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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에 누워 눈을 감으면 기차 앞에 뛰어들기, 추락사, 약물, 자해 등의 구체적 상황이 자꾸만 머릿속을 스쳤다. 죽으면 이 고통이 끝난다고, 귓가에 악마가 속삭였다. 남겨질 가족에게 미안하고 자살할 만큼 폭력에 무감각하지도 못해서, 사고로 죽게 해달라 기도도 해봤다. 신은 내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았다. 여행중 이토록 심각한 우울증이 수차례 찾아오리라 예상하지 못했다. 우울한 영국 날씨만 탓하기엔 정도가 심했다.

일기장을 펴고 우울증 분석을 시작했다. 첫 번째 이유, 외로움. 여행 중에 외로움은 나를 잠시 떠났다가 돌아오길 반복했다. 남미에서 외로움으로 시작한 어두운 감정은, 미국에서 우울증으로 번졌고, 영국에 와서는 자살 충동이라는 극단적 감정에 이르렀다.

외로움은 혼자 하는 장기 여행의 치명적 단점이다. 새로 옮긴 장소마다 다른 사람의 신뢰를 얻기 위해 나를 입증하는 일이 피곤했다. 커피를 못 마신다는 사소한 것부터, 나는 외향적으로 보여도 사실은 내향적인 사람이라는 내면의 이야기, 내가 여행을 떠난 이유 등 매번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게 지겨웠다. 농장이나 공동체에 가면 최소 10명부터 100명까지 수많은 사람의 이름을 외우는 일에 2~3일이 걸렸다. 이름, 얼굴 외우고, 자주 만나는 한두 사람의 대략적인 성격이 파악될 때쯤, 떠나야 했다.

영국의 농장에서 일하는 중 우울증이 극에 다다른 어느 날, 저녁 밥상에서 만난 지 이틀 된 영국 청년에게 "나 요즘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어. 내일 아침에 울지 않고 웃으며 일어나는 게 목표야" 라고 했다. 뭔가 위로의 한마디라도 듣고 싶었지만, 그 청년은 난처해 하는 표정만 지을 뿐,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잘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난 행복한 사람이야'라는 가면을 쓰고 속마음을 숨기며 이야기 해야하는 걸까. 신뢰가 쌓이지 않은 사람에게 깊은 속내를 보여주긴 어려웠다.

나와 맞지 않는 타인의 눈치를 보며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어야 할 때도 있었다. 여행도 삶의 일부였다. 농장 호스트들의 눈치를 보고, 내 속에 쌓인 불만이냐 하고 싶은 이야기는 접어 둔 채 입 다물고 있기도 했다. 3월에 있었던 볼리비아의 농장 주인 부부에게 빈대에 물렸으니 도와 달라고 했다. 백 군데 가까이 빈대 자국이 번졌고, 온몸이 가려웠다. 농장에 있는 사우나를 가동해 내가 가진 모든 소지품을 소독하면 빈대는 금방 사라질 게 분명했지만, 농장 주인 부부는 사우나를 한번 켤 때마다 장작을 많이 소비해서 부담스럽다며 거절했다. 속으로 엄청 욕을 했지만, 겉으로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끝냈다.

두 번째 이유, 출구 없는 함정에 빠진 기분이었다. 20살 때부터 30살인 지금까지, 내 연애는 첫사랑을 제외하고는 1개월을 넘지 못했다. 연애를 시작하면 연애의 설렘과 동시에 강박증세, 불안, 불면증도 덩달아 찾아왔다. 왜 그런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내 안에 넘쳐 나는 어두운 감정의 기운이 상대에게 전달돼서였을까, 늘 한 달쯤 지나면 차였다.

내 나이 30, 주변 친구들은 결혼하고 엄마가 됐다. 웨딩드레스 입은 친구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겉으로는 축하해줬지만, 속으로는 울고 있었다. 내 차례는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았다. 결혼식 사진, 아기 사진이 자주 올라오는 페이스북 계정은 팔로우 하지않았다. 한국에서 여자에게 결혼이란 자기 정체성을 포기하고 가부장제로 편입되는 일임을 알고 있지만, 내 편 들어주고 나랑 같이 늙어갈 사람이 있으면 하는 바람, 내게 안정감을 줄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바람은 쉬이 꺼지지 않았다.

