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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영주를 선비의 고장이라 부른다. 하지만 이러한 표현은 영주 문화가 지닌 일부분만을 상징하고 있을 뿐이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문화유산이 골고루 산재해있는 영주의 모습은, 영주 문화에 대한 재인식을 요구하고 있었다. 지금부터 유서 깊은 영주와 순흥(順興) 땅을 돌아보기로 하자.

부석사 안양루는 반전이 있는 누각이다. 무량수전으로 올라갈 때는 안양문이지만, 내려올 때는 안양루이다.
▲ 부석사 안양루 부석사 안양루는 반전이 있는 누각이다. 무량수전으로 올라갈 때는 안양문이지만, 내려올 때는 안양루이다.
ⓒ 윤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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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외버스를 타고 영주버스터미널에 내리면, 저 유명한 부석사(浮石寺)행 시내버스를 탈 수 있다. 산과 들이 펼쳐져 있어 장쾌한 느낌을 주는 도로를 달리면, 해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듯하다. 때로는 산과 물, 밭이 어우러져 넉넉한 느낌을 자아내고, 때로는 하늘로 쭉쭉 뻗은 가로수 길이 나온다. 이윽고 버스가 순흥 땅에 접어들자 검은 흙의 밭들이 보였다. 이렇게 1시간을 달리면 부석사에 도착한다.

'태백산 부석사(太白山 浮石寺)'라 적힌 일주문(一柱門)과 천왕문(天王門)을 통과하자 경내에 이르렀다. 가람의 배치는 질서정연한 모습이 아닌 누층적이고 중층적이었다. 또 각 전각의 지붕의 방향은 직선과 사선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이어 목고(木鼓)와 목어(木魚)가 달린 누각 밑의 좁은 계단을 오르자 갑자기 좌우로 확 트이고 뒤로는 야트막한 산이 병풍처럼 감싸 아늑한 느낌을 주는 공간이 나타났다. 이것이 첫 번째 반전이었다.

이어 안양문(安養門)을 지나 계단을 오르자 마침내 정면으로 무량수전(無量壽殿)이 수줍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안양문은 반전이 있는 누각이었다. 그러니까 무량수전을 향해 올라갈 때는 안양'문'이었지만, 무량수전에서 내려올 때는 안양'루(樓)'인 이중의 기능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재미있는 반전이었다. 또 '안양'의 의미답게 부석사의 주변 풍광과 경내 공간구조는 편안함과 아늑함을 선사했다. 그리고 무량수전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끝에 그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신비감을 더하고 있었다. 어쩌면 여기에 부석사를 조성한 옛 사람들의 재치가 담겨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무량수전은 고유한 향취를 뿜어내고 있었다. 무량수전을 대면한 순간,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삼국시대로 돌아간 것과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무량수전 자체는 고려시대의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고려시대도 뛰어넘어 삼국시대에 안착한 기분이었다. 화려함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지만, 켜켜이 쌓인 세월의 흔적이 화려함도 아니요, 소박함도 아닌 세월 그대로의 멋을 내뿜은 탓이었다. 무량수전의 유명세에 밀려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난 석등의 조각 솜씨 역시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한편, 잘 알려져 있다시피 부석사에는 선묘낭자와 의상대사의 로맨스 이야기가 서려 있다. 지금도 부석사 한쪽에 있는 '부석(浮石)' 바위는, 이를 상징한다. 한국과 중국을 잇고, 세월과 세월을 잇는 두 사람의 설화는 이 부석 바위에 응축돼 있는 셈이다.

우리는 흔히 고구려 고분벽화하면, 북한과 중국을 떠올린다. 물론 고구려의 중심지가 현재의 북한과 중국에 있었던 만큼,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남한에도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벽화고분이 있다. 바로 순흥에 있는 순흥읍내리고분벽화(順興邑內里古墳壁畵)다.

부석사에서 버스를 타면, 한 번만에 순흥읍내리벽화고분에 갈 수 있다. 현재 실제 고분은 보존을 위해 공개하지 않고, 고분 모형물을 별도로 만들어 관람하도록 돼 있었다. 고분은 횡혈식(橫穴式) 석실분(石室憤)으로 화강암으로 만들었는데, 안에는 내세관이 반영된 벽화와 함께 글귀도 쓰여 있다. 전성기 고구려의 세력과 문화가 한때 소백산맥을 넘었음을 잘 보여준다.

순흥읍내리고분벽화 인근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賜額書院)인 소수서원이 있다. 처음 백운동서원이라 불렀던 소수서원은 풍기군수 주세붕이 고려 말의 성리학자 안향을 배향하기 위해 세웠던 데서 비롯됐다. 안내 표지판에 따르면, 출토 유물로 볼 때 원래 이곳의 터는 사찰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점에서 소수서원은 불교에서 유교로 문명사적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던 조선전기의 사정을 잘 보여주는 유적이기도 하다.

소수서원에서 무엇보다 흥미로운 유적은 '청다리'다. 현재 복원 공사를 끝마친 청다리에는 서원이 상징하는 유교적 엄숙함과는 정반대인 일화가 전해온다. 서원에 다니던 유생들이 이 지역 여성들과 사랑에 빠져 아이를 낳게 되면, 그 아이들을 이 청다리 밑에 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어릴 적 부모님께 "저는 어디서 태어났어요?"라고 물으면 "다리 밑에서 주어왔다"고듣던 대답이 여기서 기원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전설은 일제가 조선 유학을 깎아내리기 위해 조작한 것이라는 말도 있다.

어쨌거나 영주의 순흥읍내리고분벽화, 부석사, 소수서원은 각기 고구려·신라, 고려 불교·조선 유교를 상징하는 유적들이다. 그렇다면 왜 영주에는 이렇게 다양한 문화 양상이 나타나게 된 것일까?

이는 영주의 지리적 위치와 관련이 깊다. 영주와 순흥은 소백산맥을 넘는 통로였던 죽령(竹嶺)의 바로 아래쪽에 위치한 탓에 새로운 문화와 문물이 경상도 내륙으로 전파될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지역이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영주는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문화와 불교문화가, 조선시대에는 유교문화가 영남 땅에 첫 발을 붙인 곳이므로, '영남문화의 첫 기착지'라 부르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태그:#영주, #부석사, #순흥읍내리고분벽화, #소수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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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시민. 사실에 충실하되, 반역적인 글쓰기. 불여세합(不與世合)을 두려워하지 않기. 부단히 읽고 쓰고 생각하기. 내 삶 속에 있는 우리 시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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