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방송된 JTBC 탐사 보도 프로그램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 - 폭로! 기무사 민간인 사찰과 조작의 실체>(아래 <스포트라이트>) 편은 기무사 판 <자백>이었다. 최승호 PD의 <자백>이 국가정보원(국정원)의 간첩 조작을 고발했다면 <스포트라이트>는 기무사가 어떻게, 그리고 왜 민간인을 사찰하고 간첩으로 모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스포트라이트>가 고발한 기무사의 사찰 행각은 실로 경악스럽다. 방송을 보면서 기무사 요원들이 나도 염탐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기무사의 민간인 사찰 의혹이 제기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지난 2011년 MBC 시사 고발 프로그램 <시사매거진2580>은 기무사 요원이 민중가요 노래패 단원과 조선대 기광서 교수를 사찰한 정황을 보도한 바 있다. 그러나 당시 보도는 정황만 제시하는 데 그쳤다.

<스포트라이트>는 차원이 달랐다. 스포트라이트 취재진은 기무사에서 26년간 수사관으로 재직했던 이아무개씨의 증언과 수사 일지를 토대로 기무사의 사찰 행각을 낱낱이 드러냈다. 베테랑 수사관의 증언은 그간 심증으로만 존재했던 기무사 사찰 행각이 실제로, 그리고 아주 정교한 방식으로 이뤄졌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윤석양씨가 세상에 알린 '청명' 계획

<스포트라이트>는 여기에 지난 1990년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을 폭로했던 윤석양씨를 인터뷰했다. 윤씨가 언론에 모습을 드러낸 건 23년 만의 일이었다. 그런데 진행자인 이규연 탐사기획국장은 윤씨가 인터뷰 조건을 제시했다고 전했다. 그 요구조건이란 '자신을 양심고백자로 그리지 말아달라'는 것이었다.

윤씨는 이 국장과 인터뷰에서 입대 전 학생운동 전력 때문에 서빙고 대공분실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고 털어놨다. 윤씨는 그곳에서 조사관들의 압박에 못 이겨 함께 운동했던 동료들의 이름을 댔다.

윤씨는 이 일이 못내 마음에 걸렸나 보다. 윤씨가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 기록을 빼내 세상에 알린 동기가 바로 이런 마음의 짐 때문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윤씨의 폭로는 큰 파장을 몰고 왔고, 그래서 지금까지 회자된다. 2011년엔 그의 폭로를 소재로 한 영화 <모비딕>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그의 폭로의 의미는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스포트라이트>의 진가는 바로 이 지점에서 드러난다.

보안사는 정치인, 종교인, 학자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민간인을 사찰했다. 박원순 현 서울시장,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정진석 추기경, 문재인 대통령 등 익숙한 이름이 눈에 띈다. 노태우와 손잡고 민주자유당(민자당)을 탄생시킨 고 김영삼 전 대통령, 김종필 전 총리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데 민간인에 대한 사찰은 큰 기획 하에서 이뤄졌다. 바로 '청명'이란 이름의 프로젝트였다.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에서 몸담은 바 있는 염규홍씨는 '스포트라이트'에 출연해 이 프로젝트를 이렇게 요약했다.

 염규홍 전 과거사진상규명위원은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에 출연해 청명계획의 실체를 설명했다.

염규홍 전 과거사진상규명위원은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에 출연해 청명계획의 실체를 설명했다. ⓒ JTBC


 염규홍 전 과거사진상규명위원은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에 출연해 청명계획의 실체를 설명했다.

염규홍 전 과거사진상규명위원은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에 출연해 청명계획의 실체를 설명했다. ⓒ JTBC


"정부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한 사찰을 강화해서 이들을 '유사시에 영장 없이 체포하겠다'는 것이죠."

저간의 상황을 종합해 보면 윤씨의 폭로가 갖는 의미가 보다 명확해진다. 보안사는 작전명 '청명'이라는 기획 하에 정부 비판자들을 일소하려 했다. 이를 위한 세부지침으로 A, B, C 등급으로 민간인을 분류한 다음 동선을 파악해 유사시 구금하려 했다. 이 가공할 실체는 윤씨의 폭로로 만천하에 알려졌다.

윤씨의 폭로가 갖는 의미는 미 국가안보국(NSA)이 민간인들을 전방위적으로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한 에드워드 스노든에 견주어도 모자람이 없다. 말하자면 윤씨는 그 시절의 스노든이었던 셈이다

윤씨는 스포트라이트 제작진에게 '자신을 영웅으로 그리지는 말아달라'고 주문했다. 그러나 세상에 의미 있는 변화를 가져온 영웅임에 틀림없다. 그의 폭로로 청명 계획은 없어졌기 때문이다. 보안사도 기무사령부로 이름을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기무사 개혁, 외면할 수 없는 시대적 과제

고 김대중 대통령 집권 이후 기무사의 못된 버릇을 고치려는 시도는 정권마다 있었다. 그러나 이명박 전 정권에 이르러 기무사는 온라인 공간으로 활동 범위를 넓히며 괴물로 변해갔다. 입대 예정자의 SNS 계정을 들여다보며 사찰대상을 물색하는가 하면, 온라인상 여론 조작행위도 서슴지 않고 자행했다.

김기현 전 사이버사령부 530단 부이사관은 지난달 29일 JTBC 뉴스룸에 출연해 이같이 말했다.

"대통령 비난 내용, 나아가 국방이나 국가정책, 제주 해군기지 같은. 예를 들어 제주 해군기지 건설이라면 최초 여론 나왔을 때 반대가 90, 찬성 10이면 밤새 작전 요원들이 반대를 다운시킨다. 반대를 20, 찬성을 80으로." 

기무사가 과거의 흑역사를 버리지 못하고 민간인 사찰을 일삼고, 여론조작까지 가담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한 번도 '법'의 지배를 받아본 적이 없어서다. 군 개혁에 앞장섰던 고 김대중 정부에서조차 기무사는 애꿎은 민간인을 간첩으로 몰았다. 2002년 간첩혐의로 체포된 안덕영씨가 대표적인 피해자다. 안씨를 변호했던 김칠준 변호사는 스포트라이트 취재진에게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남겼다.

"불법을 저지른 조직은 끝까지 불법을 저지른다."

그렇다면 왜 기무사는 아무런 법의 통제를 받지 않고 존재해 왔을까? 바로 '국가안보' 때문이다. 그간 국정원, 기무사 등 정보기관은 국가안보라는 명분 뒤에 숨어 온갖 불법, 탈법 행위를 일삼았다. 노태우 정권과 이명박 정권은 이들을 앞세워 진보진영 와해를 기도했다. 이들의 무소불위 행태를 더 방치할 수 없다.

만약 법으로 이들의 행동 범위를 통제하는 데 실패한다면, 국정원·기무사는 어느 시점에 이르면 또다시 흉측한 몰골을 드러낼 가능성이 높다. 적폐청산이란 시대적 과제를 안고 있는 문재인 정부로선 기무사 개혁은 또 하나의 숙제인 셈이다.

끝으로 우리 사회가 윤씨의 폭로를 재조명했으면 좋겠다. 물론 윤씨는 자신이 영웅시되는 걸 꺼리지만 말이다. 앞서도 적었지만 사회적으로나 시대사적으로나 윤씨의 폭로가 가져온 파장은 작지 않다. 23년 만에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가 윤씨를 공론의 장으로 불러낸 만큼, 그가 더 이상 마음의 짐을 짊어지지 않도록 공동체가 화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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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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