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프로야구 초창기부터 어린이회원에 가입했을 정도로 30년 넘게 야구를 좋아하는 오랜 '야구 덕후'다. 그런 내가 2000년대 초반부터 10년이 넘도록 즐겨 찾는 야구 커뮤니티가 있다. 이곳에서는 선수들의 화려하고 재미있는 플레이를 편집해 담은 '짤방'이나 야구계에서 들리는 소문들을 대단히 빠른 시간 안에 접할 수 있다(물론 여기 올라오는 내용이 모두 '팩트'는 아니다). 때로는 포털사이트의 야구 섹션보다 더 먼저 찾을 때도 있다.

KBO리그 준플레이오프가 한창 진행되던 지난 9일 이 커뮤니티의 인기 게시판에 하나의 '최다추천' 게시물이 올라왔다. '운동 선수들의 흔한 팬서비스'라는 제목으로 올라온 이 게시물에는 KBO리그 선수들과 메이저리그, 일본 프로야구 선수들 그리고 타 종목 스타 선수들의 팬서비스 장면을 비교해 올려 놨다. 이 게시물에 등장하는 KBO리그 선수들은 하나같이 쌀쌀맞고 팬들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이 게시물은 작정하고 KBO리그 선수들을 비난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금은 악의적이고 조금은 조롱이 섞인 내용의 글이다. 이것만 보고 KBO리그의 선수들이 모든 상황에서 팬들에게 성의 없게 행동한다고 결론 짓는 것은 분명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다. 하지만 야구팬들이 느끼는 선수들의 아쉬운 팬서비스에 대한 지적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한 프로야구 선수가 팬의 악수 요청을 거절하면서 지나가고 있다.

한 프로야구 선수가 팬의 악수 요청을 거절하면서 지나가고 있다. ⓒ kbs 갈무리


뜻밖의 감동을 선물해준 김경문의 정성스러운 사인

지금으로부터 8년 하고도 6개월 전, 개인적으로 큰 병을 앓아 병원에 장기 입원했던 적이 있었다. 지금이야 아무렇지 않게 얘기할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중환자실에 열흘이나 있었을 만큼 사태(?)가 심각했다. 그나마 위안은 어디선가 내가 '오늘 내일 한다'는 소식을 접했는지 평소 잘 만나지 못했던 지인들의 '폭풍 면회'가 이어졌다는 점이다. 3000일도 넘은 해묵은 옛날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당시 면회객 중 잊지 못할 어느 동생의 선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주 가깝지도 않고 그렇다고 아주 먼 사이도 아니었지만, 평소 의리와 신의를 중요하게 여기는 그 동생은 내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과일주스 한 박스를 손에 든 채로 병원을 찾았다. 그때는 이미 수술을 마쳐 위험한 고비를 넘기고 일반 병실로 옮긴 뒤였다. 안부 몇 마디를 주고 받은 후 할 말이 떨어졌는지 동생은 얼마 전 야구장에 다녀온 이야기를 꺼냈다. 경기가 끝난 후 당시 두산 베어스를 이끌던 김경문 감독(NC 다이노스)에게 사인을 받았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퉁명스럽게 "이왕이면 이런 주스보다는 김경문 감독의 사인을 받아 왔어야지 이놈아"라고 핀잔을 줬다. 동생은 갑자기 당황을 하면서 "알았어요 형, 또 야구장 가게 되면 꼭 형 이름으로 사인 받아서 다음 면회 올 때 가지고 올게요"라고 대답했다. 물론 내 핀잔은 영혼이 전혀 담겨 있지 않은, 대화를 이어가기 위한 썰렁한 농담이었다. 하지만 '평소 의리와 신의를 중시하는' 동생은 병상에 있던 내 농담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김경문 감독이 무심코 썼을 지도 모를 2줄의 메시지는 나에게는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김경문 감독이 무심코 썼을 지도 모를 2줄의 메시지는 나에게는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 양형석


