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복성(77)씨는 재즈를 시작한 지 올해로 60년, 환갑을 맞았다. 그는 한창 더운 8월에 서울 구의동에 있는 자신의 연습실 '류복성 드럼&퍼커션 스쿨'에서 기자를 만나자마자 대뜸 "지금 대한민국 문화계가 썩었어. 모든 게 다 썩었어. 이걸 뒤집어 엎어가지고 고름을 짜고 모두 바꾸어야 돼. 모든 걸 체인지(change) 해야 돼"라고 핏대를 세웠다. 그리고 다음 이야기를 빼지 말고 반드시 기사에 넣어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올바른 이야기를 하면 빨갱이라고 그러는 나쁜 놈의 인간들이 있어. 이 인간들은 틀림없이 콩인데 팥이라고 개소리를 한단 말이야. 진짜 그 개소리하는 인간들이 빨갱이들이야. 나는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 양아치들은 빨리 지구 바깥으로 스스로 나가 주길 바라는 사람이여. 근데, 안 나가지.

정치하는 인간들은 상대방 헐뜯는 거 잘 하잖아. 상대방을 헐뜯은 다음에 오는 건 결국 자기 자신의 파멸일 뿐이야. 이 인간들은 매일 자신의 함정을 판다고. 국민은 이제 그걸 다 안단 말이야. 상대방 헐뜯는 것, 그거 고쳐야 된다고. 서로 존중하며 살아야지."

류복성씨는 까칠했다. "기자나 정치인들은 거짓말 잘 하거든. 재즈는 솔직해야 돼. 거짓말 하면 안 되거든. 그리고 기자는 백만 번을 써도 기사를 다르게 써야 되거든. 이전과 다른 새로운 질문을 던져 봐!"

잠시 침묵이 흐르자 류복성씨가 "나이가 몇 살이냐, 고향이 어디냐"며 오히려 기자에게 질문을 퍼붓는다. 취재 갔다가 취재를 당하는 느낌이다. 에이, 이럴 때는 가장 기본을 물고 늘어지는 게 상책이다.

"음악을 왜 시작하셨나요?" 기자를 빤히 쳐다보더니 씩 웃으며 대답을 시작한다. 휴, 성공이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인터뷰가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내 고향이 경기도 용인시 송문리야. 내 어릴 적에는 양반 상놈 가릴 때인데 우리 할아버지가 양반이라고 갓 쓰고 '에헴' 하고 다녔거든. 같은 동네에 묘지기(산지기)가 있었어. 그 분이 정말 예술가였어. 이름이 박금석씨인데, 이 양반이 날라리(태평소), 꽹과리, 장구 등 못하는 악기가 없었어. 음식도 잘 했는데, 내가 3살 때부터 맛있는 음식이 먹고 싶어서 아저씨 집에 자주 놀러 갔었어. 가면 가마솥에 개장국을 팔팔 끓여서 떠 주었거든. 그거 먹다가 입천장이 홀라당 뒤집어지고…. 거기서 그 분의 연주를 들으며 자랐는데, 어릴 때부터 알게 모르게 그 분 영향을 많이 받은 거지. 그래서 내가 음악인의 길을 가게 된 거야. 국악도 좋아하고."

 "한국에 재즈 뿌리는 심었지. 그러나 아직 시작에 불과해. 재즈는 세계를 정복했어. 근데 우리나라만 아직 크게 붐이 일어나지 않았어. 언젠가 재즈 센세이션이 온다는 거 나는 확신해. 그 때까지 나는 묵묵히 재즈를 할 뿐이야."

"한국에 재즈 뿌리는 심었지. 그러나 아직 시작에 불과해. 재즈는 세계를 정복했어. 근데 우리나라만 아직 크게 붐이 일어나지 않았어. 언젠가 재즈 센세이션이 온다는 거 나는 확신해. 그 때까지 나는 묵묵히 재즈를 할 뿐이야." ⓒ 조우성


그는 무대에 오르기 전 링컨 대통령에게 감사 기도를 올린다.

"재즈는 흑인음악에서 나왔어. 링컨 대통령이 만약에 흑인들 노예해방을 안 했다면 재즈가 나올 수 없었을 거야. 그래서 나는 항상 링컨 대통령한테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무대에 올라. 흑인들이 노예생활도 하고, 한이 많잖아. 우리도 한이 많은 민족이고."

