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작품 포스터.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작품 포스터. ⓒ 소니 픽쳐스


아마도 <블레이드 러너>(1982)를 보았다면 이 말에 동의할 것이다. 복제 인간인 '레플리컨트' 로이가 그를 사냥하던 '블레이드 러너'인 인간 데커드를 끌어올리는 모습이 생생하다. 그 장면이 기억에 남는 건, 개인마다 이유가 다를 것이다. 대사가 워낙 시적이라 그럴 수도 있고 영화의 기술이 폭발하는 지점이라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해석이 두 인격체, 레플리컨트와 인간 사이의 갈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한 해석 중 하나를 꼽자면, 로이를 신격화하는 관점이 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영화는 칼자국이 남은 손을 통해 로이에게 성흔과 후광을 남긴다. 그는 여태껏 섬기던 신(타이렐)을 죽이고 비로소 인간 위의 '신'으로 등극한 것이다. 그래서 로이는 '레플리컨트이면서 인간' 혹은 인간보다 상위의 것, '신'처럼 초월적인 존재가 된다. 해석은 여기서 갈린다. 로이는 무엇이 되었나. 데커드는 누구의 처지에서 어떤 선택을 취했나. '인간' 혹은 '레플리컨트'인가.

인간과 레플리컨트를 논하기 전에 그들의 위치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상급자와 하급자, 지배자와 피지배자. 해당 장면에서 로이는 이처럼 말한다. "두려움 속에 살아보니 어때. 그게 바로 노예의 기분이야." 이 두 문장의 대사로 로이는 자신을 노예로 지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는 누구의 노예인가. 앞뒤 맥락으로 인간의 노예라고 추측할 수는 있지만, 데커드의 존재는 불분명하다. 따라서 데커드에게 하는 말은 데커드가 아닌, 그가 속한 LAPD(경찰국)나 사회에게 보내는 메시지일 수도 있다.

레플리컨트가 서로를 알아볼 수 있음을 생각해보면, 데커드가 레플리컨트였을 경우 대강의 영화적 신호를 주었을 것이다. 인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 미묘한 신호조차 감지되지 않고, 우리에겐 레이첼과 데커드의 관계만이 남는다. 레플리컨트와 알 수 없는 존재 간의 사랑. 분명 로이는 그것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정체성의 모호함과 노예에 대한 언급은 우리 사회의 구석을 겨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존재의 물음에 앞서, '나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인간상. 몸과 마음의 성이 다른 소수자들, 타국에서 본국으로 온 이민자들. 그 모두가 섞여지지 않는 이질성을 띠고 있다.

빈자와 부자, 소수자를 위한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의 한 장면. 등장인물 'K(라이언 고슬링 분)'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의 한 장면. 등장인물 'K(라이언 고슬링 분)' ⓒ 소니 픽쳐스


작품은 전편인 <블레이드 러너>(1982)로부터 35년 뒤에 개봉했다. <블레이드 러너>가 개봉한 1982년과 후속작이 개봉한 2017년 사이에 많은 기술적 발전이 이루어졌음은 당연하다. 아마도 그것이 <블레이드 러너 2049>(2017)가 크게 성취를 이룬, 드니 빌뇌브 감독이 가장 큰 고뇌를 한 부분일 것이다. 이미 하나의 성경이 된 <블레이드 러너>에 손을 댄다는 건, 당시와 비슷한 수준의 '기술적' 겉치레를 해도 그 미적 가치를 뛰어넘기 힘들기 때문이다. 평단의 우려를 멋지게 물리쳐낸 드니 빌뇌브 감독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작중에서 '조이'라고 일컬어지는 그녀를 구현하는 기술적 진보를 제외하고도 드니 빌뇌브가 보여준 <블레이드 러너 2049>의 모습은 이것을 '후속작'이라고 말하기 충분하다. <블레이드 러너>에서 파생된 여타 사이버 펑크 장르의 영화들, <마이너리티 리포트>(2002), <공각기동대>(1995), <토탈 리콜>(1990)이 미치지 못한 원작의 고뇌와 물음은, 그의 신화적 장치들과 맞물려 특유의 심도를 자아내는 익스트림 롱 쇼트로 재탄생된다.