긴 여행이란 불안하기 짝이 없는 일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나면, 10년동안 망친 연애 문제도 해결되지 않을까 기대했다. 영국에 도착한 지 며칠 안 되어, 공동체 생활 중 만난 청년과 연애를 했다. 긴 여행에 지쳤고, 내가 좋다며 내 눈을 바라보며 배시시 웃는 그 사람 앞에서 마음이 녹았다. 나혼자 모든 걸 다 해내지 않아도 되고, 누군가에게 기댈 수 있다는 건 안심되고, 기분 좋은 일이었다. 몸에 알 수 없는 두드러기가 났을 때, 며칠 동안 내게 '고집 그만 부리고 병원 가자'라고 말해주고, 알레르기 원인을 검색해보며 날 걱정해줬다.

이 연애 역시 한 달쯤 되자 버거웠다. 강박증세, 불안이 점점 커졌다. '이 사람도 결국 날 떠나겠지, 혹시 다른 여자가 있는 건 아닐까, 내 몸만 원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밥을 먹다가도, 화장실에서도 수시로 떠올랐다. 결국, 난생처음 내가 먼저 이별을 이야기했다. 그는 한 번도 매달리지 않고 이별을 받아들였다. 내심 매달려 주기를 바랐기에, 그의 쿨한 태도에 마음이 무너졌다.

이별 후 일주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울었다. 밥을 먹다 가도,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샤워 하다가, 눈물샘이 터졌다. 그사람이 그리워서 울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10년째 비슷한 연애를 반복하며 실패하는 내 모습이 지겨워서였다.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연애는 가이드라인도, 매뉴얼도 없고, 치료 약도 없다. 시간이 해결해 준다고 흔히들 말하지만, 난 10년째 제자리였다. 10년을 해도 안 됐다면 연애를 포기할 만도 한데, 하필 나는 '금사빠'였다.

내면을 들여다보니 10년간 만난 사람들을 향한 분노, 잘못된 사람을 만나고 똑같은 방식으로 연애를 망친 나 자신을 향한 깊은 분노가 차곡차곡 쌓인 상태였다. 이 글을 쓰고 다듬던 날에, 전 남자친구들을 꿈에서 만나 한바탕 싸우길 반복했다. 사랑받고 싶은 갈망이 커지고 연애 가능성이 줄어드는 나이에 다다를수록, 나 자신과 과거의 사람들을 향한 분노의 수위, 조바심만 더 깊어졌다.

연애를 시작할 때마다 우울증과 강박증도 같이 찾아온 이유는, 내면이 보내는 경고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도 과거에 매여 화가 나 있는데, 왜 자꾸 다른 사람을 만나. 또 상처받고 화날 일 생기면 안 되니까빨리 그만둬. 나를 보호해야 해' 라는 신호였을까. 일단 분노부터 풀어야, 뭐가 문제였는지 알 것 같았다.

세 번째 이유, 자꾸만 모든 생각의 중심이 내 자신에게만 향했다. 우울증이 심각하게 발병한 곳은 올드 채플 농장에서였다. 아침 회의시간, 점심시간, 저녁 시간 같이 사람들과 어울려 이야기해야 하는 시간에가뜩이나 대화는 영어로 진행되는데, 대화에 집중하지 못했다. 나도 모르게 식탁에 앉아 '왜 난 연애를 자꾸 망친 거야', '왜 난 자꾸 불안하지', '한국 돌아가면 어떻게 먹고 살지', '난 무슨 일을 하면 행복한 거지' 식의 자아 성찰적 생각을 떠올렸다. 대화에 끼지 못하고, 자꾸 혼자 고립됐다. 가뜩이나 힘든 올드 채플 농장의 일, 일에 집중하지 못해 실수 연발이었다.

주변 사람들을 관찰하거나, 일에 집중하고 싶었다. 여행 중이니 처음 와보는 낯선 환경에 푹 빠져 있을 수도 있었다. 에너지를 밖으로 내보내고 싶었다. 끝도 없고, 답도 없는 자아 성찰적 생각이 부담스러웠지만, 한번 시작된 생각의 흐름은 바뀌지 않았다. 10대 때 끝냈어야 할 것 같은 자아 찾기를 30대에 와서도 하는 나 자신이 한심했다.

