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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누가 문자를 보냈다. 날 고소한다고.
 시누가 문자를 보냈다. 날 고소한다고.
ⓒ pe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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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당일이었던 지난 4일, 시누가 나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면서 문자를 보냈다.

"너 함부로 말하는 교만함. 명절 지나고 경찰서에서 보자. 너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거야"라는 메시지가 오후 2시 20분에 왔고, 3분 뒤에 "전부 스크랩해서 경찰서로 제출했으니 준비해"라는 메시지가 따라왔다.

그동안 시누가 감정적인 메시지를 보내도 답하지 않았다. 사람이 화가 나면 과격한 단어를 뱉어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난 읽어도 답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읽다가 답할지도 몰라 시누의 전화번호를 스팸 번호로 분류해버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자신의 메시지를 읽지 않을 것을 알았는지, 다른 사람의 번호로 내게 보내려던 메시지를 캡처해 전송했다. 나도 모르는 번호에 내게 보낸 메시지의 기록이 남아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황당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답장을 했다. 모르는 번호로 얼마나 더 많은 메시지 캡쳐 화면을 보낼지 몰라서. 나는 "고소하시라"고 즉답했다.

시누의 고소 문자... 남편의 반응은?

나의 어떤 행위가 시누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것인지 명시돼 있지 않았지만, 시누가 왜 이런 '선전포고'를 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추석 연휴의 시작이었던 9월 30일 시누에 관해 쓴 내 기사 <"올케 엄청 교활한 애니까 조심해" 시누이의 문자> 때문인 것 같았다.

그동안 시누가 보낸 문자를 남편에게 보여준 적은 없었다. 감정이 격한 상태에서 쓴 메시지라 보여줄 필요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메시지를 남편에 보여주고 어찌하면 좋겠는지 물었다.

"문자로 감정싸움 하지 말고 다시 기사를 써. 지난번 기사에 담지 못했던 이야기를 담아봐. 이번 기회에 너의 권리를 스스로 찾는 것도 좋잖아."

현대 사회는 아버지(부계)를 중심으로 구성됐던 대가족 제도가 점점 사라지고, 핵가족화 된 상태다. 핵가족이 많아졌다는 것은 가족들의 삶이 세분화됐다는 이야기다. 즉 다른 주거공간에 사는 사람들 간에 존중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제 시어머니가 안방을 지키면서 절대권력을 행사, 며느리에 대한 지나친 간섭을 하던 시기는 끝났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여전하다. 안방(내당, 內堂) 절대권력을 고수하던 사고가 아직까지도 남아 시어머니가 며느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걸고 넘어지는 행위는 계속되고 있다. 나의 경우, 시어머니가 안 계셔서 그런지 시어머니의 '몽니'가 시누이의 '몽니'로 대체돼 나타났다.

핑크색 옷 입힌 엄마의 사정

핑크라는 색깔이 가진 고정관념 말고, 각각의 사정이라는 것이 있다.
 핑크라는 색깔이 가진 고정관념 말고, 각각의 사정이라는 것이 있다.
ⓒ fli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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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들이 입은 핑크색 옷이 문제가 된 경우도 시누 권력의 오용이 빚은 일이었다(지난 기사에 소개된 사례인데 아들이 핑크색옷을 입었더니 시누가 발끈했다는 내용이다). 시누는 "시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남자가 여자 옷을 입으면 출세하지 못한다고 하여 손주에게 핑크색 옷을 입히지 않았을 터이니 입히지 말라"고 했다.

이 말에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 시어머니가 살아계셨어도 나는 내 아들에게 핑크색 옷을 입혔을 것이다. 시어머니의 존재 여부로 인해 옷을 입히고 말고는 결정되지 않는다. 좋은 조언이라면 응당 따라야겠지만, 시어머니의 말이라고 해서 시어머니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선물받은 옷을 버릴 순 없는 것 아닌가.

둘째, 그 옷이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이야기해줬음에도 의미가 무시됐다는 점이다. 아들에게는 핑크색 옷이 있었다. 하나는 남편이 설빔으로 사준 옷이었고, 하나는 내가 운영하던 동아리에 있는 학생이 모자부터 신발까지 세트로 된 분홍색 옷을 보냈다.

그리고 또 하나가 있었는데 핑크색 배냇저고리였다. 동아리 선생님이 딸을 가졌다는 소문이 돌아 아이들은 용돈을 모아 옷을 사왔던 것인데 알고 보니 아들을 가졌다. 나는 학생들이 자신들의 용돈으로 사온 옷들을 그저 핑크색 옷이라고 안 입힐 수는 없었다. 선물 받은 옷 하나를 편하게 입히지 못해 시누에게 구구절절이 설명할 필요가 없어서 남편이 사온 설빔 이야기로 핑크색 옷을 입히겠다고만 말했던 것이었다.

