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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28일 타계한 저명한 캄보디아 건축가 완 몰리완의 젊은 시절 모습 프랑스유학파출신인 그는 1950~60년대 캄보디아의 새로운 건축 르네상스시대를 연 대표적인 건축가였다. 그의 죽음을 많은 캄보디아국민들은 슬퍼하고 있다.
▲ 지난 9월 28일 타계한 저명한 캄보디아 건축가 완 몰리완의 젊은 시절 모습 프랑스유학파출신인 그는 1950~60년대 캄보디아의 새로운 건축 르네상스시대를 연 대표적인 건축가였다. 그의 죽음을 많은 캄보디아국민들은 슬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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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60년대 캄보디아 건축문화 르네상스시대를 이끌었던 저명한 건축가 완 몰리완이 지난 9월 28일 오전 9시 45분(현지시각) 향년 91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2세기 앙코르제국시대 이후 캄보디아 제2부흥기를 맞이한 시절 그는 '신 크메르 건축문화(New Khmer Architecture)'를 선도했던 천재적인 건축가였다.

그의 사망 소식을 접한 수많은 캄보디아국민들이 페이스북 등 'SNS'을 통해 애도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 훈센 총리를 비롯해 미국대사관과 프랑스대사관도 이날 위대한 건축가의 죽음을 위로하는 메시지를 발표했다. 미국대사관은 금년 말까지 전시회를 열어 완 몰리완의 작품 세계와 사진 자료들을 일반인들에게 공개할 예정이다.

30대 건축가가 주도한 '신 크메르 건축 시대'

 프랑스식민통치시대를 벗어나 새로운 국가건설에 박차를 가하던  노로돔 시하누크 국왕은 도시개발계획의  최적 책임자로 프랑스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완 몰리완을 선택했다. 시하누크국왕은 완 몰리완에게는 평생의 후원자였다. (좌로부터 완 몰리완의 스위스출신 부인, 완 몰리완, 노로돔 시하누크 국왕)
 프랑스식민통치시대를 벗어나 새로운 국가건설에 박차를 가하던 노로돔 시하누크 국왕은 도시개발계획의 최적 책임자로 프랑스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완 몰리완을 선택했다. 시하누크국왕은 완 몰리완에게는 평생의 후원자였다. (좌로부터 완 몰리완의 스위스출신 부인, 완 몰리완, 노로돔 시하누크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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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11월 23일 수도 프놈펜에서 약 150km 떨어진 캄폿주 작은 마을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프랑스 국비유학생으로 선발돼 1946년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두뇌가 명석했던 그는 명문 소르본느대학 법학과에 입학했지만, 건축예술 분야에 남다른 소질과 적성이 있음을 발견한 그는 에꼴 데 보자르 예술학교로 옮겨 건축학을 공부했다. 

스위스-프랑스계 마더니즘 건축의 대가로 알려진 르 코르비슈의 영향을 받게 된 그는 졸업과 동시에 파리에 있는 건축사사무실에 취직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신의 조국이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맞이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1953년 11월 9일이었다.

3년 후인 1956년 그는 짐을 싸 들고 무작정 고국에 돌아왔다. 하지만, 그가 수도 프놈펜에서 할 일이 별로 없었다. 그의 말처럼 당시 캄보디아는 '건축설계'라는 개념조차 정립이 안 되었던 시절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마치 운명과도 같은 천운이 찾아왔다. 당시 독립의 아버지로 추앙받던 노로돔 시하누크국왕의 부름을 받게 된 것이다. 그는 총리를 따라 국왕을 알현하기 위해 이른 아침 왕궁 문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처음 만난 국왕의 모습은 파자마 차림이었다. 당시 국왕의 모습을 그는 나이 80을 넘어서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국왕은 그 자리에서 나이 30살에 불과한 젊은 건축가에게 도시건축설계를 책임져달라고 부탁했다. 그로선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순간 그의 얼굴에 자신감에 가득 찬 미소가 번졌다.

