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윈드 리버>

영화 <윈드 리버> 포스터 ⓒ 유로픽쳐스


정치적으로 옳은(politically correct) 영화를 만드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소위 '마이너리티' 라 일컬어지는, 여성, 유색인종, 노동계급 등의 이슈를 전면에 다루는 영화라면 특히 그러하다. 감독이나 창작자가 '마이너리티'에 속하지 않는 주체일 때 위험부담은 더 커진다.

'가진 자'의 입장에서 '가지지 못한 자'를 그리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무모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백인 미국 출신의 감독이 네이티브 인디언에 관한 영화를 만든다면 회의적인 시선으로 영화를 바라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최근 개봉한 <윈드 리버>는 그런 영화다. 백인 감독(<시카리오> 의 테일러 쉐리든)이 백인 남성 주인공(제레미 레너)을 앞세워 인디언 커뮤니티 안팎에서 일어나는 비극과 사회적 방임을 그린다. 그러나 <윈드 리버>는 가진 자의 낯간지러운 회개 정도로 자위(自慰)하지 않는다. 대신, 신랄한 자기비판과 성찰적 태도로 비틀린 역사를 참회하고자 고군분투한다.

설원으로 뒤덮인 와이오밍에 위치한 인디언 보호구역, '윈드 리버'의 유일한 백인이자 야생 동물 헌터 코리는 사냥을 나갔던 어느 날 인디언 여성 시체를 발견한다. 죽은 여성은 코리의 친구 딸임과 동시에 비슷한 사건으로 몇 해 전 죽은 그의 딸의 친구로 밝혀진다. 이 사건으로 신참 여성 FBI 요원 제인이 파견되고, 제인은 지역 토박이인 코리에게 수사 협조를 요청한다.

 영화 <윈드 리버>

영화 <윈드 리버>의 코리와 제인 ⓒ 유로픽쳐스


유려한 캐릭터들: 고질적 스테레오 타입을 넘다

일반적으로 남성과 여성 캐릭터가 사건을 해결하는 메인 축으로 등장하는 경우(<나잇 앤 데이> <피스 메이커> 등) 남녀의 기능이 전형적으로 양분된다. 육체적이고 액티브한 기능을 남성 캐릭터가, 감성적이고 지능적인 기능을 여성 캐릭터가 수행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러한 경우 대부분남녀 캐릭터가 가진 권력 차를 확연히 드러내는 선에서 그친다. 예를 들어, 감정적으로 연연하는 여성 캐릭터를 이성적인 남성 캐릭터가 액티브하게 리드하는 양상으로 말이다.

이러한 '기능의 분리'는 <윈드 리버>에서도 수용되지만 작품은 훨씬 더 진보한 인물 관계를 보여준다. 코리는 신속하고 파워풀하다. 그는 적재적소, 자신의 존재가 필요한 곳에 주저없이 몸을 던진다. 자식을 잃은 상처가 있지만 그의 비애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반대로 제인은 여리고 예민하다. 악을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두려워하면서도 피해자들에 대한 연민으로 괴로워하고 이에 앞선다. 그러나 이러한 전형성이 <윈드 리버>에서는 '정치적인 옳음'을 해하지 않은 한에서 전략적이고도 효율적으로 설정되어 있다. 다시 말해 그러한 전형성이 남녀 캐릭터를 분리하고자, 혹은 능동적 vs. 수동적 인물의 권력적 상하구조를 전시하며 기능하는 것이 아닌, 상이한 두 캐릭터가 어떻게 비극적 사건 앞에서 각자의 면모를 극대화하여 융합하는 가를 보여주는데 활용되기 때문이다.

백인과 인디언의 설정에서도 이 영화만의 유려하고도 도덕적인 전략이 드러난다. 숱한 서부 영화나 역사 영화에서 보이는 인디언의 캐릭터는 주로 '영적인(spiritual) 존재'(예 <늑대와 함께 춤을> <가을의 전설>)이거나 백인 히어로에게 주도권을 (자발적으로) 양도하는 나이브(naïve)한 인물들(예 <제로니모>)로 이들의 공통점은 철저히 탈(脫)세속화 되었다는 것이다.

