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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내 건물 안내서를 읽고 있던 내방객
▲ 꽃을 닮은 모자 경내 건물 안내서를 읽고 있던 내방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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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건물, 이름은 잊었는데... 신입 스님들이 수행, 공부하던 곳으로 통일 신라시대에 지은 아주 오래된 건축물로 기억한다.

건물의 선과 색이 주위의 나무, 꽃뿐 아니라 빛과 그늘의 음영과도 참 자연스럽게 잘 섞였다. 예술적 석조 빨래판이나 피아노 건반 같은 기와는 잔잔한 리듬감과 완만한 처마선이 단아하면서도 가볍지 않은 경쾌함을 주었다. 세로로 늘여뜨려진 밝은 황색 대자리는 자칫 단조로울뻔한 횡적 건물에 변화감과 율동감을 얹는다.

한 내방객이 건물 앞의 안내판을 읽고 있었는데 모자가 초록 울타리 앞의 풍성한 꽃다발을 닮았다. 여인의 옷 차림과 건물의 어울림이 제법 좋아 색감 좋은 그림 같다. 꽃 봉오리 모양의 챙이 큰 모자, 모자 색깔과 맞춘 구두, 액세서리와 동색의 프린트가 섞여있는 스커트 등이 코디네이션을 잘 맞춘 격조 있는 나드리 패션이다. 양산과 웨지힐, 스커트, 핸드백 등의 차림새가 드라이브 위주의 편안한 여행을 즐김을 말 해 준다.

저 당시 나는 하동 일대를 튼튼한 두 발에 의지해서 해질녘까지 쏘다니던 중에 길을 헤매게 되어 다리 밑의 진흙탕에 빠졌다 구사 일생으로 기어 나온 직후였다. 뻘 같은 진흙에 무릎 위까지 빠져서 바지, 신발 다 버리고 냇가에서 대충 씻고 몰골이 엉망일 때라 저 우아한 여행객과 참으로 대비됐던 기억이 난다.

 별 생각 없이 들어간 굴다리 진흙탕 물은 그 깊이가 무릎을 넘어섰다.
▲ 비 온 뒤의 굴다리 별 생각 없이 들어간 굴다리 진흙탕 물은 그 깊이가 무릎을 넘어섰다.
ⓒ 이종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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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일 먼지와 진흙땅에 시달린 신발
▲ 도보 여행자의 발 종일 먼지와 진흙땅에 시달린 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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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주변에서 흔히 보는 꽃잎이 둥그러니 풍성한 화초는 불두화라 부르기도 하고 수국으로 부르기도 하더라. 이름만 다르게 쓰는 같은 품종인가? 싶었는데, 이참에 찾아 보았다. 꽃의 모양은 비슷한 것 같은데 가장 큰 차이는 '잎'이었다. 불두화는 잎이 '세 갈래'로 갈라져 있고, 수국은 잎이 '깻잎' 모양 비스무레하게 생겼더라.

불두화는 암, 수 구분이 없는 무성화의 대표적 꽃이라고 한다. 암수 구분이 없으니 꿀도, 향기도 없고 별 볼 일 없는 꽃에게 '나비'도 안 찾는다. 그런 내막으로 수도 정진하는 스님들의 정욕을 막아주어 '도' 닦는 데 도움을 준다 하여 절에서 많이 심는다는 것이다. 난 단순히 꽃 모양이 '부처님 머리' 모양을 닮아서 불두화라 하는 줄로만 알았더니... 풀린 다리를 좀 쉬게 한후 경내를 돌았다.

월정사 9층 석탑을 본 따 만든 것이라고 한다
▲ 쌍계사 9층 석탑 월정사 9층 석탑을 본 따 만든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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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려한 케익탑 같았던 월정사 탑
▲ 월정사9층석탑 화려한 케익탑 같았던 월정사 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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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로 봤을땐 잘 몰랐는데 같이 놓고 보니 기와의 처마 모양이나 골곡 차가 많다. 쌍계사 기와 능선이 월정사 기와보다 수수하고 완만하다. 고건축을 오래 연구한 분이 '우리의 기와는 뒷 산의 모습을 닮았다'고 하던데 기와선으로만 보면 쌍계사 뒷 산이 너그럽다.

월정사 탑이 화려하면서도 우아한 여성적 이미지라면 쌍계사 탑은 남성적이고 고압적이다. 탑과 계단들이 다른 절의 구조보다 하늘로 더 치솟은 감이 들었고 수량도 절 규모에 비해 좀 과하게 여겨졌고 풍수지리나 건축은 잘 모르지만 탑이 절 기운을 누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모든 건물과 그 부조물들은 주위 자연이나 주변 환경과 영향을 주고 받을진데 쌍계사에는 이 탑들이 별로 안 어울린다는 감상이 일었다.

저 긴 계단을 올라가면 스님들 공부방인데 108번뇌를 헤매야 어떤 작은 깨우침이라도 얻는다는 말 같다
▲ 108계단 저 긴 계단을 올라가면 스님들 공부방인데 108번뇌를 헤매야 어떤 작은 깨우침이라도 얻는다는 말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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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이나 계단 배열들이 층층이 아주 질서 정연하게 오르는 형식인데 서원으로 치면 전학후묘 구조다. 탑(들)은 대부분이 절 건물 좌우나 계단 위쪽과 좌우에 있고 대개의 배치가 상하좌우를 잘 맞춘 균형감 있는 삼각형 구조로 돼 있었다.

