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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경 속에 감춰진 신비의 미소, 서산마애삼존불

저 유명한 서산마애삼존불은 보원사지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곳으로 가는 길 오른편에는 맑은 계곡이 흐르고 있었다. 햇빛이 비추어 반짝이는 계곡 곁을 걷다 보니 계곡물 속에서 노닐고 있는 물고기도 눈에 띄었다. 계곡을 건너는 작은 다리에서 물이 흘러내려오는 쪽으로 바라보니 화사함이 감도는 듯했다. 그리고 계단을 오르기 전까지는 전혀 몰랐지만, 계단을 오르면서야 이곳이 깊은 산속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비록 지금은 도로가 닦여있고, 올라가는 길이 정비되어 있어 어렵지 않게 관람이 가능하지만, 예전에는 심심산중이어서 이곳에 있는 마애삼존불이 세간에 알려지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서산마애삼존불이 세상에 알려진 건 1959년이었다). 실제 마애삼존불이 있는 곳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이곳이 계곡 깊숙한 곳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주변 풍경은 숨겨진 절경이었다. 이런 곳을 비경(秘景)이라 하는가?

나는 우연히도 일행 중 가장 앞장서 계단을 올라갔던 탓으로 마애삼존불을 제일 앞 줄에서 볼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마애삼존불의 미소가 잘 드러난다는 오른편(관람객의 입장에서)에 섰다. 이게 행운인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 덕에 마애삼존불의 미소를 그 누구보다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었다.

오른쪽에서 바라본(관람객의 입장에서) 서산마애삼존불의 모습.
▲ 서산마애삼존불 오른쪽에서 바라본(관람객의 입장에서) 서산마애삼존불의 모습.
ⓒ 윤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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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이 처음으로 중앙의 석가여래와 마주친 순간, 내 입가에도 미소가 피어올랐다. 갑자기 마음이 환해지고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저 한 가득한 미소, 무언가 충만한 듯 보이는 미소. 그 미소는 심신이 울적하던 이도 공명하게 되는 그런 매력을 지닌 동시에 그윽함과 편안함, 재치와 위안을 두루 갖춘 미소였다. 이 깊은 비경 속에 신비의 미소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른쪽 반가상의 얼굴은 포근함을 갖춘 어머니 상이었다.

이 미소를 구현해낸 사람들은 이곳을 안식처로 삼으려 했음이 분명했다. 서산마애삼존불의 조성 시기는 7세기로 추정된다고 했다. 7세기가 어떤 시대인가? 백제와 신라 간에 밤낮없이 명운을 건 사투가 계속되고 민중들은 전화(戰禍)와 동원의 고통 속에 해매고 있던 시대가 아닌가? 그런 시대의 사람들이 이런 미소를 구현해낼 수 있었다는 것은 이 미소 속에 당대인들의 간절함과 절박함이 극도로 반영되어 있음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이 깊은 곳에 상처받은 심신을 치유 받을 수 있는 안식처를 조성했던 것이다.

물론 이 미소 속에는 당대인들의 심성이 투영되어 있다고도 하겠다. 현대인들은 결코 이런 미소를 재현해낼 수 없을 것이다. 이 미소는 백제인들 이었기에 그 구현이 가능한 것이었다고 해야겠다. 최근의 백제사 연구 성과에 따르면, 백제인들은 자신들을 문명국으로 여기는 자부심에 충만해 있었다. 서산마애삼존불의 이 미소를 보노라면, 백제인들의 자부심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당시 백제의 문화적 사상적 역량은 절정에 달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과연 저 미소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 우리네 표현 한 마디가 불현듯 떠올랐다. 방실방실! 그렇다. 특히 중앙의 석가여래가 뿜어내는 미소는 '방실방실'이라는 표현에 딱 부합했다. 그리고 더 경이로운 건 암벽에 이러한 미소를 구현한 점과 더불어 자연 지세를 탁월하게 이용해 마애불을 그려 넣은 점이었다. 마애불이 조각되어 있는 암벽 위에는 일종의 처마 구실을 하는 바위가 자연적으로 있었다. 그 바위에는 허리가 굽은 소나무 한 그루가 버티고 있었다. 고대인들은 주변 자연환경을 선택하는 감각이 이처럼 뛰어났던 것이다. 아마 백제의 조각가는 이 암벽이 자신의 모든 혼을 불어넣을 만한 천혜의 도화지라 여겼으리라.

물론 서산마애불은 그 미소만이 전부는 아니다. 광배와 옷깃, 연꽃 등의 조각 역시 섬세함의 절정을 이루고 있었고, 태안마애불처럼 역시 발가락까지 묘사되어 있었다. 마애불 측면으로 다가가 살피자 마애불의 입체감이 실감났다.