우리가 익숙하게 보아온 그의 카메라, 쇼트는 이번 작품에서도 무척 넓고 관대하다. 그러나 이번 작품에서 정적이면서도 공허한 카메라가 지난 작품보다 돋보이는 것은 블레이드 러너가 그려낸 사회가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으로 꽉 들어찬 LA의 한복판은 그 속으로 깊게 내려가지 않으면 축축한 삶의 고단함이 보이지 않는다. 동시에 멀리서는 정적이며 고요하게 보이던 인파들이 요동치는 것처럼 느껴지게 되는 순간이 있다. 그가 관망하는 익스트림 쇼트의 용도란 다음 장면에 이러한 파동을 충돌시켜 큰 울음을 내게 하는 것일 테다. 작품의 결말에 갈등을 폭발하는 파도처럼 말이다.

변용에 앞서, 전작의 감독인 리들리 스콧에게 보내는 작은 조의와도 같은 것이 있다. 그의 카메라도 전작처럼 누군가의 눈, 개인의 소우주를 익스트림 클로즈업하며 작품에 시동을 건다. 그다음 컷도 전작과 동일한 구도로 2049년의 모습을 조망한다. 그러나 작품의 최전선에 선 설정 쇼트가 보여주는 모습은 전작과는 달리 K의 시선에서 시작한다. 이러한 작품의 도입부부터 느껴지는 전작과의 미묘한 차이점은, 작품 전반에 걸친 영화적 변용을 미리 예견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공언했던, 원작의 철학을 받고 자신의 스타일로 벼려내겠다는 테크닉적인 부분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데커드(해리슨 포드 분)'를 기다리던 35년의 세월처럼 <블레이드 러너 2049>도 전편으로부터 30년 뒤를 배경으로 한다. 그리고 그동안 있었던 작품 속의 사건들은 흘러간 우리 사회의 변화를 반영한다. 드니 빌뇌브 감독의 카메라가 넓은 시야를 지닌 건 거대한 과거를 파헤치기 위함이다. 그 행위는 전작의 철학을 계승하기 위한 탐구의 행위이기도 하며 변하지 않은 사회에 대한 경멸의 시선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드니 빌뇌브가 계승한 원작의 철학, 도입부의 모래와 안개가 자욱한 어딘가로 걸어 들어가는 K의 모습은 과거를 향해 걷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의 에고(Ego),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잊힌 과거, 그것을 포착하는 카메라가 여러모로 바뀌었다고 해도 우리의 마음속에 온전히 존재한다. 또한, 그것을 떠올리는 현재에 왜곡된 과거의 '상'을 맺는다.

그들을 갈라놓는 이분법적 관계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의 한 장면.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의 한 장면. ⓒ 소니 픽쳐스


작품의 주인공인 'K(라이언 고슬링 분)'는 '블레이드 러너'인데, 전작과는 달리 레플리컨트로서 동족을 죽여야만 하는 숙명을 지녔다. 그는 상관의 명령을 따르며 사라진 구시대의 유산을 쫓고, 그러던 어느 날 사건 속에 깊은 무언가가 있음을 느낀다. 그것은 자신의 사라진 과거, 뿌리를 규명해줄 어떠한 것이다.

그 '레플리컨트'의 존재는 우리의 모습과 같다. 그들의 창조주가 그들에게 숨결을 부여한 것처럼, 사회의 부는 우리에게 삶을 유지할 자본을 준다. 자본은 거대한 것에서 아랫것으로 이동한다. '그'와 '그들'의 복종 관계는, 우리 사회의 계급 차와 같다. 우리는 살기 위해 도주한 패배자 레플리컨트를 죽이고 뼈를 취한다. 돈은 그들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도록 설계된 장치다.