속싸개도 그렇다. 시누가 산후조리원에 왔을 때도 내게 생후 100일까지 속싸개를 해주라고 이야기하고 갔다. 아이를 키워본 경험이 없던 나는 알겠다고 말했는데 조리원에서는 시간이 지나자 아이의 팔을 하나씩 빼줬다. 아이가 활발해서 놀고 싶어하면 팔을 빼준다는 설명이었다.

조리원에서 나온 뒤로 산후도우미가 집에 왔는데 오자마자 속싸개를 풀었다. 여름이라서 속싸개를 하면 땀띠가 나니까 하지 말고, 아이가 놀랄까봐 걱정이 되면 좁쌀 베게를 아이에게 올려주면 된다는 조언을 해줬다. 신생아를 돌보는 게 직업인 분들의 말이기에 그 말을 따랐을 뿐이다. 20여 년 전에 아이를 낳아 키운 시누가 속싸개를 두고 고집을 부린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이렇게 자신의 생각을 고집해 강요하는 것은 옛날 옛적 며느리가 시가의 말을 고분고분 들어야만 했던 시기의 관습이 남아서 그런 게 아닐까.

권리를 행사하려면, 그에 걸맞은 행동이 따라야 한다

추석이 끝나고 일주일 뒤, 시어머니 제사를 위해 삼색 나물을 무쳤다.
▲ 삼색 나물 추석이 끝나고 일주일 뒤, 시어머니 제사를 위해 삼색 나물을 무쳤다.
ⓒ 구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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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시누에게 "엄청 교활한 애" "조심해야 할 애"로 규정된 사건은 시어머니의 제사 때문이었다. 남편은 수 차례의 차례상과 시어머니 제사상을 새 식구가 차리는 동안 연락 한 번 안 한 시누에게 "무례하다"라고 말했는데, 시누는 그에 대한 답변을 문자로 보냈다. 바로 이렇게.

"걔, 엄마 제사 진심으로 지내는 거 아니야. 엄청 교활한 애니까 조심해."

시누이도 시어머니 제사에 참여해야 했다. 종교적인 이유로 참여하지 않았다면 그 일을 대신한 이에게 "고생했다"라는 말이라도 해야 했다. 나 혼자만의 주장이 아니다. 이유는 대법원 판례에서 찾을 수 있다.

2005년 7월, "성년 여성도 당연히 종중의 회원으로 편입된다"는 대법원의 판결이 있었다. "공동 선조의 후손 가운데 성년 남자만이 종중의 회원"이라는 관습법을 인정한 1958년의 대법원 판례가 47년 만에 깨졌다. 당시 대법원은 성인 여성도 종중원이 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로' 제사 방식에도 변화가 생겨 여성이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 더 이상 특이한 일로 인식되지 않게 된 것'을 들었다.

시누가 자신이 속한 종중의 회원으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시어머니 제사에도 참여해야 한다. 제사를 지내겠다고 종중이 선택했기 때문이다. 종중의 회원이 아님에도 남편을 돕기 위해 시어머니의 제사를 지내고 있는 내게 "진심이 아니다" 같은 말로 깎아내릴 처지는 못 된다.

가부장제는 종말을 고했고, 여권은 이전보다 신장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유교 문화는 망령처럼 남아 여전히 사람들의 머릿속에 남았다. 그리고 그 망령은 이 시대의 며느리들을 괴롭히고 있다. 이런 모순을 깨부숴야 할 시기에 나는 맏며느리가 됐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깨부수려 하면 할수록 시가는(정확히 말하면 시누는) 계속해서 있지도 않은 권력을 사용하려 하고 있다.

"너도 남동생 있다면서"... 놀랍게도 막막한 시누의 메시지

추석이 지나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시가에서는 자아가 없어야 편해요"라는 며느리들의 푸념을 봤다. 동시에 며느리들의 고충을 털어놓는 기사에서는 "며느리 한 사람만 참으면 편한데 왜 못 참느냐"는 댓글도 봤다. 큰 다툼을 막기 위해 며느리가 참으라(혹은 참아야 한다)는 뜻이다.

나는 이런 류의 글을 읽고 나서 더욱 이 일을 꺼내놓고 얘기하기로 마음 먹었다. 치열하게 다퉈야 정리될 일이기 때문이다. 집안일이라고, 창피하다고, 숨기면 숨길수록 바로잡히지 않는다. 나도 감정싸움은 피곤하다. 하지만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시가와 며느리와의 마찰이 내 세대에서 끝나길 바라기 때문이다. 내 딸이 이런 갈등에 놓이기 원치 않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 그동안 스팸 메시지함에 걸러져 읽지 못했던 시누의 메시지들을 정독해 읽어봤다. 지난 5월에는 이런 문자가 와 있더라. "너도 남동생이 있다면서, 입장을 바꿔 생각은 못하니." 정말 놀랐다. 시누가 나에 대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잘못 알고 있는지 가늠이 안 됐다.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할지 막막하다. 우선 이 말부터 전해야겠다.

시누님, 저는 남동생이 없습니다.


태그:#명예훼손, #시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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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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