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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재래시장에서 만난 순무를 다듬는 어머니, 마치 돌아가신 어머니를 뵙는 듯했다.
▲ 순무를 다듬는 어머니 강화도 재래시장에서 만난 순무를 다듬는 어머니, 마치 돌아가신 어머니를 뵙는 듯했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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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겨울 끝자락에 언 땅을 녹이고 피어나는 봄꽃을 보면, '나는 꽃을 피우기 위해 어떤 씨앗을 뿌렸는가' 돌아본다. 한여름 뙤약볕에서 짙푸른 빛으로 변해가는 나무의 파리와 들판의 풀에서는, 온갖 가뭄과 뜨거운 햇살을 온몸으로 견뎌내는 자연의 인내심을 배운다.

가을엔, 지난겨울부터 여름에 이르기까지의 인고의 과정이 열매가 되었음에 감사한다. 겨울엔, '쉼'이다. 잠시 숨 돌려 쉼의 시간을 갖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출발을 위한 첫걸음인 것이다.

지난 8일 추석 연휴의 끝자락, 단 하루의 추석 연휴만 남았을 뿐인데 다른 명절과는 달리 뭔가 헛헛했다. 그 이유는 이미 추석이 시작되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올해 5월, 아버님도 이 땅의 소풍을 마치시고 어머니 품에 안기셨으므로, 찾아뵐 부모가 없이 맞이한 첫번째 명절이었기 때문이었다.

묘소를 찾고, 벌초도 하고, 친지들과 음식도 나누었지만 부모님 없이 맞이하는 명절은 뭔가 빠진 것만 같다. 사람이란 참으로 이기적인 동물이라서, 자기가 직접 겪고 나서야 공감하는 측면들이 많은 것 같다.

순무 다듬는 할머니의 뒷모습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다
순무김치를 만드시는 어머니, 이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어머니처럼 다가온다.
▲ 김치를 담그시는 어머니 순무김치를 만드시는 어머니, 이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어머니처럼 다가온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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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어디든 가자며 집을 나섰다. 다 커버린 아이들은 이미 내 품의 아이가 아니기도 하지만 저마다의 일로 바쁘다. 이제 휴일이 되어도 아내와 나만 남아있는 일이 잦다. 물론, 거기엔 우리가 막내라고 부르는 애완견도 한 마리 있긴 하지만 말이다.

일몰이 아름다운 석모도로 가자며 집을 나섰다. 강화도와 교동도를 잇는 다리가 생긴 지는 이미 오래되었고, 교동도에서 석모도를 잇는 다리도 개통되었다고 하니, 배를 타지 않고도 석모도에 갈 수 있다. 물론, 검색결과일 뿐이고 나는 직 석모도에 가본 적이 없다. 차가 막혀도 좋으리라 싶어 집을 나섰는데, 김포를 지나 강화에 접어들었을 때부터 석모도를 향하는 차가 밀리기 시작했다.

때마침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친구 부부들이 남한산성에서 모일 예정이라며 오라는 것이다. 처음 가는 석모도 여행은 아쉬웠지만, 친구들을 만나는 수다라도 떠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 차를 돌렸다. 차를 돌려 남한산성으로 가기 전에 강화도 재래시장에 들렀다.

텃밭에서 거둔 채소들을 내다파는 어머니, 다 팔아야 얼마되지 않지만 소일거리가 있어 또한 살아갈 힘을 얻는다.
▲ 채소를 파는 어머니 텃밭에서 거둔 채소들을 내다파는 어머니, 다 팔아야 얼마되지 않지만 소일거리가 있어 또한 살아갈 힘을 얻는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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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재래시장에 접어드니 강화도 특산품인 순무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순무를 사서 김치를 담글까 하다가, 김치 담그는 일로 아내를 힘들게 할 것 같아 시장 반찬가게에서 파는 순무김치를 사기로 했다. 그렇게 마음이 바뀐 것은 순무를 다듬는 할머니의 뒷모습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구부정한 허리와 거친 손, 우리 어머니도 그랬었다. 어머니의 손길이 담긴 김치, 그것이 그리웠던 것이다. 시장에서 순무김치와 젓갈을 사고, 가판에서 바리바리 텃밭에서 따왔음직 한 호박과 호박잎을 샀다. 할머니들의 모습과 어머니의 모습이 오버랩 되었기에 우리의 몫보다도 더 많이 샀다. 친구 부부들 줄 것까지 사니 제법 푸짐한 장을 보았다.

구부정한 허리, 묵묵히 밭을 일구는 모습에서 아버지를 만난다.
▲ 텃밭에서 일하시는 아버지 구부정한 허리, 묵묵히 밭을 일구는 모습에서 아버지를 만난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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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으로 가는 길에 햇밤도 한 망 샀다. 시장에서 최상품 햇밤이 한 되에 일만 이천 원이었는데, 그보다 조금 못하긴 하지만 길에서는 산에서 오늘 딴 밤이라며 한 망에 만 원씩에 팔고 있었다. 이맘때에는 어머니가 밤밥도 해주셨는데 올해는 열매들이 잘 안 되었는지, 어머니 산소에 갔을 때도 햇밤 하나 구경도 못 했었다.