분명 K의 2049년은 지금보다 기술과 문화가 발전했지만, 그들의 삶은 전체적으로 퇴보해 있다. 부자들은 이미 난장판이 되어버린 지구를 떠난 지 오래다. 부자와 빈자는 식민지 행성과 지구의 거리만큼의 차이를 지닌다. 지구에 남은 건 돈 없고 빈곤한 하층민들이다. 레플리컨트도 부자와 빈자의 차이를 명확하게 안다. 레플리컨트조차 지구에 있으려 하지 않고 식민지 행성 개척에 앞장서고 싶어 한다. 부는 부를 낳고, 빈은 점점 거대해진다. 계급은 잉여자본이 남던 수만 년 전부터 있었고, 분명 미래에도 계속될 것이다. 인간의 창조물인 레플리컨트는 그것조차 물려받았다. 레플리컨트의 권력자인 '블레이드 러너'는 도주한 레플리컨트를 폐기한다.

부유층의 겉모습은 마치 우리와 같지만, 속은 다르다. 그들이 살아온 환경은 우리와 다르다. 그들과 우리를 갈라놓는 건 '부'의 존재다. 그렇다면 그들의 사고는 '부'로부터 부여받는 것일까? 부유함이 그들을 특별하게 만든다면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지 알 필요가 있다. 전편의 데커드가 품었던 의문, 나와 그들의 차이는 무엇인가. 본편의 K가 품는 의문, 나와 그들의 차이를 부여하는 건 뭔가.

아마도, 이것이 부에 대한 해답이 될 것이다. 부유함은 노동함으로써 받는 대가이고, 그 노동의 규모에 따라 대가도 커진다. 하지만 그 부유함조차 사회로부터 부여받는 것이고, 사회의 부는 어디에서 왔는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우리가 알다시피, 사회는 개인의 총 집합체이며 사회의 부는 그들로부터 거둬들인 일부다. 그렇다면 개인이 사회로부터 부여받는 부는 사실 개인이 사회로 증여한 것과 같다. 그런데 증여한 몫보다 부여받는 몫이 더 큼에도 우리는 사회의 상류층을 따라갈 수가 없다.

그들의 부는 무엇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정말 노동의 가치에서 오는 것인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인류의 부유함이란 잉여곡식으로부터 출발했다. 그리고 인간이 가진 특유의 것들, 지식과 문화의 존재는 이러한 나머지의 존재다. 식량문제가 해결됨으로써 다른 것에 투자할 여유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의 우리는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알고, 즐기고 있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은 사실 '부유함'으로 인한 잉여 시간을 지식 탐구에 투자한 결과에서 비롯된다.

인간과 인간의 차이가 부의 격차에서 오는 계급문제라면, 레플리컨트와 인간의 차이는 이러한 잉여에서 비롯된다. 인간의 잉여는 부이며 레플리컨트의 잉여는 문화와 지식이다. 레플리컨트는 인간에게 복종하며 인간이 누리는 것 이상을 누릴 수 없다. 그들은 자아가 있고 자유롭게 행동하지만 결국 인간의 자유에 귀속되는 하층민이다. 따라서 인간의 부가 레플리컨트의 잉여로 전환되는 순간 두 존재의 차이가 시작된다.

부유층의 부는 문화를 누릴 수 있게 하고 문화는 그들의 정서, 페이소스를 형성한다. 그리고 인간이 부유한 만큼 레플리컨트의 문화적 허용도 넓어진다. 부가 아래로 흐르는 만큼 상위 계급인 인간이 부유할수록 따르는 레플리컨트도 많은 덕을 본다. 그리고 인간의 부 아래에 형성된 레플리컨트의 문화는 다시금 '그들만의 부'를 작게 형성한다.