60대 지인이 페이스북으로 연락을 했다. "자아 찾기 여행은 사실 끝이 없어. 하지만 그게 꼭 고통스러운 일일 필요는 없어." 믿기지 않는 말이었다. 자아 찾기 여행이 죽는 날까지 끝나지 않을 거라는 것도, 그게 꼭 고통스러운 일일 필요는 없다는 말도. 내가 왜 화가 났는지, 뭐 때문에 자꾸 같은 실패를 반복하는지 성찰하는 일이 힘들 필요가 없다니? 나 자신을 향한 답 없는 고통스러운 질문을 끝내고 싶었다.

네 번째 이유, 이제 빼도 박도 못하는 비규범적 삶을 어쩌다 보니 살게 됐다. 그게 늘 달갑게 느껴지지 않는다. 보통 사람들은 20대 중반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한 후 30대에 결혼을 한다. 그 뒤로는 자녀 부양을 하고, 자녀가 다 크면 은퇴준비를 한다. 비혼일 경우 워커홀릭이 되기도 한다.

대학 졸업 후, 계획에도 없던 게스트하우스를 창업했다. 사업은 잘 됐지만, 치열한 경쟁과 과도한 업무량에 지쳤다. 5년 후, 난데없이 30살에 세계 일주를 떠났다. 여행을 떠나긴 했지만, 사실 세계일주 후에 뭘 하고 먹고 살지 생각하면 막막하다. 어쩌다 보니 내 삶은 예상한 대로 기획되지 않았고, 문뜩 돌이켜 보니 나는 사회의 가장자리 밖으로 밀려나는 듯했다.

규범적 삶의 범주에 들어가고 싶다면 지금도 늦지 않았다. 연애나 결혼은 못 해도 커리어를 통해 공무원 준비를 하거나, 뭐라도 기술을 배운다거나, 적성과 흥미에 상관없이 신분세탁용 목적만을 위해 대학원에 진학할 수도 있다.어떤 사람이 되겠다는 마음보다는, 전문직 여성 같이 어떤 자리에 오르고 싶다는 마음으로 남들 보기에, 부모님 보기에 그럴 싸해 보이는 일에 도전하기에 아주 늦지는 않았다.

어쩐 일인지 마음이 그렇게 먹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비규범적 삶을 사는 게 마냥 즐겁지도 않다. 이 여행을 떠나며 쓴 '여행출사표'란 글에는 '대안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을 만나서 괴짜같은 인생을 살아도 죽지 않는다는 확신을 쌓고 싶다, 마음이 설렌다'라고 썼지만, 9개월의 여행 동안 즐거운 마음과 불안한 마음이 교차했다.

사회의 문법과 틀린 삶, 경계선에 있는 삶을 살고, 그 와중에도 밥 벌기 위해 임금 노동을 해야 한다. 난 그저 나와 타자를 위한 공부를 하고, 나와 타자의 이야기를 글로 쓰고, 글쓴 대로 살고 싶을 뿐이다. 그게 현재 내가 하고 싶은 유일한 일이다. 아마도 돈은 되지 않겠지만.

우울증 발병 1주일이 조금 넘었다. 병이 발병한 곳은 영국이었고, 글을 마무리하는 곳은 덴마크 코펜하겐이다. 파란 하늘에 햇살이 가득한 코펜하겐의 가을 날씨 덕인지, 돈 걱정하지않고 입고 싶고, 먹고 싶은 것 마음껏 산 덕분인지, 1주일 사이 병세는 제법 호전되었다. 울지 않고 아침에 일어나고, 극심한 자살 충동도 많이 사라졌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나아진 것도 아니고, 나아진다 해도 병은 언젠가 또 내 삶에 은근슬쩍 찾아올 것 같다. 기획한대로 흐르지 않는 삶 앞에서 우울증에 빠져 좌절하지 않고, 유연하게 웃으며 '이게 인생이지, 어디 한번 상황 되는대로 헤쳐 나가 보자' 하며 너털웃음 지으며 살 수 있다면 좋겠다.


태그:#세계일주, #우울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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