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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내게 명절은 딱히 반갑지만은 않은 날이 돼 버렸다. 회사를 가지 않는다는 점은 좋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완전한 휴식을 의미하지도 않았다. 일단 가족과 친척들이 있는 부산까지 가는 것도 일이지만 도착한다고 해서 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제사와 차례를 중요시하는 분위기 탓에 나는 엄마를 따라 재료를 사러 시장을 돌아다녔고 그러고 나면 하루 종일 부엌에 쭈그리고 앉아 차례 음식을 만들었다. 속이 거북할 정도로 기름 냄새를 맡으며 전에 반죽 옷을 입히고 있으면 차라리 친척 모두를 개종시켜 교회에 보내고 싶은 욕망까지 들 정도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집안 어르신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선 차례를 지낼 때도 긴장을 바짝 해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을 거쳐도 남은 게 있다. 바로 친척들과의 식사 자리다. 조용히 밥만 먹고 사라져 주면 좋으련만, 뭐가 그리 궁금한 게 많은지 친척들의 오지랖 넓은 질문들이 불쑥불쑥 던져진다. 아주 안 볼 사이면 짜증이라도 내겠지만 부모님의 눈치를 보느라 어색하게 웃어넘기고 만다.

이어지는 되도 않는 조언을 듣고 있자면 눈 딱 감고 올 한 해만 밥상을 엎어 볼까도 싶다. 사실 이것이 내가 모두에게 한 커밍아웃을 이 사람들에게 절대 하지 않는 이유다. 그건 명절 때마다 몸에 커다란 과녁을 걸고 '여기를 향해 쏘세요'라고 외치며 총격전에 뛰어 들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성소수자에게도 평등한 설날을 현수막 2
"여자같이, 남자같이 행동해라. 성별이분법을 강요하는 명절은 이제 그만!"
 '성소수자에게도 평등한 명절을' 현수막 "여자같이, 남자같이 행동해라. 성별이분법을 강요하는 명절은 이제 그만!"
ⓒ 대전 성소수자 인권모임 솔롱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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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렇게 해도 명절 때 성소수자로서 불쾌한 경험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명절 밥상에는 신변잡기부터 정치적·사회적 이슈까지 다양한 주제가 화두로 던져진다. 마침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동성애 반대를 열렬히 외쳤으니, 내가 만나게 될 '경남 아재'들이 이 주제를 입에 올릴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또 일상적으로 널리 퍼진 성차별적·성소수자 혐오적 언어 습관들도 언제 터질지 모를 지뢰 중 하나다. 나는 오랫동안 동성애자이기에 명절에 여벌로 받아야 했던 스트레스를 피해갈 방법을 궁리했다. 하지만 틀렸다. 이 악순환은 나의 친척들이 입을 다물지 않는 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성소수자를 표현하는 수식 중 유명한 것으로 '아무 곳에도 없는 것 같지만 어디에나 있다'가 있다. 그것은 온 친척들이 모이는 명절 자리도 마찬가지다. 한 마디로 누군가의 경솔한 한 마디가 '본의 아니게' 성소수자들의 마음을 할퀴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소수자로서 나와 내 친구들이 생각한 '부디 이런 행동만은 하지 말았으면' 목록을 남겨본다. 명절이 주는 고통을 분담할 생각이 아니라면 적어도 더 부담하게 만들지는 말자.

1. 결혼·연애 이야기는 이제 그만

이따금 어디 높은 산이라도 올라가서 "야! 나 게이야!"라고 외치고 싶을 때가 있다. 주변 사람들에게 동성애자라고 커밍아웃을 하긴 했으나, 그렇다고 이마에 '게이'라고 쓰고 다니는 것은 아니니 특히나 처음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를 '이성애자'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매우 자연스럽게 "애인은 있어요?"라고 묻는 게 아니라 "여자 친구는 있어요? 결혼 계획은 있으신가요?"라고 질문한다.

하루 이틀 겪는 문제가 아니니 이제는 그러려니 하지만 이런 상황이 누적되다 보면 짜증이 치밀어 오를 때가 있다. 특히나 결혼에 관한 질문은 듣다 보면 '하게나 해주고 물어 보든가'라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 올 때가 많다(물론 요즘은 그냥 그렇게 말할 때도 있다).

