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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자식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을까마는 자하 신위(申緯)의 자녀 사랑은 유별나다. 일찍이 창강 김택영에 의해 조선 오백년 역사상 최고의 시인으로 칭송되었던 자하는 16세 되던 해인 1784년, 예조좌랑 송하 조윤형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32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첫 딸을 얻었다. 무려 16년 만에 얻은 딸이니 그야말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금지옥엽이었다.

이 딸이 자라 혼인할 때가 되자 자하는 아예 데릴사위를 구해 딸 부부를 집에 들여앉혔다. 사위로 낙점된 이인영은 전주이씨 광평대군의 후손으로 자하와 친하게 지냈던 죽소공 이일연의 조카였다. 서울의 명망가가 아닌 향리 출신으로 평소 잘 아는 집안의 차남을 사위로 맞아들인 까닭은 평생 딸 부부와 함께 살 생각에서였다.

실제로 자하는 한양 장흥방 집에서 딸 부부와 함께 살았으며 1818년 춘천부사로 부임할 때도 두 사람을 대동했다. 그러나 1827년 부인 조(曺)씨가 죽고 그 반년 후에 사위 이인영의 아버지와 형이 잇달아 죽는 바람에 딸 부부 역시 본가로 돌아가게 되어, 딸과 함께 살고자 했던 그의 꿈은 중도에 끊기고 말았다.   

측실 조(趙)씨에게서 장남 명준이 태어난 것은 자하의 나이 35세 때인 1803년이었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1813년에 자하는 황해도 곡산부사로 부임하게 되는데 이 때 아들 명준을 데리고 갔다가 한양으로 돌려보내면서 쓴 <동파 공의 운을 따서 장남 팽석에게 부침(寄男彭石。用坡公韻)>이라는 시를 보면 홀로 먼 길을 떠나는 열 살짜리 어린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애끊는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팽석은 명준의 어렸을 때 이름이다.

"보잘 것 없는 벼슬살이에 집 그리는 나그네요
맑은 가을 임금 곁을 떠난 신하로다
둘이 함께 왔다가 너 먼저 떠나보내니
애비만 홀로 남아 돌아가지 못하고 있구나

석양에 널 보낸 곳 바라보며
멍하니 앉았다보니 어느덧 새벽별 성긴데
험난한 산길 묵묵히 헤아려보니
널 태우고 간 말 돌아와야 마음 놓이겠구나 

관청의 말은 먼 길에 꾀부릴 테고
사방 들판엔 풀벌레 소리만 가득하겠지
어린 아이 감당하기 힘든 길인걸
어찌 채찍이나 잡을 줄 알겠느냐?

밤비가 물동이를 쏟아 붓는 듯하니
어디서 검을 구해 구름 흩어 버릴꼬?
고단한 여행길 이 애비 생각하며 
어느 고을 점막에서 울며 뒤척이고 있겠지 

텅 빈 관사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말 한마디 주고받을 이가 없구나
그리운 건 오로지 살붙이뿐이니
벼슬이고 뭐고 당장 때려치우고 싶구나"

사실, 자하 때만 해도 정실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했을 경우 비록 측실에게서 얻은 자식이 있다할지라도 가문의 보존을 위해서 양자를 들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서얼들은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없고 관직에 오른다 해도 대부분 무관으로 미관말직을 전전하는 것이 현실이었으므로 서얼에게 가문을 맡기는 것은 곧 가문의 몰락을 방치하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자하는 이런 당시의 현실에 반기를 들었다. 그는 "나는 다만 내 자식만을 알뿐, 가문 따위는 알지 못한다"라고 하여 측실 조(曺)씨에게서 난 아들 명준을 적자로 삼아 제사를 이어받게 하였으며 또 아들과 사위의 이름을 모두 족보에 올렸다. 이 당시 대부분의 서얼들이 족보에도 오르지 못했음을 감안하면 자하의 이런 행동은 가히 파격적이라 할 수 있다.

자하가 1820년 춘천부사 직에서 물러난 후 쓴 시를 묶은 <벽로방별고> <잡서(雜書)> 50수에는 서얼 차별에 대한 그의 불만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재주 있는 자들 쓰이지 못함이 어찌 하늘의 뜻이랴?
혁혁한 가문들이 백성의 앞길 가로막고 있네
사해(四海) 구주(九州) 천만 년 이래로
서선(徐選), 저 같은 사람 다시는 없으리라
(有才不用豈天意。烜爀家門禁錮民。四海九州千萬古。再無徐選這般人。)"

서선은 조선 태종 때의 문신으로 서얼금고법(庶孽禁錮法)을 제정하게 만든 인물이다. 늘그막에 벼슬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두 아내와 자식들 거느리고 오순도순 살고 싶었던 자하였지만 불행하게도 두 아내는 물론 장남 명준, 삼남 명우, 사남 명두와 차녀 등 가족 대부분이 그보다 먼저 죽었다. 자하는 결국 차남 명연의 시봉을 받다가 79세를 일기로 사망했는데 그 장소는 장흥방 본가가 아닌 명연이 현감으로 있던 충청도 결성현이었다.

