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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 선생에게 배우고 두 분에게 인정받은 덕계 오건 선생을 모신 경남 산청 서계서원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 선생에게 배우고 두 분에게 인정받은 덕계 오건 선생을 모신 경남 산청 서계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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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증이 밀려왔다. 공부에 왕도는 없다지만 공부는 진척이 없었다. 올 초에 세운 목표를 실천하려고 노력하려 여러 권의 책을 읽고 요점 정리하고 읽고 쓰도 끝이 없었다. 어디 쉽게 공부하는 법이 없을까 주위를 둘러보다 10월6일, 경남 산청 서계서원을 찾았다. 읽고 또 읽기를 무려 1000번이나 반복하며 중용에 나오는 작은 주석까지 송두리째 외울 뿐 아니라 내용까지 완전히 파악한 선비. 부친상을 비롯해 조모상, 조부상, 모친상 등 무려 10여 년을 상중으로 보내고도 환경을 탓하지 않은 선비, 덕계 오건 선생을 뵈러 떠나는 길이다.
 

서계서원(西溪書院)은 1606년 한강(寒岡) 정구(鄭逑)를 비롯한 사림이 덕계(德溪) 오건(吳健?1521~1574)을 모시기 위해 세운 곳이다. 1677년(숙종3)에 사액을 받았다. 흥선대원군 때 헐렸다가 1921년 다시 지으면서 오건과 함께 오장, 오간, 박문영 등을 모셨다.
 서계서원(西溪書院)은 1606년 한강(寒岡) 정구(鄭逑)를 비롯한 사림이 덕계(德溪) 오건(吳健?1521~1574)을 모시기 위해 세운 곳이다. 1677년(숙종3)에 사액을 받았다. 흥선대원군 때 헐렸다가 1921년 다시 지으면서 오건과 함께 오장, 오간, 박문영 등을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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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에서 거창 가는 국도 3호선을 타고 내달린 차는 산청읍 쌀고개를 넘어 교차로에서 읍내로 들어갔다. 교차로에서 산청교육지원청에서 국도 밑 굴다리를 지나면 KBS 산청중계소와 아이사랑 어린이집 등의 안내표지판이 나온다. 안내표지판을 따라 1km 정도 들어가면 어린이집 바로 옆에 서원이 나온다.
 
서계서원(西溪書院)이다. 1606년 김굉필(金宏弼)의 외증손인 한강(寒岡) 정구(鄭逑)를 비롯한 사림이 덕계(德溪) 오건(吳健‧1521~1574)을 모시기 위해 세운 곳이다. 1677년(숙종3)에 사액을 받았다. 흥선대원군 때 헐렸다가 1921년 다시 지으면서 오건과 함께 오장, 오간, 박문영 등을 모셨다.
 

산청 서계서원 앞 홍살문 뒤로 ‘성인의 덕으로 들어간다’는 ‘입덕(入德)’ 문을 통해 서원으로 들어간다.
 산청 서계서원 앞 홍살문 뒤로 ‘성인의 덕으로 들어간다’는 ‘입덕(入德)’ 문을 통해 서원으로 들어간다.
ⓒ 김종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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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 홍살문 앞에서 15m 거리에 느티나무를 호위하듯 소나무들이 빙 둘러싼 흙무더기 작은 언덕이 나온다. '떡뫼'라고 이 동네 사람들은 부른다. 잠시 떡뫼에 핀 하얀 구절초에 마음을 준 뒤 홍살문 사이로 '성인의 덕으로 들어간다'는 '입덕(入德)' 문을 통해 서원 안으로 들어갔다. 마당을 가로지르면 서계서원 편액이 걸린 강당이 나온다. 강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있다.
 

산청 서계서원 앞에 있는 야트막한 언덕을 이곳 사람들은 ‘떡뫼’라 부른다.
 산청 서계서원 앞에 있는 야트막한 언덕을 이곳 사람들은 ‘떡뫼’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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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옆 담장에 울산도깨비바늘 꽃이 노랗게 피었다. 꽃말처럼 바람에 '흥분'해서 이리저리 몸을 흔든다. 모처럼 서원을 찾은 나에게 붙어 멀리 씨앗을 퍼질 수 있을까 생각하는 모양이다.
 