명절에 친척들이 모였을 때 각종 사생활에 관한 질문이 오고 가는 건 이제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그리고 이는 누가 들어도 불쾌하기 짝이 없는 말이다. 하지만 성소수자에게 있어 연애와 결혼에 관한 질문은 2배의 고통을 유발한다. 가령 나는 그런 물음 앞에서 거짓말을 하거나 혹은 화제를 전환시킨다.

이 같은 일은 연애를 하든 말든 드러낼 수 없고, 결혼은 애초에 가능한 선택지가 아니지만 이 또한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억압받는 나의 위치를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보통 무력감이 드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 친척들이 얼마 전 결혼을 하거나 아이를 낳은 자기 자식 이야기를 시작하면 씁쓸함은 배가 된다. 내 결혼을 위한 투사가 돼 달라고 부탁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적어도 아픈 구석은 좀 찌르지 말자.

2. 우리가 여성인지 남성인지는 어떻게 알아요?

 성소수자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인 무지개예수는 15일 오전 서울시청 광장에서  ‘오 주여, 여기에 우리와 함께’라는 주제로 여는기도회를 진행했다.
 성소수자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인 무지개예수가 기도하는 모습
ⓒ 지유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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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흔히 성소수자의 존재를 '성적 지향'을 중심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대부분 레즈비언 혹은 게이를 떠올리고 하다 못해 양성애자를 이야기하는 경우도 드물다. 하지만 퀴어는 '지향'뿐만 아니라 '성 정체성'의 범주 또한 포괄한다.

가령 사회적으로 지정된 성별과 다른 성으로 스스로를 정체화하는 트랜스젠더가 있고 여성과 남성이라는 이분법적인 성별 구분에 속하지 않는 논 바이너리(예를 들어 양성적 젠더 정체성을 가진 안드로진이나 중립적인 성별 정체성을 지닌 에이젠더, 유동적으로 변하는 젠더 정체성을 가진 젠더플루이드 등이 여기에 속한다)의 존재도 있다.

따라서 겉모습만 보고 이들의 성 정체성을 판단하는 것은 무례한 행동이 된다. 가령 논 바이너리인 내 친구는 명절 때 "아이고, 이제 너도 여자가 다 됐네"라는 말을 듣고 매우 불쾌했다고 한다. 트랜스젠더의 경우도 모든 이들이 성별 이행(호르몬 요법이나 성전환 수술, 복장을 포함한 외형 변화를 통해 스스로의 성별 정체성에 해당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수행을 하거나 몸을 가지는 일)을 거치거나 혹은 그럴 계획을 가진 것은 아니기에 비슷한 상황에 처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당연히 상처를 받는다.

사실 내 친구의 사례에서 그 친척이 말한 '여자'는 단순히 성별이 여성인 사람이 아니라 이성애자이며 이에 따른 특정한 규범을 실천하는 이를 의미하는 말일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이 문제는 다른 성적 지향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가령 부치(흔히 남성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모습으로 자신을 꾸미거나 그런 수행을 하는 여성 성소수자를 일컫는 말) 스타일을 고수하는 내 레즈비언 친구는 친척에게 "여자가 꼴이 그게 뭐냐"는 핀잔을 받았고, 나의 경우 "결혼해서 대를 잇지 않고 있다니 남자 구실을 못한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한 마디로 여러 사람 괴롭게 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최소한의 예의도 갖추지 못할 것 같다면, 성별과 관련한 이야기는 그냥 입에 올리지 않는 게 어떨까?

3. 카톡방 통신은 잠시 꺼주세요

가끔 친척 어른들을 만나면 놀라곤 한다. 같은 모바일 세상을 살아가지만 주로 사용하는 플랫폼이 정말 상이하기 때문이었다. 가령 나의 세대는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SNS를 주요 소통 창구로 삼지만 이보다 더 나이 든 세대는 카카오톡 단체 채팅방이나 카카오 스토리를 통해 활발한 교류를 하곤 했다.

물론 어느 플랫폼이나 유언비어가 횡횡할 가능성은 높지만, 특히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이슈에 대한 가짜 뉴스가 대량 생산된 이후 어르신들의 단톡방을 중심으로 이러한 것들이 퍼져나가는 상황을 나는 자주 목격하곤 했다.