그는 재즈를 인생, 진실이라고 말한다.

"재즈는 인생을 이야기 하는 음악이야. 거짓말이 아니고 진실을 이야기 해. 재즈에는 진실성이 있어. 재즈를 모른다면 그건 자기 인생에서 한 구석을 잃어버리고 살다가 죽는 거야. 얼마나 불쌍해."

그의 대표곡으로 드라마 수사반장 타이틀곡, '혼자 걷는 명동길', '사랑하고 싶다', '데낄라(Tequila)'. '프리워크(Free Work)', 데이브 브루벡(Dave Brubeck)이 연주를 해서 세계적인 히트가 되었든 '테이크 파이프(Take Five)' 연주곡 등이 있다. 그가 '사랑하고 싶다' 노래가사를 만드는 데 1년이 걸렸다고 한다.

"흑인의 삶과 애환을 그렸던 재즈영화가 있어. <모베러블루스>(Mo' Better Blues)라고. 거기에 가사를 붙였어. 난 작사가가 아니야. 문학한 사람도 아니고. 그 작사하는데 내가 1년이 걸렸어. 내가 개구쟁이거든. '우린 만났지. 재즈 클럽에서. 처음 본 순간. 우린 뿅 갔지.' 이렇게 유머있게 몇 백번 고쳐 친구들한테 물어보는 거야. 가사를 내가 썼지만 여러 사람이 도와줬지. 그건 공동가사야. 그래서 이 노래는 내가 재즈클럽에서 꼭 불러. 그것만 부르면 모두 기립박수를 쳐."

1965년에 고등학생인 정성조씨를 스카웃해 재즈밴드를 만들었다.

"이봉주 악단에 있다가 1965년에 내가 '류복성 재즈 메신저스'를 창단했어. 1967년이라고 잘못 말하는데 정확하게 1965년에 창단을 했어. 당시 색소폰을 정성조씨가 맡았어. 버클리 음대 나오고 KBS 악단장을 지냈잖아. 정성조씨는 음악천재야. 정성조가 서울고등학교 밴드부에 있을 때 누가 소개를 했어. 그래서 내가 고등학생을 스카웃 한 거야."

 "대중앞에서 연주 할 때는 관중들이 재미있어야 돼. 어떤 음악을 하든지. 사람들과 공감할 수 있는 음악을 해야 돼. 어떤 메시지가 전달이 되야 되는거야. 더하고 빼고 다듬고 해서 자신만의 음악색깔을 만들어 나가야 되고."

"대중앞에서 연주 할 때는 관중들이 재미있어야 돼. 어떤 음악을 하든지. 사람들과 공감할 수 있는 음악을 해야 돼. 어떤 메시지가 전달이 되야 되는거야. 더하고 빼고 다듬고 해서 자신만의 음악색깔을 만들어 나가야 되고." ⓒ 조우성


그는 재즈밴드를 창단해 워커힐 호텔 힐탑바에서 1년 6개월간 연주했다.

"워커힐은 특급관광호텔 아니냐. 미팔군이 그 호텔을 사용했어. 미국에서 가족이 면회를 올 거 아니야. 그러면 거기서 재우고 했지. 그러니까 거기는 외국 사람들이 60% 이상이야. 거기서 밤 7시부터 새벽 2시까지 연주를 했어. 재즈연주를 1년 6개월 한 거야. 재즈밴드로 계약한 건 당시 대한민국에서 나 한 사람밖에 없어. 그때가 최고 행복했지."

힐탑바와 계약이 끝난 후 호텔나이트클럽으로 무대를 옮겼으나 곧 쫓겨났다.

"나이트클럽이 술 먹고 호스티스 있고 유흥업소잖아. 거기는 댄스음악,  로맨틱한 음악을 해야 되는데 거기서 오리지널 재즈를 한 거야. 댄스뮤직, 로맨틱 뮤직을 해야 손님들이 춤을 추는데 거기서 재즈를 하니까 춤을 못 추지. 아, 무슨 이상한 음악이 나오냐 이거지. 그러니 당연히 쫓겨나지. 그 사건으로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음악을 해야 살아남는다는 것을 알게 된 거지."

나이트클럽에서 쫓겨난 후 그는 심하게 방황했다.

