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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퍼스는 여성혐오 안전지대일까.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학내 성폭력 사건, 단톡방 성희롱 사건, 축제 주점 메뉴판 논란 등만 살펴봐도 답은 쉽게 나온다. '아니다'.

대학 안에 녹아든 여성차별·폭력 문화에 대응하기 위해 학생들이 나섰다. 수원여성의전화는 대학생·대학원생으로 구성된 11명의 '지은이들'과 함께 학내 성희롱·성폭력 대응 매뉴얼인 '17학번 김지은'을 만들었다. '성평등을 위한 제3자 캠퍼스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지난 5월 여성의전화에서 진행한 페미니즘 특강에 왔던 수원·경기 지역 학생들 몇몇을 모아 매뉴얼 제작팀을 꾸렸다. 아르바이트·취직 준비 등으로 바빴지만, 시간을 쪼개고 방학을 활용해 일주일에 두세 번씩 여성의전화 사무실에 모였다.

내용 구성과 디자인 모두 학생들의 손을 거쳤다. 수다 떨듯 어디서도 털어놓을 수 없던 경험담을 나누며 한 장 한 장 구성했다. 그렇게 완성한 매뉴얼엔 한국 여성이 처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그려내 화제가 된 소설 <82년생 김지영>(조남주 저)에서 따온 이름을 달았다. '17학번 김지은'은 캠퍼스 곳곳에서 '불쾌하고 불편했던' 순간을 마주했던 모든 이들을 대변하는 명칭이다.

17학번 김지은
 17학번 김지은
ⓒ 수원여성의전화, 지은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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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난 성공했지, 완전! 네 여친 치장해도 김치녀. 내 여친 에코백 들어! 개념 있지!"
"이.게.재.밌.어?"

→ 동아리 내에서 창작물을 만들 때 여성혐오적인 요소가 있는지 비판적으로 검토하세요. 여성혐오적인 창작물이 멋있다거나 재밌다는 이유로 혐오에 동조하지 마세요.

#2.
"저희랑 같이 놀아요."
"술만 좀 마셔요, 예?"
"일행은 몇 명?"

→ 박력있다? 상남자다? 사랑과 폭력의 경계가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입니다. 상대방이 위협을 느낀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달력과 총 16가지의 사례 설명이 들어간 형태의 인쇄물에는 축제·수업시간·술자리·단톡방 등 여러 공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성차별적 상황에 대응하는 방법이 꼼꼼하게 적혀있다. '17학번 김지은'이 제시하는 사례는 보고서처럼 생생하고, 대처법은 단호하다. 가령, 강의 도중 교수가 문제적 발언을 했을 땐 이런 방법을 제안한다.

"수업 중 성차별 발언에 대해 문제제기한 학우를 '프로불편러'라고 함부로 이야기 하지 마세요", "함께 문제의식을 갖고 용기를 낸 학우의 편이 되어 지지해주세요", "교수 강의평가 시 '성차별' 항목을 추가하여 강의평가를 받도록 하고, 설문자에 대한 신변보장을 철저히 해야 합니다."

내용을 촘촘하게 엮을 수 있던 건, 이 매뉴얼을 '지은' 이들이 곧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당사자'는 단순히 피해자라는 의미에 국한되지 않는다.

학생들과 함께 '17학번 김지은'을 만든 수원여성의전화 강선화 활동가는 13일 <오마이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대학 내 성평등을 위한 제3자 프로젝트 17학번 김지은'이라는 것에서 '제3자'는 단순히 관찰자적 시점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며 "누구나 공동체 구성원이기 때문에 피해자, 가해자, 방관자, 조력자 등의 위치에 설 수 있다는 의미를 담았다"고 설명했다. 실제 매뉴얼 사례에 등장하는 주인공 '지은이'는 이 같은 역할을 넘나든다.

학생들과 함께 '17학번 김지은'을 만든 수원여성의전화 강선화 활동가는 "누구나 공동체 구성원이기 때문에 피해자, 가해자, 방관자, 조력자 등의 위치에 설 수 있다는 의미를 담았다"고 설명했다.
 학생들과 함께 '17학번 김지은'을 만든 수원여성의전화 강선화 활동가는 "누구나 공동체 구성원이기 때문에 피해자, 가해자, 방관자, 조력자 등의 위치에 설 수 있다는 의미를 담았다"고 설명했다.
ⓒ 수원여성의전화, 지은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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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도 '17학번 김지은'엔 세심한 고민의 흔적이 곳곳에서 엿보인다. 주인공 '지은이'는 여성으로 짐작되는 캐릭터지만 치마를 입거나 긴 머리의 모양새가 아니다. 일반적으로 '여성적'이라 여겨지는 특징에서 벗어났다. 캐릭터를 만들 때 남성을 '기본값'으로 하여 여성의 이미지를 덧대어나가는 문화에 균열을 내기 위한 작은 노력이라는 게 강 활동가의 설명이다.

또 달력엔 여성 관련 일정을 기재하면서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 왁싱샵 여성 노동자 살인사건 등 최근 일어난 젠더폭력 사건을 포함시켰다. 매뉴얼 뒤편엔 부록을 첨부해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 있는 젠더 용어들을 정리했고 성범죄 관련 법령, 여성지원센터 연락처, 피임 정보까지 넣었다.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학생들이 구성한 내용이다.

"너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고 제멋대로 가슴을 만지고 공공장소에서 엉덩이를 더듬으며 창피를 주는 그 남자는 정말 좋은 사람이 아니다. 정말 너를 사랑한다면 너의 의사를 존중해주고 너의 기분을 세심하게 살폈을 것이다. 짜릿함을 즐기고 싶다며 콘돔 없이 섹스를 요구하는 남자친구를 받아줄 이유는 없다." ('17학번 김지은' 44쪽, '지은이가 지은이에게 보내는 편지 - 너의 몸은 장난감이 아니다')

강 활동가는 "여전에서 진행하는 상담 숫자는 한정돼 있으니 통계적으로 말하긴 어렵지만 지난해 맡았던 사건 중에 대학 내 데이트 폭력, 성폭력이 많았다"며 "다른 사건도 마찬가지지만 (학내 성폭력 사건도) 그 강도가 심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 매뉴얼을 통해 사소하다고 느껴지던 행위들이 폭력이라는 사실을 드러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17학번 김지은'은 수원여성의전화 홈페이지( 관련 링크)에서 PDF 파일로 내려받을 수 있다.

17학번 김지은 매뉴얼 뒤편엔 부록을 첨부해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 있는 젠더 용어들을 정리했고 성범죄 관련 법령, 여성지원센터 연락처, 피임 정보까지 넣었다.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학생들이 구성한 내용이다.
 17학번 김지은 매뉴얼 뒤편엔 부록을 첨부해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 있는 젠더 용어들을 정리했고 성범죄 관련 법령, 여성지원센터 연락처, 피임 정보까지 넣었다.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학생들이 구성한 내용이다.
ⓒ 수원여성의전화, 지은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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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17학번 김지은, #여성의전화, #학내 성폭력, #단톡방 성희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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