국왕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그는 수도 프놈펜뿐만 아니라 캄보디아 전역 도시건축설계 책임자로 나서 국가 차원의 거대한 프로젝트를 하나씩 완성시켜 나갔다. 그의 손끝에서 독립기념탑, 올림픽스타디움, 부채모양을 한 짜토목국립극장, 바삭국립극장, 관방부 건물 등이 완공됐다. 해안도시 시하누크빌과 끼리룸에도 그가 지휘 책임을 맡은 신도시들이 건설됐다. 대도시뿐만 아니라 국가 전체가 크메르전통양식과 현대조형예술이 접목된 새로운 스타일의 신 크메르 건축 조형물들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국왕으로부터 행정과 기획능력까지 인정받아 그는 정부고위관료로 등용됐다. 건설교통부 차관에 올라 도시계획설계책임자라는 중책을 맡고 국가전체를 총괄하는 각종 인프라 및 신도시개발사업에도 참여했다. 왕립예술대학(RUFA)까지 설립한 그는 1967년 교육부 장관 자리까지 오르게 된다.

 그가 건축가로서 가장 많은 열정을 쏟고,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프놈펜 올림픽스타디움의 모습. 자타가 인정하는 캄보디아 건축물중 최고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다만 십 수년전 대만계기업에 팔려 언제 사라질 지 모르는 운명에 처해 있다.
 그가 건축가로서 가장 많은 열정을 쏟고,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프놈펜 올림픽스타디움의 모습. 자타가 인정하는 캄보디아 건축물중 최고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다만 십 수년전 대만계기업에 팔려 언제 사라질 지 모르는 운명에 처해 있다.
ⓒ 박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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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수도 프놈펜 바삭강에 인접한 대규모 주거단지의 모습.  1960년대초 수도 프놈펜에 지어진 주거단지의 모습. 건축가 완 몰리완은 국왕의 전폭적 지원아래  도시개발에 나섰으며, 공무원용 아파트를 포함한 대규모 주거단지조성사업과 지금은 화재로 사라진 바삭 국립극장(아래 사진)의 건설과 설계를 총괄지휘했다.
▲ 1960년대 수도 프놈펜 바삭강에 인접한 대규모 주거단지의 모습. 1960년대초 수도 프놈펜에 지어진 주거단지의 모습. 건축가 완 몰리완은 국왕의 전폭적 지원아래 도시개발에 나섰으며, 공무원용 아파트를 포함한 대규모 주거단지조성사업과 지금은 화재로 사라진 바삭 국립극장(아래 사진)의 건설과 설계를 총괄지휘했다.
ⓒ Vann Molyvann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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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로돔 시하누크 국왕의 지시에 따라 건축가 완 몰리완이 설계를 맡아 완공한 왕립프놈펜대학교 도서관 전경.
 노로돔 시하누크 국왕의 지시에 따라 건축가 완 몰리완이 설계를 맡아 완공한 왕립프놈펜대학교 도서관 전경.
ⓒ 박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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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은 젊고 유능한 천재건축가 완 몰리완을 유달리 총애했다고 전해진다.

이 같은 사실은 그동안 알려진 몇 가지 에피소드만으로도 충분히 증명할 수 있다. 하루는 그가 갑자기 감기몸살이 나서 집에 있자, 국왕이 왕실경호원들을 동원해 그를 병원까지 억지로 보낸 적도 있었다. 심지어 프놈펜왕립대학교(RUPP)를 완공하자, 국왕은 선물로 그에게 이태리산 고급 스포츠카를 선물하기도 했다. 자신의 교육부 장관 임명 소식을 아침식사중 라디오 방송을 통해 알게 됐다는 에피소드는 지금까지도 회자될 정도다.