강당 뒤편 창덕사로 곧장 향했다. 올라가는 계단에 쥐꼬리망초가 가련하게 보랏빛으로 돌 틈 사이로 반긴다. 창덕사 주위에도 구절초가 피었다. 꽃말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창덕사 앞에서 고개 숙여 덕계 오건 선생께 예를 올렸다.
 

산청 서계서원 창덕사
 산청 서계서원 창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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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南冥) 선생 문하의 가장 뛰어난 제자(남명오현)로 덕계 오건, 수우당 최영경, 내암 정인홍, 동강 김우옹, 한강 정구의 다섯 사람을 말한다. 1572년 남명 선생 장례식에 덕계(德溪) 오건(吳健)이 제자 대표로 동쪽에 서고 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 등 차례대로 섰다.
 
창덕사 담장 너머로 붓끝을 닮았다는 필봉산과 가락국 마지막 왕의 전설이 깃든 왕산이 보인다. 창덕사에서 내려와 강당 툇마루에 걸터 앉았다. 가져간 책과 몇 가지 자료를 바람과 함께 읽었다.
 

산청 서계서원 창덕사에서 담장 너머로 붓끝을 닮았다는 필봉산과 가락국 마지막 왕의 전설이 깃든 왕산이 보인다.
 산청 서계서원 창덕사에서 담장 너머로 붓끝을 닮았다는 필봉산과 가락국 마지막 왕의 전설이 깃든 왕산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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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계 선생은 6세때 부친에게 글을 배워 9세때 대학과 논어를 읽었다. 11세때 부친상을 시작으로 28세때까지 모친상을 비롯해 조모상, 조부상 등 17년간 무려 5번의 상을 당했다.
 

산청 서계서원
 산청 서계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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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이 세상을 떠나기전 등을 어루만지며 공부를 게을리 하지 말라는 당부를 선생은 잊지 않고 열심히 시묘살이를 하면서도 공부를 했다고 한다. 뒷날 덕계는 자신의 학업에 대해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대학과 논어는 선친으로부터 배웠고 주역은 외숙으로부터 배웠을 뿐 그 외는 모두 스승 없이 스스로 공부해 터득했다"고 말했다.
 
가세가 넉넉지 못해 독학으로 공부했던 선생은 이른바 '자기 주도 학습법'으로 공부한 셈이다. 특히 선생은 책을 살 수도 없어 집에 있던 '중용' 등 몇 안 되는 책을 천 번 이상 붙들고 혼자 깨우쳤다. 공부에 왕도는 없지만 뜻을 깨치기 위해 읽기를 멈추지 않은 선생의 독서법, 공부법은 우리에게 머리 나쁘다고 후회하지 말라고 위로해 주는 듯하다.
 

남명 조식 선생의 애제자였던 덕계 오건 선생을 모신 산청 서계서원
 남명 조식 선생의 애제자였던 덕계 오건 선생을 모신 산청 서계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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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조모 상복을 벗은 28세 때, 늦은 나이에 성주 이씨와 결혼을 했다. 31세때 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회시에 합격했다. 이 무렵에 남명 선생을 찾아 가르침을 청했다.
 
덕계 선생이 남명 선생을 찾아 왔을 때 이미 독학으로 일가견의 학문을 이룬 이후였다. 남명 선생은 '덕계에게 <중용>, <대학>, <심경>, <근사록> 등의 책을 읽고 그 담긴 뜻을 깊이 체득하여 실천에 옮기라고 가르쳤다. 자신이 지금까지 혼자 공부해 오던 방법과 남명의 가르침이 절실하게 와 닿았다.<진주문화를 찾아서2-남명 조식>'
 
장판각을 나와 선생 묘소로 향했다. 갂인 진녹색 풀들 사이로 새 색시마냥 밝은 보랏빛으로 이질풀 꽃이 알은체한다. 하늘에서 내려온 별들이 총총 박힌 듯 쇠별꽃들이 선생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산청 서계서원 창덕사로 올라가는 길에 만난 쥐꼬리망초가 가련하게 보랏빛으로 돌 틈 사이로 반긴다.
 산청 서계서원 창덕사로 올라가는 길에 만난 쥐꼬리망초가 가련하게 보랏빛으로 돌 틈 사이로 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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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세의 남명 선생은 지리산 산천재에서 공부를 마치고 밤머리재를 해서 산청으로 돌아가는 43세의 덕계 선생을 십리 밖까지 배웅하며 덕교에 있던 나무 그늘에서 술자리를 베풀었다. 제자는 말 위에서 떨어져 이마를 찧었다고 한다. 뒤에 사람들이 그 나무를 송객정(送客亭)이라 하고 마을을 면상촌(面傷村)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아! 얼굴에 상처를 입은 그 맛을 누가 알겠는가.(노백헌 정재규(老柏軒 鄭載圭:1843~1911)의 <두류록> 중에서)"라며 선비들이 부러워했다는 말이 떠오른다. 사제지간의 정겨운 풍경을 떠올렸다.
 