K가 맞닥뜨린 문제는 허용된 잉여의 범위를 넘음으로써 발생한다. K는 잉여를 넘어 금단의 영역으로 향한다. K의 모험은 무의식에 감춰진 본능을 찾아가는 것이다. 드니 빌뇌브 감독이 설치해놓은 신화적 표상물을 한 층 지나갈 때마다 그는 한층 더 깊은 무의식의 단계로 들어간다. 일련의 단서들을 찾아가며 K는 자신의 내면을 쫓아 존재의 기원을 탐구한다. 태어난 아이는 고아원에서 사라졌고, 아이를 복제한 아이는 죽었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의 한 장면. 전편의 주인공 '데커드(해리슨 포드 분)'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의 한 장면. 전편의 주인공 '데커드(해리슨 포드 분)' ⓒ 소니 픽쳐스


이른바 같은 자아(DNA)를 지닌 자기 인격의 두 갈래를 찾아간다. 그 중, 죽어버린 아이는 여태껏 자신을 복제품 '레플리컨트'로 규정해왔던 자아의 죽음을 뜻한다. 그렇게 내면의 타자는 어딘가로 버려지고, 고아원 비스름한 곳에서 K는 한결같이 머리를 깎은 아이들을 본다. 고아원은 쓰레기장의 한복판에 있고 K는 쓰레기에서 아이들의 모습을 본다. 그는 기억이 버려진 쓰레기장, 무의식의 깊숙한 곳에 있던 분리된 자아를 본다. 그렇게 죽음을 맞이했던 타자는, 사실 여러 무리 중의 하나였음에 불과함을 깨닫게 된다.

여기서 K가 맞닥뜨린 고민은 '여태껏 익숙하게 살아오며 믿었던 자신 존재의 붕괴'다. 그가 자신을 낳은 부모에게 가지는 호기심은 인간사회에 대한 반발이나, 제거될 것이라 믿는 공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가족 회귀'의 본능이다. 우리는 본능에 따라 어머니의 품, 가족의 품을 그리워하지만, 이성으로 억누른다. 그리고 레플리컨트는 기계의 자아를 가진 '이성적 존재'이며, 당연하게도 그들의 탄생이 공장에서 이루어졌음을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K가 발견한 일련의 사실은, 자신의 존재를 기계에서 인간의 영역으로 옮겨 놓으며 그동안 억눌렀던 본능을 일깨운다. 그렇게 K는 가족을 찾아 헤매게 된다. 그것은 K에게 허용되지 않은 잉여다. K가 부모라고 생각했던 것은 사실 이름 모를 타자였을 뿐이다. K는 자신이 대면한 무의식 속 진실을 마주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데커드는 자신의 자식을 고아원에 버린 건 레플리컨트의 혁명을 위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자식을 고아원으로 분리하고, 자신과 레이첼은 서로 다른 길을 떠났다. 부모와 떨어져 불안에 떨며 고통받은 기억 또한 무의식에 억누르고 살았고, 데커드와 레이첼처럼 자아를 분리하며 살았던 것처럼 말이다.

여기서 자신을 복제한 데커드의 딸과 데커드의 아들인 자신의 존재가 데커드와 레이첼의 관계와 같다. 데커드는 위협을 피하고자 수십 년간 버려진 도시에 살았으며, 레이첼은 레플리컨트 혁명을 위해 어딘가를 떠돌고 있다. 즉, 여성(레이첼과 죽은 복제된 딸)은 홀연히 사라지고, 남성(데커드와 K)은 굳건히 남아 미래를 도모한다. K는 남성이었고, 그의 내면 자아는 미래를 도모했다. 그러나 데커드로부터 자신이 낳은 자식은 딸이었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큰 충격에 빠진다. 본래 낳았던 자식이 딸이라는 말은 자신이 죽은 것으로 처리된 딸, 즉 복제된 아들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K는 '인간의 복제인 레플리컨트 사이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복제인 레플리컨트 사이에서 태어난 것'의 복제가 된다. 그래서 K의 자아는 남성에서 여성으로 나아가고 자아는 한순간에 부정당한다. 이제 '그'는 '그녀'에게 자리를 내주며 죽어야만 한다. K는 복제된 것의 복제품이다. 그의 존재는 가난한 하층민 중에서도 하층민이며, 하층민 사이에서 태어난 희망이 아니라 거짓 희망이었을 뿐이다.