이 같은 국왕의 아낌없는 후원과 지지에 몰리완은 건축가로서 자신의 천재적 역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그의 손끝에서 수도 프놈펜은 '동양의 파리'라 불릴 만큼 아름다운 도시로 거듭나게 된다. 최근 폐간된 〈캄보디아데일리〉 일간지를 창간한, 미국인 기자 버나드 크리셔씨도 "그 당시 수도 프놈펜이 지금으로선 감히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숲과 나무 등 조경이 잘 가꿔진 아름다운 정원도시였다"고 증언한 바 있다.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맞은 지 얼마 안 된 이 나라는 50년대 후반부터 경공업을 중심으로 경제가 성장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1961년 이 나라 1인당 국민소득은 116불로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할 당시 우리나라의 93불보다도 높았다. 이웃나라인 태국과 비교해서도 국민소득이 불과 2불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게다가, 권력욕이 강해 총리자리까지 거머쥔 시하누크국왕의 대중적 인기는 정치뿐만 아니라, 사회 안정까지 불러왔다. 12세기 앙코르제국 시절 이래 제2 국가전성시대를 맞자 문화는 더욱 융성하고 국민들은 미래에 대한 희망에 부풀었다. 이 시대를 가리켜 사람들은 '황금시대(Golden Age)'라고도 부른다. 그리고 그 중심에 건축가 완 몰리완이 있었음은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국외로의 탈출, 20년 만에 돌아온 고국

하지만 몰리완이 주도한 신 크메르 건축시대는 1970년 3월 미국 중앙정보국 CIA의 배후지원을 받은 론놀장군의 쿠데타로 예상치 못한 갑작스런 종말을 고하고 만다. 자신을 그리도 총애하던 시하누크국왕은 결국 중국으로 망명길을 떠날 수 밖에 없었고, 몰리완 자신도 한 순간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후 캄보디아가 이웃 나라 베트남전쟁에 더욱 깊숙이 연루되면서, 내전이 심화되고, 밤마다 적의 포성이 가까이서 들려오자, 마침내 그는 살아남기 위한 중대 결정을 내린다. 스위스 출신 아내, 그리고 여섯 자식들과 함께 스위스로 이주를 결심한 것이다.

하지만, 국외로의 탈출계획이 결코 쉽지 않았다. 당시 론놀 정권은 국왕의 측근으로 통한 이 건축가에 대해 여전히 감시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기에 때문이다. 이미 그는 여권마저 정부로부터 압수당한 상태였다. 결국 그는 이스라엘에서 열리는 국제학술대회 참가를 핑계로 간신히 여권을 발급받아 이 나라를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다.

당시 정권은 가족들을 인질로 삼았기에 그가 반드시 돌아올 것으로 확신했다. 하지만, 아내는 외무부 공무원들에게 몰래 뇌물을 주고 자녀들의 여권을 연장했다. 그리고 그녀 자신은 유엔에서 발급한 외교 여권으로 무너지기 직전의 이 나라를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러한 결정 덕분에 그와 그 가족들은 4년 후인 1975년 4월부터 시작된 '킬링필드'의 시대를 피해 용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아내의 고국인 스위스에 정착한 그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유엔 산하 '인류를 위한 정착프로그램' 개발전문가로 전 세계 개발도상국 빈민들을 위한 주택보급사업에 매진하며 10년을 살았다.

그 후 그가 다시 고국에 돌아가기로 결심한 것은 1991년 어느 날 이른 아침 커피를 마시며 조간신문에 나온 기사를 읽는 순간이었다. 내전이 끝나고 평화시대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곧바로 짐을 싸 고국 캄보디아로 돌아왔다. 생애 두 번째로 20년만 의 귀환이었다. 다행히 아내도 그의 마음을 잘 알기에 적극 지지해주었다.

오랜 망명길에서 고국에 돌아온 사람은 60대 중반 나이에 들어선 그뿐이 아니었다. 한  자신의 든든한 후원자였고, 친구였던 시하누크 국왕과도 20년 만에 극적인 해후를 했다. 형제 못지 않았던 우애를 과시했던 이들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그는 시하누크 국왕의 권유에 따라 곧바로 관방부의장과 예술부장관이란 중책을 맡아 긴 내전으로 폐허가 된 이 나라의 도시재건사업에 매진하게 된다. 그는 또한 앙코르유적 복원관리책임부서인 압사라당국 총책임자로도 임명되었으며, 국왕의 권한을 위임받아 앙코르와트를 포함한 유적 복원사업과 관련된 모든 결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과거 젊은 시절처럼 국왕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이 나라와 도시를 재건하는 프로젝트를 주도적으로 이끌어나가기에는 힘에 벅찼다.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외부환경의 변화 때문이었다. 1997년 왕당파인 푼신펙당이 훈센 총리와의 권력싸움에 밀린 후부터는 중장기 도시개발계획과 관련된 그의 영향력은 더욱 힘을 잃고 말았다.

