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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재(가명)는 매사 무기력하다. 등교 후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책상에 엎드려 자기 일쑤고, 아침 조회 종이 울리면 그제야 기지개를 켜며 부스스한 얼굴로 일어난다. 담임으로 1년 가까이 지켜본 그의 아침은 흡사 기면증이 의심될 정도로 늘 잠에 취해 있는 모습이다. 동료교사들도 혀를 내두르며 수업시간 그를 깨울 엄두를 내지 않는다.

그를 잘 몰랐던 학년 초엔 볼 때마다 흔들어 깨웠다. 일장 훈계를 늘어놓으며 을러대기도 하고, 교실 뒤에 세워 벌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태도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벌 받는 게 익숙해져선지 마치 서서라도 잠잘 기세였다. 친구들은 그가 학교에서 눈을 뜨고 있는 시간보다 감고 있는 시간이 더 길 거라고 키득거리곤 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이 초롱초롱 빛나는 낯선 순간이 있다. 바로 한국사 수업시간 때다. 비록 일주일에 딱 한 시간뿐이지만, 그때만큼은 언제 그랬냐는 듯 수업태도가 자못 진지하고 적극적이다. 마치 군계일학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2시간 연강으로 진행돼 자칫 지루하게 여겨질 법도 하건만, 그의 '모범생다운' 모습은 놀랍기만 하다.

"역사책 말고는 어디에도 관심이 없어요"

 한국사가 아니면 영재는 무기력해진다.
 한국사가 아니면 영재는 무기력해진다.
ⓒ pe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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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의 말에 따르면, 다른 과목 수업시간에는 어김없이 엎드려 잠을 잔다고 한다. 몇몇 대놓고 엎드리지 못하게 하는 선생님의 수업 때는 칠판 한 구석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멍 때리며 시간을 때운다고 한다. 이따금 혼쭐나기도 하지만, 2학기 들어서는 선생님들도 다들 그러려니 하며 못 본 척 눈 감아 준단다.

하루는 진도를 나가다 말고 그의 '한국사 사랑'을 수업의 소재로 삼은 적도 있다. 극과 극을 달리는 그의 수업태도를 아이들도 이해할 수 없다는 눈치였다. 솔직히 처음엔 담임 과목이기 때문에 밉보일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노력하는 줄로만 알았다. 시쳇말로 '찍히면 한 해가 괴로울 테니까' 그런 것이라 지레 짐작했던 거다.

그러나 그에겐 담임이 몰랐던 '오래된 습관'이 하나 있었다. 어릴 적부터 역사와 관련된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는 점이다. 텅 비어있는 듯 새털 같이 가벼운 그의 책가방에는 참고서나 문제집 대신 역사교양서가 항상 들어있다. 그의 무기력한 하루 일과 중에 어떻든 눈을 뜨고 있었던 순간에는 역사와 관련된 책을 읽고 있었던 셈이다.

"역사책 말고는 다른 책을 읽기는커녕 들고 다니는 것조차 본 적이 없어요."

그를 곁에서 지켜본 친구들이 이구동성 조롱하듯 건넨 말이다. 종일 엎드려 자는 그에게 역사책만 한 각성제는 없다고 말하는 아이도 있었다. 굳이 잠을 깨우기 위해 벌을 세울 필요가 없다는 거다. 그에겐 알아듣지도 못하는 수업을 다짜고짜 강제할 게 아니라 차라리 재미있는 역사책 한 권 손에 쥐어주는 게 훨씬 더 효과적일 수 있다고 귀띔하는 아이도 있었다.

영재의 존재는 '한국사 수업' 시간에만 드러난다

과연 그의 한국사 성적은 탁월했다. 지난 6월과 9월에 치러진 전국연합모의고사에서 한국사 영역은 두 번 다 만점에 가까웠다. 한국사 영역은 대체로 평이하게 출제되는 데다 절대평가 체제여서, 수학이나 탐구 과목 같은 영역과 단순 비교할 수는 없는 노릇이긴 하다. 실제로 특목고나 자사고의 경우엔 한국사 1등급이 수두룩한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한국사 1등급은 남다른 '의미'가 있다. 조금은 '웃픈' 이야기지만, 그에겐 영어와 수학 영역의 점수를 모두 합해도 한국사 한 과목의 점수에 턱없이 모자란다. 거기에다 탐구 영역 한 과목을 더해야 간신히 한국사 점수를 넘어설 수 있을 정도다. 영어와 수학 영역은 100점 만점이지만, 한국사는 만점이 50점인데도 그렇다.

스스로도 "영어와 수학은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며, 차라리 아무런 간섭이 없는 시험 때가 수업시간보다 편하다고 너스레를 떤다. 그래도 '동병상련'이라 그다지 외롭진 않단다. 매일 한두 시간씩 배정된 영어와 수학 수업시간이 비록 자신에게 '허송세월'이지만,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와 오십보백보인 '영포자'와 '수포자'들이 부지기수라는 이유에서다. 

'한국사 1등급'은 친구들이 그에게 지어준 별명이기도 하다. 우리 반만 해도 1등급 아이들은 여럿이지만, 유독 그에게만 1등급이라며 치켜세워준 까닭이 있다. 대개 영어·수학과 같은 주요 과목을 잘하는 아이가 다른 과목의 점수도 높기 마련이다. 언제부턴가 공부 잘하는 아이가 운동도 잘하고, 노래 잘 부르는 아이가 그림도 잘 그린다.