이것이 이 영화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다. '그'와 '그녀'는 사회로부터 '차별'받지만 그것은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둘은 차이를 지닌 것이 아니라 사실상 하나다. 위에서 언급했던 자아를 규정하는 '부'라는 문제는 존재의 규명이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님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며 더욱 확장된다. 레플리컨트인 자신이 두 레플리컨트 사이의 생식에서 태어났다면 그것은 인간과 같으므로 자신의 존재를 인간의 범주로 확장한다.

그러나 자신이 생식으로 태어난 존재의 복제품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그것은 더는 차이가 아니라 범접할 수 없는 무언가로 흘러간다. 부의 유무와 관계없이 모두 평등하다고 생각했던 이념이, 부의 범주를 벗어나 '부'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복제된 것의 복제, 인간과 레플리컨트 사이의 복제와 레플리컨트와 레플리컨트 사이의 복제는, 그 사이에서 태어난 존재의 규정에서부터 다시 시작하게 한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의 한 장면. 등장인물 '월레스(자레드 레토 분)'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의 한 장면. 등장인물 '월레스(자레드 레토 분)' ⓒ 소니 픽쳐스


작품 내에 나오는 '니앤더 월레스(자레드 레토 분)'라는 레플리컨트 기업체의 총수는 이러한 의문을 관객에게 되묻는다. 월레스의 외모는 마치 예수님처럼 보이고, 성경을 읊조리며 자신을 구원자로 설정한다. 작중에서 계속해서 나오는 월레스 회사 내의 어느 공간은 물 위에 있는 것이 마치 예수가 물 위를 걷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월레스는 물 위를 걷는 것과 같은 기적을 대중에게 선보이고자 한다. 그는 물 위에서 레플리컨트의 생식으로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며 그에 불응하는 것들의 목숨을 '거둔다'. 그를 둘러싼 물은 '기적'을 행하는 성수처럼 보이기도, 파괴를 일삼는 '대홍수'처럼 보이기도 한다.

생명의 부여와 존재의 부여, 그 둘은 위에서 언급했던 것과 같다. 인간이 레플리컨트에게 생명을 부여하고, 인간의 부유함이 그들의 존재를 확인시킨다. 즉 월레스는 레플리컨트가 인간에게서 벗어나 '생명을 창조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그들이 '인간'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그는 레플리컨트의 아버지이기도 하며 동시에 레플리컨트의 새 탄생을 이끈 창조주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데커드에게 생식의 암시를 심은 것처럼 우리의 내면에 '부'의 가치를 심는다. 그는 자본가로서 피지배 계급상에 '부'의 지배를 정당화한다. 그렇다면 월레스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 로봇에게 생식을 부여하는 '자본가'로 볼지, 혹은 그 외견대로 빈자를 먹여 살리고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는 '기적'으로 보아야 할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둘 중 어떠한 것을 고른다 하여도 자본이 존재를 규명하는 결과가 달라지지 않는다. 부라는 요소는 '나'와 '그'를 갈라놓는 하나의 요소일 뿐 여러 차이를 대변하지 못한다. 인간 사회에서 하대받는 하층민에게 "껍데기"와 같은 말로 차별받는 레플리컨트는 하층 중의 하층민이다. 같은 레플리컨트에게 조차 '복종'에 묶인 운명을 비난받는다.

분명 레플리컨트는 하층민보다 돈도 많고 아는 것도 많지만, 레플리컨트라는 요소만으로 차별받는다. 따라서 이것은 단지 부에 한정된 문제가 아니다. 레플리컨트라는 요소는 사회로부터 그들을 격리하는 낙인이자 징표다. 그것은 마치 우리 사회의 소수자들을 떠오르게 한다. 레플리컨트는 이름이 없고, 소수자들도 그렇다. 그들을 차별하는 이들에게는 단지 '객체'에 불과할 뿐이다.

