한 결과, 첫째, 의료보험이 있는 미국인들 가운데서도 건강 상태는 사회계층적(소득 수준과 교육 수준 기준) 경사면을 따라 분포하고 있다. 둘째, 표본에 포함된 미국인 중 92%가 의료보험이 있었지만 영국인보다 건강이 나빴다. 부유한 미국인은 부유한 영국인보다, 가난한 미국인은 가난한 영국인보다 건강이 나빴으며, 몇몇 경우에서는 부유한 미국인이 가난한 영국인보다 건강이 나빴다."

저자는 미국이 부유하고 의료비 지출이 많다면, 그리스보다 모성사망률도 낮아야 마땅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모성사망률은 그리스가 더 낮다. 미국의 모성사망률이 높다면 어떤 여성들이 사망하는지 봐야 하는데, 대개 가난하고 흑인이고 교육수준이 낮고 이민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저자는 말한다. 결국 의료시스템이 잘 갖춰진 나라에서도 가난하면 병에 잘 걸리고, 모성사망률도 훨씬 높아질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교육수준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

저자는 교육 수준이 건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봤다. 유럽의 국가 간, 국가 내 격차를 보여주면서 "에스토니아의 25세 남성이 앞으로 기대할 수 있는 기대수명이 평균 45년으로, 스웨덴보다 10년이 짧다"고 밝혔다. 

에스토니아 국내 격차에서도 "교육수준이 낮은 25세 남성은 교육 수준이 가장 높은 25세 남성 보다 17년이 짧다"는 연구결과를 나타냈다. 에스토니아는 이렇게 교육 수준에 따라 기대수명의 큰 격차를 보이지만, 스웨덴은 교육 수준에 따른 격차가 4년 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렇다면 학생들의 학업 성취도가 좋은 국가로 관심이 모아질 수밖에 없다. 유럽 내에서 학업성취도가 좋은 나라를 꼽으라면 단연 핀란드를 우선순위에 둔다. 국제학업성취도 평가에서도 15세 학업 성취도가 다른 유럽 국가보다 월등히 높게 나와 핀란드의 성취도 비결을 알고 싶어하는 교육학자들이 많다. 우리나라에서도 핀란드 교육에 대해 열풍이 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핀란드는 공통된 교육과정은 있지만 무엇을 가르칠지에 대해서는 교사가 상당한 자율성을 갖는다. 학교는 중앙정부가 아니라 지역 당국의 통제를 받는다. 학업 성취도는 학년마다 평가하지는 않고 종합학교 9년의 기본 교육을 마치고 나면 전국 시험을 한 번 치른다. 이 결과는 학교들이 통계적 목적으로만 사용할 뿐 학교 순위를 공개하거나 개별 학생에게 점수를 통보하지는 않는다. 교사는 매우 존경받고 선망받는 직업이다. 교사 훈련은 연구 기반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교사들은 학습에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을 어떻게 도울지 연구하고 탐구하도록 독려 받는다."

학생들을 순위로 줄세우며, 주입식으로 교육하는 우리나라의 교육 시스템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나라도 교육 수준이 높아지고는 있지만, 핀란드처럼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건강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교육의 혁신이 꼭 이뤄져야 하겠다.

삶을 위한 노동

저자는 열악한 노동 여건은 건강 불평등의 주요인이라고 밝힌다. 특히 서론에서 밝힌 '권력, 돈, 자원의 불평등이 피할 수 있는 건강 격차의 근본 원인이다' 문장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이 장에선 1시간에 110개의 물건을 나르며 고된 교대 근무를 하고, 일과 삶의 균형을 잡지 못하는 주인공 '앨런'을 등장시킨다. 저자는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던진다. 이렇게 힘든 노동을 하긴 하지만, 안 하는 것 보다 낫지 않겠냐는 것이다.

"실업은 건강에 해롭지 않나? 맞다. 하지만 우리는 단순하게 취업과 실업만 비교해서는 안 된다. 노동의 질은 정말로 중요하다. 그리고 직업의 질을 논할 때는 노동 여건뿐 고용 여건도 생각해야 한다. 고용 여건은 고용 계약이 존재하는지, 고용 계약의 속성이 어떠한지 등을 의미한다. 노동 여건과 고용 여건 모두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

저자는 여기서 노동과 건강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 더 언급한다. 직업보건의 아버지, 베나르디노 라마치니에 대한 이야기다.

"노동과 건강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많은 부분 '베나르디노 라마치니'에게 빚지고 있다. 이탈리아 학자들을 만나면 나는 늘 라마치니 이야기를 꺼낸다. 이탈리아 북부 카프리 출생으로, 모데나 대학교에서 의학교수가 됐고 1700년에 위대한 저서 <노동자들의 질병>을 펴냈다. 라마치니는 당대의 의사들에게 무엇이 노동자들을 병들게 하는지 알고 싶다면 코를 막지 말고 그들의 일터로 가 보라고 했다. 당시에 의사들은 노동 현장에서 병을 얻어 고생하는 사람들과 다른 계급에 속해 있었다. 라마치니는 계급 경계를 건너서 내려가면 무언가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서 다른 의사들의 조롱을 샀다. 그는 때때로 더 열악한 종류의 일터에 가서 기계적인 일들의 모호한 작용을 연구하는 것이 그의 격보다 낮은 일이라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노동과 건강에 대해 파악하려면 낮은 계급 사람들을 실제로 만나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저자는 노동과 건강이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믿는다. 열악한 노동여건에서 일하는 한국의 비정규직 직원들이 더 많은 산재 사고를 당한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그렇기에 그들의 건강상태는 항상 관찰돼야 하며, 더 많은 건강 위험에 노출되지 않도록 신경 써야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 없는 삶은 있을 수 없다.

건강격차는 필연적이지 않다

개개인마다 건강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격차가 크다는 것은 필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의 문제라기보다 앞선 글에서 살펴봤듯이 사회적 환경에 따른 문제는 없는 것인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작업치료사로 일하는 나는 그래서인지 요즘 들어 환자분들에게 자주 질의하게 된다. "평소 음주와 흡연을 많이 하지 않으셨나요?" "음주와 흡연을 자주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몇몇 환자분께 이런 질문을 드리면 대부분은 이렇게 대답한다. "사는 게 힘들어서요" "스트레스는 풀어야지요"

현대인들이 왜 사는 게 힘든지, 왜 스트레스를 받는지 그 이유를 밝히고 현상을 연구하는 것 또한 건강 정책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몫이다. 단지 불평등을 경제학자만의 전유물로 생각해선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 격차를 줄이기 위해 경제학자를 비롯한 타 분야의 전문가들과 협업하고 토론하고 결론을 도출해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건강 격차 - 평등한 사회에서는 가난해도 병들지 않는다

마이클 마멋 지음, 김승진 옮김, 동녘(2017)


태그:##건강격차, ##마이클 마멋, ##건강불평등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