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캔 스피크> 스틸 사진
ⓒ 리틀빅픽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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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can speak."

나옥분(나문희 분)은 거듭해서 "나는 말할 수 있다"고 말한다. 비록 대사로서 "i can speak"는 딱 한 번 등장하지만, 그는 자신의 삶을 통해 끊임없이 증명하고 있었다. 아니, 말하고 있었다. 처음에 그것은 구청을 대상으로 한 '민원'이었다. 8000건에 달하는 민원 제기 덕분에 '도깨비 할매'라는 별명을 얻었고, 구청 직원들에겐 기피 대상이 됐다. 간단히 말해 '블랙리스트'였다. 동네 사람들을 '대신해서' 말을 했지만, 돌아오는 건 원망과 불평이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냐는 비아냥이었다.

다음에는 '영어'였다. 어렸을 때 입양을 가 한국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 친동생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 나옥분은 영어를 배워야 했다. 절실히 필요했다. 여기에서 명진구청에 발령받은 9급 공무원 민재와의 접점이 생긴다. 옥분은 원어민 수준으로 영어를 구사하는 민재에게 영어를 배우기로 하고, 민재는 옥분이 차려주는 뜨뜻한 저녁상을 통해 따뜻한 가족의 정을 느끼기 시작한다. 두 사람의 만남이 웃음과 훈훈함을 이끌어내는 시점에서 <아이 캔 스피크>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로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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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캔 스피크> 스틸 사진 ⓒ 리틀빅픽처스


이제 나옥분은 미국 하원에서 열린 공개 청문회에 서게 된다. 일본군 '위안부' 사죄 결의안(HR121) 채택을 위한 '증언'을 하기 위해서다. 오랜 친구이자 위안부 피해자인 정심(손숙 분)의 치매 증세가 심각해지면서 그의 짐을 나눠지기로 결심한 것이다. 국가와 사회, 심지어 부모조차도 그의 존재를 외면하고 숨기려 했기에 옥분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은 채 가슴 깊이 묻어둔 채 살아왔다. 그 때문에 옥분이 위안부였다는 공식 기록이 없었고, 일본 측은 이를 물고 늘어진다.

증언을 위해 단상에 선 옥분은 자신의 배에 난 칼자국과 욱일승천기 문신을 드러낸다. 그보다 더 명백한 증거가 또 어디에 있겠는가. 그리고 참혹했던 기억, 그 가슴 찢어지는 아픈 과거를 세상 앞에 증언한다. 그의 목소리, 일본을 향한 꾸짖음에는 힘이 실려 있다. 그건 외부를 향한 외침이기도 하지만, 홀로 외로이 고통스러운 기억들과 싸워왔던 자신을 향한 외침이기도 했다. 그럼으로써 소문자였던 'i'는 대문자 'I'로 바뀌게 된다. 주체성을 획득한 개인이 연대를 통해 더욱 강한 존재로 거듭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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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캔 스피크> 스틸 사진 ⓒ 리틀빅픽처스


<아이 캔 스피크>라는 영화가 우리에게 더할나위 없이 소중한 까닭은 여기에 있다. 피해자가 현존하는 상황에서 그들의 아픔을 어떻게 표현해 낼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상존할 수밖에 없는데, <아이 캔 스피크>는 옥분을 '피해자'에 묶어두는 게 아니라 우리의 '이웃'으로 그려나간다. 또, 옥분을 발화(發話)의 주체로 삼고, 연대의 중심축으로 그 존재를 확장해 나간다. 이러한 관점의 변화는 문제의 본질을 오히려 또렷이 드러내는 동시에 문제 해결의 해답까지 건네준다.

옥분은 함께 살아가는 시장 사람들에게 그러하듯, 스크린을 바라보는 우리를 향해 계속해서 질문한다. "하우 알 유? (How are you?)", "하우 해브 유 빈? (How have you been?)", "왓츠 업? (What's up?)" 안부를 묻는 질문을 받았으니, 남은 건 대답이다. 물론 첫 번째 대답은 "아임 파인 땡큐, 앤 유? (I'm fine thank you, and you?)"이겠으나, 아직까지 해결되지 못한 '일본군 위안부 문제'라는 역사적 문제 앞에 서 있는 우리는 그 다음 대답도 생각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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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석 감독은 "나문희 선생님과 이제훈의 조합이 백번 옳았다"고 자신의 판단을 자평했다. 관객의 입장에서도 그 조합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나문희를 캐스팅한 건 더할나위 없는 훌륭한 결정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가볍게 느껴질 수도 있었던 전반부가 희로애락을 갖춘 휴먼 드라마로 힘을 받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은 오로지 나문희라는 배우에게서 나왔다. 또, 비장의 카드처럼 숨겨뒀던 영화의 본 주제로의 갑작스러운 전환이 어색하지 않았던 것도 결국 나문희라는 배우의 설득력 덕분이었다.

언론 시시회에서 "내 나이에도 주인공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 이 기분은 해본 사람만이 알 거다. 사실 부담도 걱정도 많았지만 끝까지 해냈다는 점에 뿌듯하다"며 소감을 표현했던 나문희는 데뷔 57년 차를 맞이한 대배우다. 여성 캐릭터의 부재(를 넘어 상실)라는 구조적인 문제에 직면한 한국 영화에 있어 배우 나문희의 존재는 예외에 속한다. 그는 꾸준히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쌓아 왔는데, 그는 남자 배우에 의존하기보다 자신만의 매력을 어필하는 방식으로 관객들을 만나왔다.

<권순분 여사 납치사건>(2007), <걸스카우트>(2008), <하모니>(2009), <수상한 그녀>(2013)는 나문희의 매력이 한껏 발휘했던 작품들이다. 또, 그는 MBC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남편과 며느리에게 무시를 당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거침없이' 반격에 나서는 코믹한 모습을 연기했는데, 그를 '국민 할머니'라 떠올리게끔 만든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tvN <디어 마이 프렌즈>에서는 가족들의 뒷바라지로 평생을 바치다 '독립'을 선언하는 정아 역을 맡아 시청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한편 카타르시스를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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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보면 배우 나문희에게는 '가부장제'라는 전통의 질서를 순응한 채 그 안에 머무르는 캐릭터가 존재하는가 하면, 동시에 이를 전복시킬 수 있는 가능성과 힘이 내재돼 있다는 생각이 든다. 또, 무슨 말이나 요구라도 다 들어줄 것 같은 따뜻한 엄마이자 할머니인 동시에 불합리와 부조리에 두 팔 걷어 맞서는 단호하고 당찬 여성이 함께 보인다. <아이 캔 스피크>의 김현석 감독은 나문희 속에 담겨 있는 다양한 이미지와 캐릭터를 절묘히 포착했고, 나문희는 그 기대에 100% 부응했다.

<아이 캔 스피크>는 누적 관객 수 240만 6163명을 돌파(10월5일 기준)하며 추석 연휴 기간동안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주연 배우로서의 가능성을 다시 한번 확인한 나문희가 앞으로 어떤 작품으로 다시 찾아올지 벌써부터 가슴이 설렌다. '위대한 배우' 나문희의 연기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70편이 넘는 드라마, 20편이 넘는 영화에서 배우로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왔던 나문희의 도전은 이제부터 시작일 것이다.

아이 캔 스피크 나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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