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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지 못하는 위대한 사람들이 있다. 틀에 박힌 열명 스무명 짜리 위인전집에 들지 못했지만 기억해 마땅한 업적을 세운 훌륭한 사람들 말이다. 이들로부터 내가 사는 오늘 이 세상이 큰 빚을 지고 있음을 알게 되면 참으로 당혹스런 기분이 고개를 들이민다. 얼마 전 읽은 책 <아름다운 반역자들>에 실린 여성운동가들의 삶이 내게 이런 기분을 느끼게 했다.

이 책은 여성 운동가 열명의 삶을 조명한다. 올랭프 드 구주, 소저너 트루스, 사로지니 나이두, 루스 퍼스트, 글로리아 스타이넘, 존 바에즈, 레일라니 뮤어, 템플 그랜딘, 미셸 더글러스, 섀넌 쿠스타친이 그들이다.

이들 각각은 여성인권과 참정권을 위해 투쟁하고 노예제 폐지에 앞장섰으며 인종차별·국가폭력·전쟁·아동 및 동물 학대·성소수자 배격 등에 맞선 열성적인 개혁가들이다. 용감하고 끈기있게 더 나은 세상을 추구했고 몇은 그 과정에서 목숨까지 잃었다. 그럼에도 이들 대부분은 업적에 걸맞은 명성을 얻지 못했다.

이제라도 이들의 존재를 알게된 건 부끄럽지만 다행한 일이다. 부당한 권력과 관습에 맞서 싸운 선배들을 이제껏 알아두지 못했음이 부끄럽고 이제라도 알게 되어 다행하다. 이들의 삶과 업적을 기억하지 않는 건 우리 스스로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을 닫아두는 일이 될 것이다. 여기 책에 실린 이들 가운데 몇을 추려 그들의 업적과 삶을 되새기려 하는 건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보다 위대한 일에 자신의 삶을 바친 이들을 나는 얼마 알지 못하므로.

루스 퍼스트, 목숨을 걸고 차별과 싸우다

루스 퍼스트(Ruth First, 1925-1982)
▲ 아름다운 반역자들 루스 퍼스트(Ruth First, 1925-1982)
ⓒ 봄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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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아파르트헤이트가 본격 시행됐다. 1994년 국민 모두가 투표권을 행사한 첫 선거가 시행되고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에 오르기까지 반 세기 가까이 힘을 발휘한 인종차별정책이었다.

선거에서 승리한 국민당은(NP)은 흑인인 반투족이 어떤 토지도 소유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제한하는 한편, 백인만 살 수 있는 거주구역을 지정하고 먼저 살고 있던 흑인을 강제로 이주시켰다. 또 수년 동안 점진적으로 유색인종의 참정권을 부정하고 다른 인종 간 혼인을 금지하는 등 백인의 특권을 강화하기 위한 정책을 실시했다.

당시 이십대이던 루스 퍼스트는 이후 죽음에 이르기까지 평생 동안 이 정책에 반대하는 삶을 살았다. 그저 반대하는 생각을 가졌을 뿐 아니라 정부의 탄압에 맞서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섰다. 운동가들이 경찰과 극렬 인종차별주의자의 공격으로 살해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던 남아공의 혼란한 상황 가운데서도 퍼스트 부부는 끝내 뜻을 꺾지 않았다.

언론인 출신인 퍼스트는 평생에 걸쳐 기사와 기고문 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늘 백인에 비해 차별받는 흑인의 삶에 있었다. 그와 같은 관심은 그녀를 열성적인 공산주의자로 만들었다. 그녀는 변호사인 남편 조 슬로보와 함께 공산주의자로서의 활동도 열성적으로 전개해나갔다.

당시 남아공 사람들은 오로지 인종에 따라 분류되었다. 어디에 살지부터 어디에서 일할지, 누구를 만날 수 있는지까지 모든 것이 출신인종에 따라 정해졌다. 흑인과 흑백 혼혈, 동양인, 백인 가운데 가장 우대받는 백인과 천대받는 흑인은 천양지차의 삶을 살았다. 아파르트헤이트는 백인과 흑인 사이의 차별을 제도화해 불평등을 고착화시키는 악법이었다. 퍼스트가 평생에 걸쳐 싸운 대상은 이와 같은 것이었다.

애초 비폭력·불복종운동으로 시작한 이들의 활동은 1960년 경찰이 샤프빌에서 군중에 발포해 69명이 사망하고 200여명이 부상을 입은 사건을 계기로 폭력투쟁으로 변화한다. 넬슨 만델라와 조 슬로보는 비밀 군사조직의 사령관이 되어 정부재산과 공공시설에 폭탄공격을 가하는 등 무력저항을 이어갔다. 직접 군사활동을 벌이진 않았으나 루스 퍼스트는 남편이 참여한 이 활동에 대해 "파괴 외에는 바꿀 방법이 없다"고 지지의견을 피력했다. 아파르트헤이트, 차별과의 전쟁이었다.