동생은 2009년 4월26일 두산과 한화 이글스의 경기가 열리는 날, 잠실 야구장에 찾아가 경기가 끝나고 늦은 시간까지 기다렸다가 퇴근하는 김경문 감독에게 다시 한 번 사인을 받았다. 그리고 그 녀석은 다음날 곧바로 병원으로 찾아왔다. 가방에서 코팅된 A4용지를 꺼내며 미션에 성공한 런닝맨 멤버들처럼 환한 미소를 짓던 동생의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동생이 꺼낸 종이에는 김경문 감독의 사인 외에도 특별한 무언가가 적혀 있었다. "용기 잃지 마시고 빠른 쾌유를 빕니다"라는 김경문 감독의 격려 메시지였다. 동생이 사인을 받으면서 투병 중인 형에게 주는 선물이라 전했더니 김경문 감독이 사인과 함께 격려 메시지를 따로 적어줬다고 한다. 일부러 야구장까지 찾아가 사인을 받아온 동생의 마음 씀씀이도 고마웠지만 모르는 사람에게 격려의 메시지를 적어준 김경문 감독의 배려는 나에게 큰 감동을 안겼다.

모든 팬들을 한결같이 대하기 어렵다면 어린이 팬들이라도

 지난 2013년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의 돔 스포르토바 빙상장에서 갈라쇼를 마친 뒤 관중들과 인사를 하고 있는 모습.

지난 2013년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의 돔 스포르토바 빙상장에서 갈라쇼를 마친 뒤 관중들과 인사를 하고 있는 모습. ⓒ 연합뉴스


물론 김경문 감독을 비롯한 KBO리그 감독이나 스타 선수들은 야구팬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기 때문에 평소에도 이런 식의 비슷한 부탁을 많이 받을 것이다. 김경문 감독 역시 일면식도 없는 내게 어떤 커다란 동정심을 느껴 그런 메시지를 적었을 리는 없다. 하지만 김경문 감독의 작은 배려에 병상에 있던 내가 큰 감동을 받은 것처럼 팬들을 향한 프로 선수들의 작은 팬서비스는 받는 사람에게는 커다란 선물이 될 수 있다.

지난 2012년에는 '피겨여왕' 김연아의 사연이 큰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해 11월 국내에서 갈라쇼 공연을 한 김연아는 자신의 피날레 무대가 끝난 후 링크에 남아 관중석을 향해 허리를 90도 이상으로 접어 머리가 얼음에 닿을 듯한 이른바 '폴더 인사'를 해 관중들의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김연아 정도 되는 세계적인 스타가 비싼 금액을 지불하고 갈라쇼를 관람하러 온 관객들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를 보여준 것이다.

이는 KBO리그 선수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야구 선수들이 엄청난 고액 연봉을 받을 수 있는 이유는 팬들이 소중한 시간과 비용을 투자해 야구장을 찾아주기 때문이다. 흔히 선수들은 "경기장에서 좋은 성적으로 팬들에게 보답하겠습니다"라고 이야기하지만 자기 직업에 충실하겠다는 당연한 이야기는 사실 팬서비스라 할 수 없다. 이는 마치 택시 기사가 "손님이 원하는 장소까지 '미터기 요금만 받고' 모셔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메이저리그에서는 경기 시작 전 경기장에 일찍 찾아오는 팬들을 위해 선수들이 유니폼이나 글러브, 배트 등에 사인을 해주는 일이 일상처럼 돼 있다. 특정 시간에 어린이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지 않으면 벌금을 내야 하는 구단도 있다. 물론 팬서비스조차 돈으로 계산한다는 게 삭막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만큼 메이저리그에서는 미래의 고객이 될 어린이 팬들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극진히 대접(?)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KBO리그에서는 구단에서 정식으로 마련한 행사에서조차 팬들을 성의 없게 대하는 선수들이 종종 있다. 물론 선수들의 기분이 언제나 좋을 수는 없지만 자신에게 호의를 가지고 다가오는 팬들을 귀찮다는 듯 뿌리치는 것은 결코 '고객'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모든 팬들에게 같은 마음으로 대할 자신이 없다면 적어도 어린이팬들에게는 밝은 얼굴로 웃으며 대할 순 없을까. 선수들이 야구를 좋아하는 어린이팬들의 영웅이 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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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리그 팬서비스 김경문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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