게다가 훈센 총리가 완전히 권력을 장악한 2000년대 초반의 상황은 미래를 내다보는 직관력과 통찰력, 그리고 한 개인의 뛰어난 능력보다는 '정치적 수완'이 더 큰 힘을 발휘하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는 안타깝게도 천재적인 건축가일망정 셈이 빠른 영악한 정치인은 되지 못했다.

그가 만든 건축물들이 없어지고 있다

결국 2001년 갑작스레 그는 공무원 자리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이후 2003년 도시의 미래를 장기적으로 내다본 관점에서 지형과 물의 흐름을 고려한 도시수로관리계획에 관한 책을 집필했지만, 그의 아이디어는 비용과 현실적인 문제 등에 부딪혀 이마저도 정부정책에 전혀 반영되지 못했다. 그는 결국 좌절했고, 정부와 연관된 도시건축과설계업무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은퇴를 선택했다. 더 이상 건축분야 일에 나서기에는 80대 고령에 체력적으로 힘들다는 현실적 이유도 있었다.

그가 자리를 떠나자 먼 미래를 내다보지 못한 근시안적 도시개발정책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활개를 치기 시작했고, 과거 50~60년대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그의 건축 작품물들은 개발 논리에 밀려 점점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바삭 국립극장은 의문의 화재사고가 발생한 이후 2007년 사라져 버렸고, 옛 관방부 건물은 중국정부 지원으로 지은 새 건물로 대체되었다. 최근에는 캄보디아 도시 폐허의 아이콘이었던 화이트빌딩마저도 사라졌다. 그가 직접 설계한 건축물은 아니지만, 그는 당시 이 아파트를 포함한 바삭지역개발 총괄책임을 맡고 있었고, 당시 지어진 3개동 중 하나인 그레이 빌딩은 그가 직접 설계에 참여했다.

수도 프놈펜 도시흉물의 대표적 상징이었던 화이트 빌딩  지난 달 일본계기업이 개발에 나서 결국 역사속에 사라진 이 건물은 완 몰리완이 직접 설계한 건물은 아니지만, 60년대 초 그는 이 오래된 아파트를 포함해 바삭지역 대규모 주택단지 조성사업을 총괄지휘했었다.
▲ 수도 프놈펜 도시흉물의 대표적 상징이었던 화이트 빌딩 지난 달 일본계기업이 개발에 나서 결국 역사속에 사라진 이 건물은 완 몰리완이 직접 설계한 건물은 아니지만, 60년대 초 그는 이 오래된 아파트를 포함해 바삭지역 대규모 주택단지 조성사업을 총괄지휘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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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그가 건축가로서 모든 열정을 쏟아부어 완공한 대표작인 프놈펜 올림픽스타디움도 대만계 기업에 넘어간 상태다. 보존문제를 해당기업과 협의 중이라고 하는데 언제 사라질지도 모를 일이다. 그가 직접 설계를 하거나 지휘책임하에 지어진 100여 개의 건축조형물중 지금까지 살아남은 건 손가락안에 들 정도다.

그는 더 이상 수도 프놈펜에 미련이 없었다. 자신이 직접 설계해 살던 프놈펜 옛집마저  떠나 앙코르와트가 있는 씨엠립으로 이사를 갔다. (단, 그가 살던 원래 집은 원형을 그대로 보존 관리한다는 조건하에 건축회사에 임대를 줬다.)