퍼스트는 그 전쟁에서 끝내 살아남지 못했다. 그녀는 1982년 모잠비크 마푸투의 에두아르도 몬들라네 대학교 사무실에서 남아공 경찰이 보낸 폭탄 소포에 목숨을 잃었다. 그녀의 나이 쉰일곱, 아파르트헤이트와 맞서 싸운 지 34년 만이었다.

그녀의 사망소식에 당시 경찰들이 자축했다는 보도가 남아있을 만큼 루스 퍼스트는 그릇된 공권력의 중대한 적이었다. 한 활동가는 그녀에 대해 "거의 모든 저항 운동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고 평했고 그녀가 세상을 떠난 뒤 다른 동료 운동가는 "저항 운동의 마지막 30년 동안 중요 결정 가운데 루스의 흔적이 없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는 말을 남겼다.

루스 퍼스트의 암살 임무를 맡은 남아공 경찰들이 그녀의 사망 소식을 듣고 자축했다는 보도는 지금도 남아 있다.

조 슬로보는 자기 자신은 물론 아내 루스 퍼스트가 끔찍하게 죽을지도 모른다는 걸 늘 예감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목숨을 걸고 남아프리카 공화국 정부를 상대로 싸우고 또 싸웠다. 정부는 저항하는 이들을 가두고 고문하고 무참히 살해했다. 조는 루스에게 조심하라고 일렀다.(...) 서둘러 연구소로 달려간 조는 두세 계단씩 뛰어 올라갔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고, 폭발로 인한 잔해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부서진 책상 뒤로 뭔가가 삐져나와 있었다. 루스의 발이 눈에 들어왔다. 가장 좋아하던 신발을 신고 있었다. 꿈쩍도 안 하는 것을 본 조는 아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67, 68p

넬슨 만델라가 정권을 잡은 새로운 남아공이 출범하자 데스몬드 투투 대주교가 이끄는 '진실과 화해 위원회'가 꾸려져 지난 정권이 저지른 범죄행위 조사에 착수했다. 이 위대한 위원회의 목적은 처벌이 아닌 기록이었다. 그 원칙에 따라 누구라도 자기가 저지른 행동을 공개적으로 진실하게 이야기할 경우 법적 책임을 사면받을 수 있었다.

루스 퍼스트에게 폭탄을 보내라고 명령한 경찰간부 크레이그 윌리엄슨과 실제로 폭탄을 제조한 로저 제리 레이븐은 자신들의 범죄행위를 낱낱이 증언한 대가로 사면받았다.

루스 퍼스트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루스 퍼스트와 조 슬로보는 어린 자녀들에게도 사실을 말하지 못한 채 쫓겨다니고 그러다 다시 체포되는 삶을 수 십 년 동안 살았다. 이들의 목표는 남아공이 인종에 구애받지 않는 국민 모두의 국가가 되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앞을 가로막는 모든 압제와 맞서 싸웠다. 이들이 아니었다면 아파르트헤이트와 맞선 건 오로지 흑인들의 업적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오늘날 남아공은 루스 퍼스트와 그녀의 희생을 완전히 잊은 듯하다. 집권 후 용서와 화합의 정신을 외친 만델라는 자유헌장의 정신을 계승한 핵심공약 토지분배와 주요기업 국유화, 무상 의료보험 정책을 백지화하며 논란의 중심에 섰다. 만델라가 2013년 사망한 뒤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리더십의 부재 속에서 남아공의 흑백갈등은 지속됐고 정치와 경제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만델라와 함께 아파르트헤이트 철폐에 투신했던 제이컵 주마 현 대통령은 올해로 여덟 번째 불신임과 탄핵국면을 겪는 수모를 당했다. 조국이 빈부격차와 범죄, 실업으로 멍들어가는 가운데서도 부적절한 사생활과 부패 스캔들이 멈출 줄 몰랐다. 그럼에도 남아공의 민주주의는 부패한 권력을 권좌에서 끌어내리지 못했다. 가치는 무너지고 사회는 퇴보한다.

영광은 사라지고 참담한 현실이 남아공을 뒤덮고 있다. 법전 위의 아파르트헤이트는 폐지됐지만 전체의 8.4%에 불과한 백인이 나머지 전체 흑인의 총 소득과 맞먹는 돈을 벌어들이는 흑백격차는 여전하다. 루스 퍼스트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루스 퍼스트의 위업 가운데 하나는 역사적인 자유 헌장을 만드는 데 기여한 것이다. 자유 헌장은 이런 선언문으로 시작된다.
"우리 나라는 물론 전 세계가 알아야 한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여기 사는 모든 사람들, 흑인과 백인 모두의 것이다. 만약 인민의 의지에 기반하지 않는다면 어떤 정부도 정당하게 권위를 주장할 수 없다." - 75p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김성호의 독서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반역자들 / 봄볕 / 조이 크리스데일 지음 / 손성화 옮김 / 2017. 3. / 12,000원>



아름다운 반역자들 - 역사에 도전한 여성 운동가

조이 크리스데일 지음, 손성화 옮김, 봄볕(2017)


태그:#아름다운 반역자들, #봄볕, #조이 크리스데일, #루스 퍼스트, #김성호의 독서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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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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