이제 서산마애불과 해어질 시간이 되었지만, 나는 발길을 돌리기가 쉽지 않았다. 몇 번이나 돌아보며 사진을 찍어댔다. 불이문(不二門)을 나와 안내표지판을 보니 마애불 중간은 석가여래로 높이 2.8미터이며, 좌우의 보살은 각기 제화갈라보살과 미륵보살이라 하였다.

충의사에 남겨둔 아쉬움

원래 예정한 이 날의 마지막 답사지는 예산 충의사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체된 탓에 이곳의 시내버스 시간에 맞춰 예산역으로 가야 하는 나로선 충의사에 도착하자마자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나는 윤봉길 의사는 과연 국가에 '충성'하기 위해 의거에 나섰을까 라는 문제의식을 지니고 이곳 충의사를 돌아보고 싶었던 터였다. 윤봉길 의사는 '충성' 차원이 아닌 역사의 대의 그리고 조국의 해방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던졌던 것이 아닌가?

그런데 왜 이 사실이 '충'으로 표상되어 있는지 그 이면을 알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어쩌면 이는 박정희 유신시대에 이루어졌던 수많은 상징조작의 하나였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아쉬움은, 백제의 마지막 수도였던 부여 땅을 돌아보지 못한 점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수학여행으로 부여 정림사지와 백마강 일대를 돌아본 적이 있었다. 과연 그때보다 변한 것이 있는지 옛 추억을 끄집어내며 확인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 기회는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나는 충의사 건너편에서 예산역으로 가는 농촌버스를 탔다. 농촌지역의 시내버스를 타보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자 꽤나 이색적인 경험이었다. 특히 버스의 차창 밖으로 비치는 풍경은 충의사에 남겨둔 아쉬움을 상쇄하기에 충분했다.

내가 탄 버스는 덕산온천을 지나 덕산, 삽교 일대의 땅을 달렸다. 덕산 일대에 펼쳐진 평야는 참으로 평탄하고 넓었다. 이점은 삽교로 갈수록 절정에 달했다. 삽교의 이차선 가로수 길을 달리는 기분은 결코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양옆으로 뻗어 있는 광활한 대지는 우리 땅에 이렇게 넓은 평야가 있었나 라는 생각을 갖게 할 정도였다. 저 멀리까지 산이 보이지 않고 평야가 펼쳐져 있었다. 또 아파트도 보이지 않았다. '평야(平野)'란 이런 데를 지칭하는 말임을 새삼 알 수 있었다.

곳곳에 산이 들어차 있는 영남지역에선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바다가 아닌 논밭으로 구성된 땅인데도 보는 것만으로 시원함과 장쾌함을 들이마실 수 있었다. 특히 삽교로 갈수록 너른 대지의 전개는 감탄을 자아냈다. 그 땅을 삽교천과 무한천이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중간중간에 나오는 읍내 풍경은 정답기 그지없었다. 낮은 집들이 오밀조밀하게 붙어있는 모습. 참 오랜만에 보는 모습이었다. 읍내를 지나면 또 광활한 평야가 펼쳐졌다.

예전에 나는 열차나 버스의 창밖을 볼 때면 주로 먼 산을 위주로 보았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내 시선은 산보다는 논밭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물론 내가 힘든 농사일을 직접 해본 적이 없어 목가적인 감상으로 흘러간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 논밭에서 '직접노동'과 '공존'의 미덕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농부는 농번기동안 열심히 노동을 하며 땅을 일구고 밭을 맨다.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소출로 자급자족의 생활을 영위한다. 대체 이보다 정직한 생활방식이 어디에 있겠는가? 금융, 투기, 대박, 한탕주의 등이 범람하는 세대 속에서 그러한 생활방식은 청신함을 넘어 귀중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또한 실로 농업은 과거, 현재, 미래를 이으며 역사성을 풍부하게 내포하고 있다. 그러한 순수함은 앞으로의 역사에서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농사일은 자연과 공존이 가능하고 또 공존해야만 하는 생활방식이다. 물론 화학비료 남용 등의 반공존적 농업방식이 한동안 이 땅을 지배한 적이 있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상대적으로 현대사회에서 자연과 공존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은 농사일이다. 그리고 그 농사일의 터전이 논밭인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저 논밭이야말로 인류 역사의 기본 동력이 아니었던가? 어쩌면 우리의 역사는 저 논밭이 만들어낸 것인지도 모른다. 생각이 이에 이르면 감상적인 한 역사학도의 마음은 울렁거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쨌거나 그렇게 해서 나는 예산역에서 천안행 장항선에 올라탔다. 장항선은 온천의 연속이었다. 도고온천, 온양온천 등등. 앞서 본 덕산온천까지 포함하면 이 일대는 온천의 수맥이 흐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날 하루는 그렇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태그:#서산마애삼존불, #삽교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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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시민. 사실에 충실하되, 반역적인 글쓰기. 불여세합(不與世合)을 두려워하지 않기. 부단히 읽고 쓰고 생각하기. 내 삶 속에 있는 우리 시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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