부자와 빈자, 레플리컨트와 인간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의 한 장면.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의 한 장면. ⓒ 소니 픽쳐스


로저 디킨스 촬영 감독이 <시카리오>에서 보여줬던 항공 촬영은 <블레이드 러너>에 와서 정점을 찍는다. 카메라는 절대자가 되어 그와 그녀의 모험을 쫓아간다. 그것은 그들을 설계한 창조주의 시선, 혹은 우리 사회를 높은 빌딩에서 관음하는 자본가의 시선이다. 넓고 넓은 도시는 그들을 집어삼키고 눈길이 닿지 않을 만큼 조그마한 무언가로 축소한다. 카메라를 따라가는 동선에서 그들의 존재감은 희박하다 못해 어둡다. 영화의 어떤 조명도 그들의 내면까지 밝힐 수는 없다.

별 하나 없는 밤하늘에서, 우주 식민지로 이주하고자 하는 지구 하층민들의 염원은 밝은 조명으로 대체된다. 그런데도 그들의 염원이 닿은 조명은 영화의 분위기를 가볍게 하지 못한다. 그들의 울분으로 가득 찬 사회는 어둡고 축축하다. 오직 자본으로 밝혀내는 조명이야말로 그들의 시선을 앞으로 인도할 뿐이다. 그것은 누군가로부터 내리받은 불, 프로메테우스의 그것과도 같다. 경찰청 건물 안에서도, 월레스 주변 회사들의 안에서도 K에겐 권력 있는 누군가의 시선이 함께한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는 거짓 신에 불과하다. 그들이 만든 천사는 자유의지를 잃고 타락할 기회조차 잃는다. 그들의 천사는 오직 신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장난감일 뿐이다. 빔 밴더스의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나왔던 천사들처럼, 월레스는 전 우주에 레플리컨트를 보내 사회적인 시선을 장악한다. 그것은 마치 개운하지 못한 단잠을 자고 일어난 것처럼 아무리 눈을 비벼도 거두어지지 않는 무엇이다. 영화의 전반적인 필터는 그들의 시선을 가로막는다.

필터는 눈앞에 놓인 진실을 보지 못하는 관객, 혹은 등장인물들의 시선을 지칭한다. 눈앞이 가려진 채로 진실을 좇던 K의 시선은 자신과 같은 독립적인 개체, 러브 (실비아 휙스 분)와의 전투로 선명해진다. 그와 그녀는 자신에게 허용되지 않은 사고와 감정을 부여받은, 혹은 발달시킨 개체다. 그들은 프로메테우스가 부여한 열망, 불, 시선, 그 어느 것에도 속해있지 않다. 그러나 러브는 그것을 억누르며 내재화하고, K는 자신의 뿌리를 찾아가고자 하는 의지로 승화시킨다. 그렇게 두 감정은 차가운 파도가 들이닥치는 방파제 위에서 미친 듯이 부닥친다. 방파제가 거센 파도를 애써 막는 것처럼, 그들의 몸과 마음도 충돌한다.

영화가 보여주는 모든 것, 항공 촬영, 조명, 레플리컨트, 창조주인 월레스와 데커드의 자녀, 그 모든 것이 방파제 위에서 부닥친다. 전작이 포스트 휴먼과 휴먼 사이의 격렬한 전장이었다면, 그것을 벗어나 자아를 찾아가는 모험담이었던 본작의 전장은 바로 이곳이 된다. 점점 인간이 되어가는 K와 인간임을 거부하고 인간의 탈을 쓴 포스트 휴먼의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그들의 싸움은, 자신을 거부하는 내면의 자아가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각각 남성과 여성, 피지배자와 지배자, 휴먼과 포스트 휴먼의 대결은 그들의 자아가 하나이며, 그들의 사회 또한 그렇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렇게 영화 내내 대립하던 갈등 구도가 깨어지자, K 또한 평안을 얻는다. 그러한 갈등 구도는 이러한 차이를 인식하는 것에서 온다. 레플리컨트의 몸이 인간이고 정신이 기계인 것은, 신체적 성별과 성의 자아가 다른 소수자들을 떠오르게 한다. 레플리컨트라는 이유로 쏟아지는 냉대는 인종과 혈통의 문제를 떠오르게 한다.