가령 세월호 참사가 터지고 유족들이 투쟁에 나섰던 해의 추석, 한 친척분은 내게 '세월호 유가족의 단식은 사기가 아니냐'며 자신의 단톡방에 올라온 사진을 보여줬다. 그 사진은 오히려 세월호 추모 반대 집회 참석자가 단식 시위 중 몰래 통닭을 먹던 사진이었기에 나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이런 가짜 뉴스, 허위 정보들은 주로 정치적 현안에 관련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성소수자 인권 또한 그런 이슈가 돼 버렸다. 헌법재판소장과 대법원장의 임명 과정에서 반대 세력들이 주요하게 공격했던 게 후보자들이 성소수자의 권리에 대해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을 했다는 점처럼 말이다.

동성애자들을 문란하고 유해한 존재로 만들고 에이즈 환자들을 세금 도둑으로 몰아가는 혐오 콘텐츠들은 이전에는 교회 단톡방 정도에서나 유통됐다(물론 이 쪽도 파급력이 크긴 컸다).

이번 추석은 이런 악의적 허위 정보들이 그 벽을 넘어섰나를 가늠할 수 있는 시기가 되겠지만, 또한 그렇기 때문에 막연히 받을지도 모를 스트레스 생각하며 불안에 떠는 날들이 될 것이다. 그러니 부디 요청하고 싶다. 단톡방 통신이 얼마나 재밌는지는 모르겠지만 올해 추석 만큼은 제발 잠시 그것을 꺼두시라.

4. 혐오할 거면 입을 열지 마세요

무지개 깃발 앞세운 퍼래이드 행렬 퀴어문화축제가 열린 28일 서울광장을 출발해 을지로 일대에서 축제 참가자들이 퍼레이드를 하고 있다.
 2015 퀴어문화축제. 무지개 깃발 앞세워 퀴어퍼레이드가 이루어지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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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가 끝나고 식사를 할 때면 친척들은 자연스럽게 리모컨을 들어 TV를 켰다. 그 시간에 맞춰 방송되는 명절 특집 예능을 시청하기 위해서였다. 다양한 사람들의 입맛을 맞추려한 탓인지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한 프로그램들이 재밌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다른 이유에서도 나는 그 방송들을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

행여 게스트로 홍석천이나 하리수와 같은 성소수자 연예인이 나올까 내내 긴장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에 대해 개인적인 악감정 같은 건 없다. 하지만 다른 친척들은 그렇지 않았다. 실제로 나의 지인 중 한 사람은 홍석천이 화면에 등장하자마자 친척들이 욕을 하는 바람에 기겁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나는 그런 사태를 막기 위해 아예 채널을 돌려버린다.

성소수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과 태도가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몰이해와 혐오, 차별적 시선을 문제인지도 모른 채 드러내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우리가 만나는 친척들 역시도 그런 세상 속에서 살다온 이들이다. 즉 그들 또한 일상적으로 혐오 발언을 내뱉는 불쾌한 인물들 중 한 사람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글을 위해 사례를 모집하면서 가장 어안이 벙벙했던 때는 누군가 한 친척이 대뜸 지나가는 사람을 지목하며 "저건 남자야 여자야"라고 말을 했노라고 전할 때였다. 그저 거리를 지나다 뜬금 없이 벌어진 일이다. 지금의 한국이 그런 것처럼 명절 때도 혐오의 안전지대란 없는걸까?

혐오할 거면 말을 하지 말라고 부탁하고 싶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폭력으로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것이 가능한 부탁일까. 자주 보지 못하기에, 만났을 때라도 적극적인 소통을 통해 친밀함을 확인하고 싶은 게 사람들의 심리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실망만을 느끼게 한다면 어쩌면 차라리 말을 줄이는 것도 낫지 않을까. 나 역시도 누군가와 있을 때의 정적을 잘 견디지 못하는 편이다. 그런 나에게 언젠가 한 친구가 전한 조언으로 글을 닫고자 한다.

"있잖아, 꼭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지 않아도 돼, 그러는 게 우리가 친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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