산청 서계서원 덕계재
 산청 서계서원 덕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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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로 가는 학록(성균관 정 9품 벼슬) 오건에게 주다(贈吳學錄建上京)
 
한 발짝 내디디며 막 헤어지던 곳이,(一脚初分處)
오고 오니 멀어져 백 리인 듯하누나(來來百里遙)
산마루에서 아련히 돌아보았더니,(山頭回望盡)
서울 가는 길은 더욱 멀더구나.(西路更迢迢)(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남명집> 중에서>)'
 

산청 서계서원
 산청 서계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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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의 일화를 떠올리며 걸어 묘소 앞에 이르러 고개 숙여 예를 올렸다. 남명 선생은 덕계 선생이 어사 겸 재상경차관(災傷敬差官)으로 '호남을 엄하게 조사하여〔覈審〕 진산군(珍山郡)의 전세(田稅)를 감면시켜 줄 것과 돌산도(突山島) 목장에 농사짓는 것을 금하지 말 것을 청하고 남부 지방의 조세포탈과 군역회피 등 고질적인 폐단을 논한 사실'에 편지를 보내 "공과 같은 사람은 배운 것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라고 격려했다.
 

산청 서계서원 뒤편에 있는 덕계 오건 선생 묘
 산청 서계서원 뒤편에 있는 덕계 오건 선생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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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또한 퇴계 선생을 찾아가 배움을 청했다. 퇴계 선생은 "자강(덕계 선생의 자(子) 타고난 성품이 질박하고 신실하여 학문에 힘쓰기를 간절히 하여 진실로 돈독하니 나의 유익한 벗이다"라며 덕계 선생을 신뢰했다고 한다. 남명‧ 퇴계 선생에게 배우고 두 분에게 인정을 받은 셈이다.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중용을 삶 속에서 실천한 까닭에 조정 인사 실무 책임자인 이조정랑(吏曹正郞)를 3번이나 지냈다. 52세때 '이조정랑이 후임자를 천거하는 전랑천거법'에 따라 후임에 김효원을 천거했다. 당시 이조참의였던 심의겸이 이를 심하게 반대했다. 이조전랑 천거로 불거져 사림은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졌다. 선생은 정쟁에 환멸을 느껴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왔다.
 

덕계 오건 선생 묘소 근처를 돌아 서원 뒤편으로 난 오솔길을 걸었다. 바람이 시원하다.
 덕계 오건 선생 묘소 근처를 돌아 서원 뒤편으로 난 오솔길을 걸었다. 바람이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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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근처를 돌아 서원 뒤편으로 난 오솔길을 걸었다. 바람이 시원하다. 묘소를 내려와 서원 쪽으로 향하자 신도비(德溪吳先生神道碑銘)를 만났다. 비문 중에 아래와 같은 이야기가 선생의 학문에 대한 열정과 공부법을 엿보게 한다.
 

덕계 오건 선생 신도비
 덕계 오건 선생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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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오년(1558, 명종13)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주 교수(星州敎授)가 되어서 성주 목사 황금계(黃錦溪)와 함께 주자서(朱子書)를 공부하며 토론하였는데, 추위나 더위에도 그만두지 않았다. 의문이 생기면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생각하면 터득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터득하지 못하였을 때는 자고 먹는 일을 잊을 지경이었고, 터득해서는 정성스럽게 가슴 깊이 새겨두었다..."
 
선생은 요즘 말하는 '자기주도학습법'을 오래전에 실천한 분이다. 덕계 오건 선생을 통해 '머리가 나빠서, 시간이 없어서'라고 게이름 피운 나 자신이 부끄럽다.

덧붙이는 글 | 경상남도 인터넷뉴스 <경남이야기>
<해찬솔일기>



태그:#덕계 오건, #서계서원, #남명 조식, #퇴계 이황, #자기주도학습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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