​흐트러짐 없는 그 직립 수직의 자세와 날카로운 기상은 불도에 귀의한 그들에게는 어떤 정신의 정수를 상징하는 것이겠지만 중생인 나에게는 강박이나 결벽 같게도 여겨졌다. ​아마도 당시 읽은 책 속의 잔상 때문인지도 모른다. 혼자 며칠간 여행을 하게 되면 주로 읽은 책중 한 두 권을 넣어 가는데 이때는 김훈의 <풍경과 상처>를 넣어 갔었다.

"나는 교회의 첨탑이나 사찰의 석탑이 견딜 수 없이 답답하다. 그것들이 가리키는 곳이 자유나 초월적 가치라 하더라도 그 자유를 그토록 간절히 지향해야 하는 긴장과 자기 학대를 나는 견디어내지 못한다. 내 고향의 수직구조물들은 이제 신성이나 초월적 가치를 모두 버렸다. 그것들은 신석기의 선돌이나 중세의 첨탑이 아니다.

그것들은 이제 아무것도 지향하지 않고, 아무것도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들은 테크놀로지와 초과이윤의 탑이다. 그것들의 꼭대기에는 피뢰침이 달려 있고, 교회의 네온사인 십자가에도 피뢰침은 달려 있다.. 내 고향에서, 이제 거룩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성과 결별한 거대한 힘의 탑들이 저 피곤한 강의 양안을 가득 메우고 들어서 있다. 그 수직구조물들은 하늘 높이 솟아 있지만 더이상 하늘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 <풍경과 상처> 중

 옆 건물과 분리, 경계의 역할로도 쓰이는 담
▲ 쌍계사 꽃담 옆 건물과 분리, 경계의 역할로도 쓰이는 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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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옆에 작은 절이 하나 있고 그 두 절 사이엔 흙담이 있는데  '경계'장의 기능을 담고 있지만 위압적이거나 배타적이지 않다.

이 절이 다른 절과 차별적인 느낌을 주는데 크게 일조한, 불규칙한 문양이 소박하게 새겨진 낮은 토담과 그 담 속에서 뻗어 나온 팔 다리 같은 담쟁이넝쿨도 좋다.

대웅전과 탑들의 건축자보다 초록 울타리와 여기 꽃담을 만들고 생각해 낸 이가 더 궁금하다! 나는 신화나 성화, 기원으로 무장한 곳에서 만나는 경배하는 신 보다는 소박한 담과 울타리가 있는 곳에 '산책'하러 와서 만나는 신이 더 좋다.

담 앞의 의자가 행인의 발목을 잡게 하던 곳
▲ 꽃담 앞 쉼터 담 앞의 의자가 행인의 발목을 잡게 하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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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네 잎 클로바 화분 좌우로 펼친 책이나 기와를 옆으로 차곡차곡 쌓아 놓은 듯한 꽃담에 기대 앉아 눈에 익은 책 읽다 꾸벅꾸벅 졸면 좋겠다.

 쌍계사 백미
▲ 꽃담 쌍계사 백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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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지고 깨진 기왓장들이 부서진 기원으로 느껴졌다
▲ 부서진 기왓장 부서지고 깨진 기왓장들이 부서진 기원으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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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산책 말미에 기왓장 더미를 보게 되었다. 기왓장의 용처를 알 순 없지만 깨진 기왓장들이 깨진 기원같다고 생각되었다.​ 사람들은 기왓장이나 연등에 얼마씩의 돈을 주고 자기의 기원마저 돈으로 대리 호출한다. 먼저 온 기원들은 나중에 온 기원들에 자리를 넘겨주고 후퇴하다가 종내는 쓰레기가 되겠지.

신들은 기원의 순서대로 소원을 들어 줄까? 아님 기원의 급박함이나 경중대로? 기원의 진심대로? 헌금!의 숫자대로? 기왓장들은 말이 없었다.

불상이나 십자가, 혹은 탑과 돌 속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세월의 역사만큼 수많은 인간들의 수 없는 기원과 욕망이 깃들어 있을 것이다. 인간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부처나 예수에게 절과 기도를 하고, 탑을 돌거나 교회에서 노래를 부르며 빌고 돌을 쌓고 장독대에 물을 떠 놓고 빌고 또 빌었고 앞으로도 계속 빌 것이다.

이제 기원의 종류와 양은 탑과 돌을 뚫고 나올 정도로 넘치게 됐지만, 사람들의 기원은 삶 만큼 다양하고 급해서 기원의 주기는 짧고 간절함도 얕아진다. 깨진 기왓장 감상을 마지막 산책으로 하고 절을 나왔다.

불일계곡을 낀 등산로가 있어서 평일임에도 산으로 들어가는 내방객이 제법 있었다. 여행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체력과 의욕이 떨어진데다 '덜 보고 오겠다'는게 이번 여행의 마음이기도 해서 가볍게 사찰 주위만 돌다 왔다.

절 입구에 있던 계곡 위로 지어진 담과 작은 문
▲ 계곡위의 문 절 입구에 있던 계곡 위로 지어진 담과 작은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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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곡을 감싼 나무들로 그늘진 계곡
▲ 죽림계곡 계곡을 감싼 나무들로 그늘진 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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