"술 '졸라' 먹고 어디 분풀이 할 데도 없잖아. 그렇다고 지나가는 사람과 싸울 수 없잖아. 깡패도 아니고. 그래서 술 잔뜩 먹고 중부경찰서에 갔어. 당시에 경찰서 앞에 순찰이 항상 서 있었어. 그 사람한테 가는 거야. 담배 하나 줘. 이 사람 술 취했네, 집에 가! 술은 니가 사줬냐? 시비를 거는 거지. 그러면 형사실로 잡혀 가잖아. 다 무술한 사람 아니야. 책상 들어 엎고. 쥐어 박고 맞짱을 뜨지. 그렇게 방황을 했어. 20대부터 한 45살까지 그 지*하고 다녔지. 라면 먹으면서.

그게 습관이 된 거지. 객기 부리려고. '또라이'가 돼 가지고. 27개 경범이 있어 내가. 열흘 살고 일주일 살고 15일 살고. 그때는 이나 빈대가 유치장에 드글드글 할 때야. 막 빈대가 다녔어. 그러다 45살쯤 한 대 맞았어. 일주일이면 나을 줄 알았는데 안 낫더라고. 그 다음부터는 그 짓 안 했어."

나이트클럽에서 쫓겨나 놀고 있을 때 한국연예협회에서 주최하는 전국 경음악 경연대회가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장소가 서울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이야. 전국 경음악 경연대회에 '류복성 재즈 메신저스'로 출전을 한 거야. 색소폰에 정성조, 박성연이 보컬이었지. 한 밴드에 시간이 50분씩 주어줬지. 다른 팀들은 가요, 팝송, 록, 댄싱도 넣고 완전 대중성 있게 50분 프로그램을 만들었어. 우리는 손목인 작곡의 타양살이를 정성조가 15분 정도로 편곡을 하고, 테이크 파이브(Take Five)를 라틴재즈로 바꿔서 20분 연주하고. 박성연이 보사노바 곡 중에서 데사피나도(Desafinado)라는 곡을 불렀어." 

 류복성씨는 고등학교 밴드부에서 활동하고 있던 정성조씨를 스카웃 하여 1965년 '류복성 재즈 메신저스' 를 창단했다. 정성조씨는 그 후 KBS악단장을 하는 등 대한민국 재즈 4세대를 대표하는 뮤지션으로 성장했다. 류복성씨는 정성조씨를 천재뮤지션으로 기억하고 있다.

류복성씨는 고등학교 밴드부에서 활동하고 있던 정성조씨를 스카웃 하여 1965년 '류복성 재즈 메신저스' 를 창단했다. 정성조씨는 그 후 KBS악단장을 하는 등 대한민국 재즈 4세대를 대표하는 뮤지션으로 성장했다. 류복성씨는 정성조씨를 천재뮤지션으로 기억하고 있다. ⓒ 조우성


심사위원 10명 중 한 명만 좋아하고 나머지는 모두 시큰둥 했다.

"심사위원들이 모두 작곡 작사가들 대선배들이야. 연주를 하는데 그 심사위원들이 다 자빠져 자. 근데 한 사람만 좋아서 일어나 막 박자를 맞추고 손뼉을 치고 난리야. 이렇게 보니까 미국 사람이야. 내가 끝나고 저건 뭐야? 아홉 명은 잠을 자는데 한 사람만 좋아한다고. 그 사람이 미팔군 군악대장이야. 연예협회에서 이 사람을 심사위원으로 초청을 한 거야. 그 사람만 우리 팀에 만점을 주고 다른 심사위원들은 점수를 하나도 안 줬어. 그래서 예선에서 탈락을 해 버렸어."

70년대 경음악 레코드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때 봉고나 여러 타악기를 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어. 녹음실은 수십 개 있잖아. 그걸 내가 다 했단 말이야. 그때 돈 좀 벌었어. 한 번 녹음 할 적에 30만 원씩 받았으니까 하루에 3번 녹음 하면 90만 원 아니야. 당시 한 달에 2천만 원 정도 벌었는데 그 걸로 술을 다 먹었어. 그때 내가 땅을 샀어야 되는데 술로 빌딩 몇 십채를 날린 거지. 바보지. 이제는 남은 인생을 나는 초보다라고 생각하고 새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살고 있지."