지난 2015년 현지일간신문 〈프놈펜포스트>와 가진 인터뷰에서 자신이 지은 건물들이 오직 개발 논리에 의해 사라지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내가 만든 것들이 남아 있게 될 거란 희망은 거의 없다. 그래서 너무나 슬프다 "라고 대답한 적 있다. 그가 느꼈을 감정은 이루 헤아리기는 힘들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정부의 무분별한 개발정책과 자본주의 논리에 의해 그의 작품들이 점차 사라짐을 안타깝게 여기는 지식인들이 있었다. 미국의 유명건축가 빌 그리브스(Bill Greaves)도 그중 한사람이었다. 그는 다른 건축가와 젊은 학생들과 함께 그의 작품을 자료로 보존하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지난 2010년부터 이들은 과거 그가 설계한 청사진과 관련 사진 자료들을 찾고 이를 연구하고 보존하는 작업을 1년 반이나 시간을 들여 어렵게 완성했다. 이 같은 작업은 그가 설계나 기획에 참여한 건축물 사진이 180장이나 남아있어 가능했다. 이 중 대부분은 70년대 내전이 발생하기 전 아내가 스위스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보낸 사진들이다.

지난해에는 그의 삶과 작업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도 일부 서양인들의 노력을 통해 완성됐다. 캐나다 출신 크리스토퍼 롱프레 감독이 만든 30분짜리 다큐멘터리작품의 제목은 '캄보디아를 세운 사람'(원제: The Man Who Buillt Cambodia)이다. 이 다큐 영화는 지난해 연말 프랑스 문화원에서도 몇 차례 상영된 바 있다. 그가 불어로 출간한 건축관련 책자 중 '현대 캄보디아 도시(Modern Khmer Cities)'란 책은 그의 제자들과 NGO의 도움으로 크메르어와 영어로 번역발간되기도 했다.

이렇듯 정부의 무관심과 무분별한 개발 논리에 묻혀 자칫 영원히 사라져버릴 수도 있었던 그의 예술작품들이 일부 양심있는 사람들의 열정과 노력 덕분에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때마침 오늘 아침 잠시 볼일이 있어 노로돔도로와 시하누크도로 교차로 중앙에 서 있는 독립기념탑 앞을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갔다. 90년간 프랑스 식민지배통치에서 벗어난 것을 기념해 1962년 완성된 그의 대표 작품 중 하나인 이 조형물은 크메르 전통양식과 연꽃 등 앙코르 미술조각 작품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역대급 작품이다. 어쩌면 시간이 흘러 예술가로서의 그의 천재성과 위대한 열정, 그리고 그의 업적을 기억할만한 도시 조형물이 이것 하나만 남게 될지 모르겠다는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90년 프랑스 통치지배로부터 해방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독립기념탑. 이 조형물 역시 1962년 건축가 완 몰리완이 국왕의 명령에 따라 크메르양식의 전통미와 현대적 감각을 살려 만든 걸작품이다.
 90년 프랑스 통치지배로부터 해방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독립기념탑. 이 조형물 역시 1962년 건축가 완 몰리완이 국왕의 명령에 따라 크메르양식의 전통미와 현대적 감각을 살려 만든 걸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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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여러분들은 먼저 우리의 조국의 사랑해야 합니다. 절대로 대중에 영합하거나, 개인의 영광에 치우쳐선 안됩니다. 우리의 역할이 사회에 긍정적 영향을 줄 수 있도록 각자 마음을 열어야 한다. 만약, 우리가 그 같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우리의 환경과 다른 누군가를 파괴할 창조물을 우리 스스로 만들게 될 수 있으니까요."

4년 전쯤인가 자신을 따르는 건축가들 앞에서 그가 행한 연설 대목 중 하나다.

다시 한번 위대한 캄보디아 출신 건축가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의 명복을 빈다.

 2014년 건축사로서 은퇴를 선언한 후 수도 프놈펜에서 앙코르와트가 있는 씨엠립으로 이주한 그가 자택앞에서 지팡이를 쥔 채 사진촬영에 응한 완 몰리완의 모습. 그는 수년전 인터뷰에서 자신이 지은 건물들이 사라져가는 현실에 대해 "너무나 슬프다"고 말했다.
 2014년 건축사로서 은퇴를 선언한 후 수도 프놈펜에서 앙코르와트가 있는 씨엠립으로 이주한 그가 자택앞에서 지팡이를 쥔 채 사진촬영에 응한 완 몰리완의 모습. 그는 수년전 인터뷰에서 자신이 지은 건물들이 사라져가는 현실에 대해 "너무나 슬프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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