인디언들의 탈 세속화는 <윈드 리버>에서도 존재하는 요소다. 사건을 담당하는 윈드 리버 지역 보안관 벤은 시종일관 사건 해결에 방관적 태도를 보인다. 늘 그랬듯, 외부 사람 누구도 인디언 구역 내의 사건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살해된 여성의 오빠인 '칩'은 그들의 무리와 함께 마약에 찌들어 있고 사회적 재기를 거부한다. "자신들을 밀쳐내는 사회"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 인물들은 인디언들의 탈 세속성이 그들의 선택이 아닌 사회적 강요와 분리 정책의 실패인 것을 방증하는 셈이다.

 영화 <윈드 리버>

영화 <윈드 리버> ⓒ 유로픽쳐스


혹자는 영화에서 궁극적으로 '인디언 사건'을 해결하는 인물이 백인 남녀라는 사실을 그간 인디언들을 다룬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이 작품의 한계로 지적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윈드 리버>의 코리와 제인은 해결사임과 동시에 피해자다. 코리는 비슷한 사건으로 (인디언 아내와 결혼해서 낳은) 딸을 잃었고, 제인은 백인 가해자 무리들로 부터 총격을 당한다. 이들은 인디언 학살과 차별을 다룬 선례의 영화들처럼 인디언들에 대한 연민과 영웅적 의식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닌, 아버지로서, 여성으로서 가해자들의 극악무도함에 경악하고 도의적 명분으로 이들을 처단하는 것이다.

<윈드 리버>는 보기 쉽지 않은 영화다. 사건의 미스터리가 윤곽을 보이면서 설마 그랬을까 하는 추측은 잔인하게도 맞아떨어진다. 140여 분의 러닝타임이 길지 않음에도, 영화가 주는 피로도는 3시간짜리 에픽 영화에 준한다. 영화가 던지는 문제의식과 인물들이 겪는 윤리적, 감정적 갈등도 그렇거니와 영화가 펼쳐지는 배경, 즉 사방이 눈으로 덮인 설원은 관객이 목도해야 할 사건 만큼이나 잔인하게 느껴진다.

설원의 극악무도함

<러브 스토리>에서 제니와 올리버가 서로를 덮어주던 눈은 참으로 낭만적인 그것이었지만, 사실상 많은 영화에서 눈은 잔인하고 기만적이다. 비극의 참상을 감쪽같이 품어낸다. <헤이트풀 8> <레버넌트> <윈터스 본> 등에서 진저리가 나도록 등장했던 눈과 설원은 살인과 절망이 난무하는 장(場)이자, 그것들을 뻔뻔히도 덮고 있는, 시체 위의 시트 같은 것이다.

 영화 <윈드 리버>

영화 <윈드 리버> ⓒ 유로픽쳐스


영화의 배경인 윈드 리버는 실제로 1868년에 지정된 미국의 인디언 보호구역이다. 말이 '보호구역(reservation)'이지, 인디언 분리 지역(segregated district)으로 칭해야 옳을 듯하다. 1800년대 말에 인디언을 고립시키고 사회에서 배제하고자 하는 정책이 활성화되면서 미국 전역의 불모지에 인디언들을 강제 이주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윈드 리버>가 전달하는 인디언들의 마약문제와 강간 사건 등은 2000년대에 들어 본격적으로 조명되기 전까지 긴 시간 동안 '덮여있던' 이슈들이다. 그렇기에 눈은 영화에서 시체와 사건을 덮고 있는 필연적 장치임과 동시에 '인디언 이슈들'을 덮고 있는 미국사회의 제도적 병폐와 기만적 태도에 대한 메타포이기도 하다. <윈드 리버>는 캐릭터, 주제의식, 배경의 세 요소가 모자라거나 과함 없이 신랄하게 맞아 떨어지는 미스터리다. 또한 바라건대, 현 세대가 200년 전으로 보내는 묵상(默想)이자 참회록이기도 하다. 

윈드 리버 제레미 레너 미스테리 헐리우드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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