레플리컨트를 노예처럼 부리는 인간의 모습은 마치 식민지 시대의 그것, 혹은 위에서 말한 대로 자본의 노예임을 상기시킨다. 작중에서 K는 '조이(아나 디 아르마스 분)'라는 홀로그램 AI와 생활하는데, 그 AI는 <그녀>(2013)에서 나왔던 AI '사만다'를 연상시킨다. 분명 조이는 AI지만 인간처럼 사고하고 행동한다. 심지어 홀로그램으로 투사되어 현실의 물체를 만질 수도 있다.

이 점에서 조이의 존재는 K의 존재와 겹쳐지기도 하며, 차별화된다. 두 존재는 인간으로부터 파생되었지만, 인간과 유사하게 사고하고 행동하며, 반대로 실체가 있고 없고의 차이를 지닌다. 하지만 그들이 인간으로부터 태어났다고 해서, 인간의 복제라고 해서 그들의 존재를 부정할 수 있는 건 아니다. K와 조이는 서로 믿고 의지한다. 서로는 서로의 존재를 온전히 믿어주는 유일한 '사람'이다.

소수자들 사이에서는 소수자라는 개념이 없다. 소수자라는 개념은 소수자 바깥의 '타자'가 있어야만 존재한다. 또한, 그 타자의 비율이 소수자보다 커야만 성립된다. 하지만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의 사례를 생각해 본다면 굳이 소수자가 소수여야만 그 개념이 성립하는 건 아니다. 그리고 인간은 신세대 레플리컨트에게 생식의 기능을 막아놓음으로써 사회적 소수자인 그들에게 '가난', 혹은 '레플리컨트'와 같은 차별적 요소를 대물림하는 것을 막아주었다.

그러나 데커드의 자식이라는 존재는 소수자를 규정하는 것이 대물림 된다고 말하며, 자식을 복제한 K의 존재는 소수자가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거나, 혹은 소수자라는 정의조차 소수자 사이에서 이루어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소수자라는 것은 무엇인가? 혹은 소수자라는 것을 누가 정의하는가? 레플리컨트 사이의 자식인 '아나 스텔라인(카를라 유리 분)'은 소수자들 사이에서 태어나 그들의 꿈을 설계하는 분야의 전문가가 되었고, 이것은 소수자의 자식이 소수자의 기억을 왜곡하는 아이러니를 형성한다.

이처럼 소수자가 소수여야만 그 개념이 성립하는 건 아니다. 소수자라는 정의조차 소수자 사이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두 논제는 우리 사회가 소수자를 대하는 태도를 돌아보게 한다. 예를 들면, 여성은 전 세계의 절반을 차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소수자가 아닌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로 뭉쳐 자신의 권리를 위해 싸우면서도 자신들 사이의 파벌을 나누어 다시 그들 사이의 소수자를 만든다. 역설적으로, 데커드와 K의 '부'가 말하던 차이는 이 시점에서 다시금 분열되어 차별하는 행위가 되고 만다.

이러한 소수자들의 태도는 무척 자기배반적인 행위다. 그들은 부당한 차별에 대항하여 일어서지만, 정작 자신들 사이를 부당하게 갈라놓는다. 그들은 마치 '블레이드 러너'처럼 인간의 개가 되어 서로에게 칼날을 겨누고 있다. 그러면서도 레플리컨트로서 취하는 의무만을 저버린 채 그 신체적인 우월만을 즐기려고만 한다. 그들이 요구하는 평등이란 것은 레플리컨트가 가진 획일적 유전자와 기억이 아니라, 인간과 레플리컨트 사이를 갈라놓는 인식을 없애는 것이 되어야만 한다.

작중에서 인간은 겉모습이 아니라 신체적인 능력의 차이로 레플리컨트와의 차이를 '인식'한다. 그러나 레플리컨트가 차별받는 이유는 신체적인 능력이 강해서가 아니라 영혼이 없고 인간의 복제에 불과하다는 인식의 차이 때문이다. 즉 우리는 인간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인식으로 소수자를 규정하고 있다. 흑인은 흑인이고 백인은 백인, 황인은 황인이다.