그런데, 그는 역사만 빼고는 잘하는 게 하나도 없다. 다른 과목의 성적은 차마 들여다보기조차 민망한 정도고, 여느 아이들처럼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것조차 좋아하지 않는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중학교 시절 맛 들인 한 인터넷 게임에서 나름의 기량을 뽐내고 있다고는 하나, 적어도 학교생활에 있어서는 한국사 수업이 그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대학 진학'은 딴 나라 이야기인 학생들

 지난 8월 31일 교육부가 수능개편을 1년 유예한다고 발표하자 입시학원가에서는 '고등학교 1학년 반색, 중학교 3학년 안도, 중학교 2학년 경악'이라고 표현했다.

중2 학생은 외국어고와 자사고 전형을 일반고와 동시에 시행하고, 2015 개정교육과정으로 공부한 중3 학생은 2009 개정교육과정을 토대로 한 수능을 보게 됐다.

사진은 이날 서울의 한 중학교 모습.
 한 학교의 모습.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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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은 그의 한국사 실력이 아깝다고 입을 모았다. 단지 한국사 영역의 성적만 가지고 지원할 수 있는 대학은 없다는 걸 에둘러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도 그걸 모르진 않는지, 명색이 인문계 고등학교인데도 상담 중에 그의 입에서 대학 진학에 관한 이야기는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언뜻 일찌감치 대학 진학의 꿈을 접었나 싶을 정도다.

현재 전국에 4년제 대학 수만도 200개가 넘고, 입시전형 또한 제대로 파악하기조차 힘들 만큼 다양하지만, '역사 오타쿠'인 그를 기꺼이 품고 꿈을 키워줄 대학은 사실상 없다. 수년 간 진학업무를 담당해온 한 동료교사는 영어나 수학이 1등급이라며 모를까, 한국사 성적만 가지고는 서울은커녕 지방의 어느 대학 한 군데 기웃거릴 수조차 없다고 잘라 말했다.

주지하다시피 학령인구의 급속한 감소로 인해 최근 고등학교 졸업생 수보다 대학의 입학 정원이 많아졌다고 한다. 하지만 그에겐 남의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시쳇말로 '성적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지방의 외진 소규모 대학이야 어찌어찌 해서 갈 순 있겠지만 사학과가 없고, 역사와 관련된 학과가 개설된 대학엔 그의 성적으로는 언감생심일 뿐이다.

돌이켜 보면 담임으로서 만난 이런 '오타쿠'들이 적지 않았다. 10여 년 전 내게 엑셀 프로그램을 가르쳐주고 수업자료로 쓸 동영상을 능숙하게 편집해 준, 별명이 '컴퓨터 도사'였던 아이가 있었다. 그런가 하면, 세계의 여러 나라와 수도 이름과 산의 높이, 면적과 인구, 심지어 1인당 GDP까지 줄줄 외는 '움직이는 지리부도'도 있었다.

요즘에도 드물지 않다. 우리 반만 해도, 축구를 좋아해 전 세계 축구팀과 선수의 이력을 줄줄 꿰고 있는 아이도 있고, 교과서든, 공책이든 여백만 있으면 만화 캐릭터를 멋들어지게 그리는 친구도 있다. 또, 취미로 시작한 작곡에 눈을 떠 축제 때마다 무대에 올라 발군의 기량을 뽐내는 아이도 있다. 영재의 재능이 그다지 특이하게 여겨지지 않을 정도다.

문제는 이런 아이들에게 대학의 문은 한없이 좁다는 데에 있다. 그런 다양한 재능들은 나중 개개인의 삶에 활력소가 될지언정 이른바 대학수학능력을 측정하는 데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당장 대학입시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되레 부모님이나 선생님들로부터 "그런 것 할 시간에 공부나 하라"거나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뻘짓한다"며 핀잔을 듣지 않으면 다행이다.

국·영·수 못하면 발군의 실력 있어도 모든 게 허사

요즘 대세라는 학교생활기록부 종합전형을 두고 처음엔 이런 아이들을 위해 만든 입시제도라고 생각했다. 물론, 착각이었다. 주지하다시피, 국·영·수를 비롯한 교과 성적은 기본이고, 거기에 남다른 스펙을 갖춰야만 도전이라도 해볼 수 있다. 더욱이 서울 소재 상위권 대학에서는 수능 최저 등급까지 걸어놨으니, 그야말로 팔방미인을 요구하는 '슈퍼맨 전형'이다.

요컨대, 대학수학능력을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잣대인 국·영·수를 못하면 재능이 무엇이든 빛을 볼 수 없다. 거칠게 말해서, 대학입시를 앞둔 아이들에게는 시험공부만이 유일한 재능이다. 나머지는 그저 '대학에 간 뒤에 해도 늦지 않은' 취미나 잡기일 뿐이다. 어떻든 대학을 졸업해야 사람대접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한국사 1등급'으로 영재는 근근이 힘든 학교생활을 견뎌내고 있지만, 켜켜이 쌓여만 가는 무력감이 시나브로 그의 하나뿐인 재능을 잃게 만들지나 않을지 안타까운 마음이다. 한국사 수업시간 초롱초롱한 그의 눈빛이 바람 앞의 등불인 양 위태롭기만 하다. 학벌구조에 포획된 한국 사회에서 단지 '한국사 1등급'만으로 지금껏 학습된 무력감을 극복해내기란 힘들 것 같다.

영재와 같은 아이들도 자신의 재능을 인정받으며 건강한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을 때라야 학교도 사회도 의미가 있는 것 아닐까.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이런 이야기가 허황된 망상으로 치부되는 현실이 아이들을 끝 모를 무력감에 몰아넣고 있는 건 아닌지 곱씹어보게 된다. 대학입시를 1년 남짓 앞둔 지금, 담임으로서 격려 말고는 영재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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