그 아쉬움도 달랠 겸 밤도 한 망 사서 밤밥을 해먹자고 했다. 물론, 밤은 내가 까주기로 했다. 그렇게 남한산성에 올라 남문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산행을 시작했다. 고등학교 시절까지 남한산성을 수도 없이 올랐기에 눈 감고도 다 알 것이라 생각했는데 곳곳에 숨겨진 비경들이 즐비했다.

북문으로 향하는 길. 텃밭에 쪼그리고 앉아 김을 매는 할아버지를 만났다. 영락없는 아버님의 모습이다. 강화에서는 어머니를, 남한산성에서는 아버지를 만난 것이다. 구부정한 허리와 거친 손이 닮았으며, 순무를 다듬고 김치를 다듬고 소소한 텃밭의 채소들을 다듬고 김을 매는 소박한 삶은 영락없는 나의 부모님들의 모습이었다.

뉴스에서는 이런저런 죄목으로 감옥에 갇혀있어도 누군가 보유한 주식이 몇조 원이나 올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도 몇조 원을 버는 분과 허리가 구부정해질 정도로, 허리가 쪼개지는 아픔을 감내하며 슁틈없이 흙을 만지고 푸성귀를 만져도 고작 손에 몇 푼 쥐는 분들의 삶. 어떤 삶이 진정 의미 있는 삶일까?

유네스코에 등재된 남한산성, 그러나 보수되는 성벽은 완전한 난림공사다. 마치 비숙련공들이 미장 연습을 한듯하다.
▲ 남한산성 유네스코에 등재된 남한산성, 그러나 보수되는 성벽은 완전한 난림공사다. 마치 비숙련공들이 미장 연습을 한듯하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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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가에서 영화 <남한산성>이 절찬리에 상영 중이라고 한다. 심훈의 <남한산성>에 대한 감동을 조금 더 간직하고자 아직 영화를 보지는 못했지만, 십중팔구 영화를 보는 순간 또한 번 나는 자괴감에 빠져들 것만 같다.

백성들의 삶과 군주의 삶, 백성들을 위해 한 것이 무엇이 있다고 꼬박꼬박 녹을 받아먹으며, 백성을 다 버리고 남한산성에 도망온 주제에 행궁을 짓고, 거기서도 호의호식했을까? 가신이라는 것들은 혀만 가지고 국가의 흥망성쇠를 말하며, 국가의 장래를 떠들어댔으니 이 나라가 온전할 수 있었겠는가?

어쩌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온 것도 아닐 터인데, 국정농단의 주범의 구속기간 만료를 앞두고 연장과 석방에 대한 혀싸움과 무지몽매한 신봉자들의 행태는 이전과 다를 바가 없다. 유네스코에 등재가 되었다며 자랑하는 남한산성의 보수된 성벽은 기가 찼다.

부정한 허리와 거친 손에서 어머님·아버님의 숨결 느끼며 위로 받는다

꽃도 아름답지만, 꽃보다 더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있는 누리장나무
▲ 누리장나무 꽃도 아름답지만, 꽃보다 더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있는 누리장나무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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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로 시멘트 도로는 깨어져 나간 곳이 너무 많고, 보수된 성벽은 난림공사라는 푯말을 붙여놓은 듯하고, 등산객들이 많은 곳에는 가판에 멸치 대가리와 고추장을 놓고 술을 파는 장사치들이 판을 치고,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한 등산객들도 제법 많다.

그냥, 좋게좋게, 인내하며, 긍정적으로... 이런 생각을 하며 걷는 행위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때 오후에 눈 부신 햇살에 빛나는 보랏빛, 그것은 누리장 나무의 열매였다. 꽃도 아름답지만, 꽃보다 아름다운 존재였다.

저 열매 속에 모든 인고의 과정이 다 들어있을 터이다.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보니 저마다 거칠고, 인고의 흔적들이 곳곳에 새겨져 있다. 그래도 아름답다.

그랬다. 순무를 다듬는 손, 순무김치를 담그는 손, 텃밭에서 나온 채소를 바리바리 가판에 내온 손, 작은 텃밭에서 김을 매는 손, 구부정한 허리, 주름진 얼굴들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예쁠 것도 없고 아름다울 것도 없지만, 삶이라는 큰 관점에서 보니 감옥에 앉아 몇조 원 버는 이들보다, 구속만료를 앞두고 석방되어야 하니 마니 하며 '혀 싸움'이나 해대는 이들과 비교해 보면 훨씬 더 아름답다.

소박하지만 거룩한 삶, 가을 열매를 닮은 구부정한 허리와 거친 손에서 나는 어머님과 아버님의 숨결을 느끼며 위로를 받는다.


태그:#추석연휴, #어머니, #아버지, #거룩한삶, #남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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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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