영화가 보여준 오이디푸스적 아이러니처럼 그것을 규정하는 건 우리의 인식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인식을 고치는 건 레플리컨트와 인간을 겉모습으로만 구분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차이를 구별해 내는 것에 더욱 신중해야만 한다. 우리가 소수자를 인정하고 그들을 '평등'하게 인식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차이'를 '개성'으로 인정해야 한다. 어떠한 의미에서의 평등이란 제국주의나 민족주의와 같은 획일화이며, 우리는 이미 나치로 대표되는 획일화의 사례를 보았기 때문이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의 한 장면.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의 한 장면. ⓒ 소니 픽쳐스


그래서 본작의 마지막에 가서야 드디어 드러나는 레플리컨트 혁명 조직의 존재는 두 가지를 뜻한다. 하나는 부의 불평등에 대항하는 프롤레타리아 조직이다. 그들의 획일화된 유전자와 우월한 신체는 마르크스가 말하던 '계급 혁명'이 일어나는 조건을 충족한다. 그러나 우리가 마르크스주의로 작품을 읽어낼 때 주목해야 할 것은, 혁명이 아니라 혁명이 일어나는 이유다. 공산권 국가들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마르크스주의란 이론상으로만 완벽하고 현실에 적용하기는 어렵다. 그렇기에 더욱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그곳(행성 식민지), 혹은 그것(레플리컨트의 자식)은 이론상으로만 존재하는 이상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둘은 혐오와 차별에 대항하는 소수자를 위한 인권 단체다. 레플리컨트 사이에서도 차별받고, 인간들에게서도 차별받는 그들의 모습은, 소수자가 어떠한 것인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우리가 소수자 코드로 작품을 읽어낼 때 주의해야 할 것은, 그들이 행하려 하는 것이 '차별'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인정받기 위한 행동이라는 점이다. 차별에 대항하려 하면 그 속에서 다시금 또 다른 차별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그러한 면에서 드니 빌뇌브가 로저 디킨스의 협업으로 만들어낸 마지막 장면의 익스트림 롱 쇼트는, 전작을 계승한 것 이상의 변용으로 보인다. 분명 본작에서 K의 승리는 피지배계급으로서의 자아가 세상의 우위에 올라선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K의 내면에서 피지배계급으로서의 자아가 확립되었다는 것만을 의미한다. 그렇게 K는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얻지만, 결국 정체성조차 누군가로부터 얻어진 것이라는 사실에 허탈해한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계급적으로 하달받은 자아라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의 내면에서 갈등하던 타자는, 대타자의 승리로 끝나고 만다. 노예의 기분을 느껴보라며 빗속에서 조용히 되뇌던 로이의 물음이, 이젠 빗속으로 사라지지 않고 눈처럼 조용히 쌓이기 시작한다. 동시에 K와 우리가 가지는 편견을 상징하던, 눈 앞을 가리던 영화의 필터는 맑고 투명하게 바뀐다. 그들, 레플리컨트의 세상을 적시던 비는 눈으로 바뀌어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한다. 그것은 비라는 액체가 눈이라는 고체로 변화하는, 결정구조의 차이를 의미한다.

이처럼 '그들만의 부'는 차별의 두 가지, 계급과 소수자 문제를 시사한다. 작품 곳곳에 숨겨진 오이디푸스 서사의 요소는 레플리컨트로서의 자신을 찾아가는 것이기도 하며, 이러한 문제 속으로 점점 다가가는 것이기도 하다. K는 오이디푸스 왕자의 범주를 넘어 문제를 일으키지만 그제야 문제의 해결에 다가설 수 있었다. 우리도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 부는 잉여에서 비롯되고, 우리의 부는 '자본'이 아니라 나태함이 넘치는 '잉여'로운 현실이다. 우리가 그 현실을 넘어설 때, 비로소 문제를 직면하고 그것의 근원에 다가설 수 있게 된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선호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기사에 한하여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영화 드니 빌뇌브 블레이드 러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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