그가 인천 올림퍼스호텔 리도나이트클럽에서 연주할 때다.

"호텔이 카지노를 오픈한 거야. 사람들이 호텔로 다 모이는 거야. 돈을 막 그냥 긁을 때야. 나이트클럽 옆 그릴에 손님들을 대기시켜 놓고 테이블의 손님들이 나가면 그 사람들을 막 집어넣는 거야. 나이트클럽에 쇼밴드, 필리핀밴드, 이태리 밴드, 류복성 밴드 4개가 있었어. 이전에 나이트클럽에서 재즈 연주하다가 쫓겨났다고 그랬잖아. 당시 전낙원씨가 총지배인이야. 손님을 교체하기 위해서 우리 팀을 손님 내쫓는 밴드로 쓰는 거야. 그 사람 천재야. 우리는 춤을 못 추게 만드는 밴드야. 그러면 손님들이 욕을 하면서 중간에 나가버리지. 그러면 새로 사람들을 집어 넣고. 나이트클럽에서 사람 내쫓는 재즈밴드 해 본 사람은 아마 나밖에 없을 걸."

류복성씨를 재즈 1세대로 이야기 하는데, 본인은 재즈 3세대라고 말한다. 

"나보고 재즈 1세대라 하는 건 잘못된 거야. 정확하게 나는 재즈 3세대야. 내 위로 재즈 2세대가 조상국씨, 김종명씨, 송춘섭씨, 신지철씨, 박철씨 등이 있어. 재즈 1세대는 만주 상해로 음악 하면서 떠돌이 생활, 유학도 가신 분도 있고. 재즈 4세대 대표로 KBS 악단장과 서울예술대학 학과장을 지낸 정성조씨. 그렇게 되는 거야. 지금은 재즈 6세대까지 있는 거야. 이렇게 쓰면 맞는 거지."

재즈 공로상패을 들고 '살인의 추억' 영화에서 배우 송강호씨가 드라마 수사반장을 보다가 류복성씨가 만든 드라마 타이틀곡을 듣는 장면이 나간 이후 이 곡이 크게 인기를 얻었던 적이 있다. 대표곡으로  혼자 걷는 명동길, 사랑하고 싶다, 데낄라(Tequila). 프리워크(Free Work), 테이크 파이프(Take Five) 연주곡 등이 있다.

▲ 재즈 공로상패을 들고 '살인의 추억' 영화에서 배우 송강호씨가 드라마 수사반장을 보다가 류복성씨가 만든 드라마 타이틀곡을 듣는 장면이 나간 이후 이 곡이 크게 인기를 얻었던 적이 있다. 대표곡으로 혼자 걷는 명동길, 사랑하고 싶다, 데낄라(Tequila). 프리워크(Free Work), 테이크 파이프(Take Five) 연주곡 등이 있다. ⓒ 조우성


그는 "재즈는 민주주의의 대표 음악이야. 미국 민주주의 대표음악이 뭐냐고 물으면 재즈야"라고 말한다. 또 그는 남을 위해서 재즈를 한 게 아니라고 이야기 한다.

"내가 좋아서 한 거야. 내가 좋아서 했지, 어떤 놈이 알아달라고 한 거 아니야. 내가 좋으니까 미쳐서 했지. 무슨 남을 위해서 재즈를 해. 좋아서 하다 보니 남들이 재즈를 알아 주고 좋아해준 거지."

음악을 하는 그의 마음가짐이다.

"난 올바르지 않으면 안 해. 올바르지 않으면 그건 거짓이다 이거야. 진실이 없는 거야. 그건 영화롭지 않다. 순간일 뿐이야. 너 한우를 먹고 살래 라면을 먹고 살래 그러면 나는 라면을 택했어. 얼마나 바보냐. 응! 좋은 기회가 많았는데. 나는 라면이다 이거야. 난 재즈다 이거야. 재즈를 누가 어떤 권력자가 이 지구촌에서 바꿀 수가 없어. 무슨 말인지 알지! 그래서 내가 재즈를 좋아하는 거야. 재즈는 영혼의 음악이야."

류복성 재즈 정성조 신지철 류복성 드럼&퍼커션 스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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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스트, tracking photographer. 문화, 예술, 역사 취재.

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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