창강 김택영이 연보를 작성하면서 자하가 77세 때인 1845년 한양의 장흥방에서 죽었으며, 자하동 선영에 장사지냈다고 기록한 것이 한 때 혼선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으나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자하는 79세 때인 1847년 차남 명연이 현감으로 있던 충청도 결성현에서 사망하였으며 그 묘가 결성 수룡동 임좌(壬坐)에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조선왕조실록> 헌종 13년 정미(1847) 10월 11일(정사) 조에, "어사의 서계로 결성 현감(結城縣監) 신명연(申命衍) 등을 차등을 두어 죄주었다"라는 기록이 있고, 또 헌종 14년 무신(1848) 1월 10일(을유) 조에 영의정 권돈인이 신명연의 무죄를 고하면서, "호서 수의가 전(前) 결성 현감(結城縣監) 신명연(申命衍)을 논한 데에 '책실(冊室)에서 정사에 간여했다.'고 하였으나, 들은즉 그 수령(守令)은 고을살이 이래로 전후에 책실에 있던 다른 사람은 없었고 다만 그 아비가 관아(官衙)에서 봉양되었을 뿐이라 합니다"라고 한 것이 그 증거이다.

사실 자하의 죽음에 관해서는 미스터리한 부분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살아생전에 4500여 편의 시를 남긴 대 시인이지만 그 흔한 행장이나 묘표 하나 없으니 이를 어찌 해석해야할지 고개가 갸우뚱거려진다. 끝내 양자를 세우지 않고 서자 명준과 명연을 후사로 삼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가 늘그막에 심취했던 불교 사상의 영향 때문인지 그도 저도 아닌 우리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렇더라도 한 가지 분명한 점은 그가 정실 소생이건, 측실 소생이건 간에 그 자녀들을 진심으로 사랑했으며 자신의 안위와 가문의 명예에 연연하기 보다는 사회적 편견과 제도의 잘못에 맞서 자녀들을 지키고 보호하려 했다는 것이다.

자하는 흡사 일기를 쓰듯 시를 썼다. 삶이 곧 시였고 시가 곧 삶이었다. 그는 살아서 이미 자신의 시집을 완성하였고 4500여 편의 시 속에 자신의 인생역정과 예술세계를 고스란히 담아놓았다. 남아있는 시를 통해 그의 삶을 한눈에 꿰뚫어 볼 수 있으니 어쩌면 처음부터 행장이니 묘표니 하는 것들은 필요치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직 자하의 시는 어렵다. 최근 몇 권의 번역서가 나오기는 했으나 그 깊고 그윽한 시세계를 이해하기에는 아직 우리의 지식이 너무 얕다. 흡사 종지로 바닷물을 재는 수준이라고나 할까? 하루빨리 자하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고대해본다. 멀리 관악산 아래로 노을이 붉게 물들었다.

2017. 10. 1. hyunhaedang
자하의 묵죽도 화제는 송나라 때 시인 황정견의 「제죽석목우(題竹石牧牛)」를 취하여 쓴 것이다. “돌은 내가 심히 아기는 것이니 소로 하여금 뿔을 갈게 하지 마라. 뿔 가는 것은 오히려 나을지니 소싸움 시켜 내 대나무 다치게 하지 마라. 자하 칠십이 노인(石吾甚愛之, 莫遣牛礪角。牛礪角猶可, 牛鬪殘我竹。紫霞七十二?”
▲ 자하의 묵죽도 화제는 송나라 때 시인 황정견의 「제죽석목우(題竹石牧牛)」를 취하여 쓴 것이다. “돌은 내가 심히 아기는 것이니 소로 하여금 뿔을 갈게 하지 마라. 뿔 가는 것은 오히려 나을지니 소싸움 시켜 내 대나무 다치게 하지 마라. 자하 칠십이 노인(石吾甚愛之, 莫遣牛礪角。牛礪角猶可, 牛鬪殘我竹。紫霞七十二?”
ⓒ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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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등산사연구회 이사이며 월간<마운틴>에 '북한산 인문기행'을 연재하고 있다.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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