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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의 전통빵 '바똔'
 러시아의 전통빵 '바똔'
ⓒ 강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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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말인데도, 페테르부르크의 아침 바람에는 가벼운 겨울 냄새가 묻어났다. 길 한쪽으로 빵 굽는 냄새가 흘렀다.

서늘한 아침 공기를 짙은 파랑으로 표현한다면, 빵 냄새는 노랑으로 칠해야 할 것 같다. 향긋한 냄새가 코를 잡아당기는 듯 싶다가, 고개를 조금만 돌려도 냄새는 달아나고 파란 아침 공기가 들어섰다. 빵집을 찾아 흰 색 문을 여는 순간, 코 속이 온통 노란 색으로 채워졌다.

빵집 점원이 미소로 맞는다. 그는 결코 환하게 웃는 법이 없다. 그래도 나는 그 웃음이 반갑기만 하다. 처음의 무표정한 얼굴이 그 옅은 미소로 바뀌는 데 석 달이 걸렸다. 그 웃음을 색으로 표현한다면 반투명한 베이지쯤 될까? 나는 선반 위에 놓인 긴 빵을 가리키며 말한다.

"'바똔' 하나에 '카뿌치나' 한 잔 주세요."

점원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내 손가락의 반대방향인 주방쪽으로 성큼 걸어간다. 서툰 내 러시아어를 못 알아들었기 때문은 아니다. 이곳에서는 줄 수 있는 가장 신선한 빵을 내준다. 언제나 그랬다.

그는 오븐에서 꺼내 식히고 있던 빵을 집어 갈색 종이봉투에 담아서 건넨 뒤, 우유거품을 내러 에스프레소 기계 앞으로 간다. 나는 그 큼지막한 빵을 끌어안듯 두 손으로 받아 쥔다. 손바닥과 (대책없이 나온) 배에 기분 좋은 온기가 느껴진다. 내 입가에도 미소가 떠오른다.

"사랑을 담아, 빵집이 드립니다"

나만이 아니라, 누구든 이 곳의 '바똔(батон)'을 맛보면 다시 오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특별한 빵도 아니다. 이름이 말하듯 막대처럼 생긴, 어디 가든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러시아 전통 빵이다.

밀가루와 물을 주원료로, 약간의 소금, 설탕, 버터를 더해 빵을 빚는다. 하지만 이 간단한 빵을 여기처럼 맛있게 굽는 곳을 보지 못했다. 따뜻한 바똔을 손으로 뜯어 입에 넣으면 껍질은 바삭하고 고소하며, 속은 부드러우면서 쫄깃하다.  

점심 때 먹으려고 산 빵은 잠시 길을 걷는 동안 반토막이 났고, 남은 절반도 점심이 되기 전에 사라졌다. 내가 이 빵집을 처음 찾게 된 데에는 사연이 있다.

여기 빵집이 있다는  사실은 두 해 전에 알았지만,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 도시에 널린 게 빵집이고, 여기도 그 흔한 빵집 가운데 하나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 집에 한 가지 독특한 면이 있기는 했다. 주말에 가게를  지나다 보면, 빵이 잔뜩 놓인 진열대가 밖에 나와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글귀가 적힌 종이가 하나 붙어있었다. 나는 그 안내문을 그저 홍보물로 여겼다. 그 글귀를 처음 들여다 본 게 석 달 전이었다. 남은 빵을 할인판매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지나다녔는데, 어느날 그 빵이 담긴 봉투에 김이 서려 있는 것을 보았다. 막 구운 빵을 밖에 내놓은 것이었다.

 빵집이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빵을 내놓았다.
 빵집이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빵을 내놓았다.
ⓒ 강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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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으로 생활하시는 분들과 배가 고픈 분들께 드립니다. 빵을 살 여력이 있는 분은 다른 사람에게 양보해 주세요. - 사랑을 담아, 빵집 드림."

글을 읽고 나니, 이곳에서 만드는 빵이 어떨지 궁금해졌다. 사실 궁금해 할 것도 없었다. 신선한 빵을 베풀 만큼 사람을 아끼는 빵집이라면,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좋은 빵을 만드는 곳일 터이다.

한두 번 하고 마는 행사도 아니고, 매주 토요일 12시면 어김없이 빵이 거리로 나오곤 했다. 나는 주저없이 들어가 빵을 골랐고, 그날 이후 단골이 되었다. 그리고 러시아 사회에 대한 호기심도 더욱 깊어졌다.

러시아에 대한 적극적 무관심

나는 연구년을 맞아 러시아에 왔다. 이 나라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공교롭게도 대다수의 무관심이었다. 나를 포함해, 세계에서 가장 큰 이 나라에 대해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영향력이 없는 나라라면 모를까, 영화사 책을 들추면 에이젠슈테인 감독의 <전함 포템킨>이 첫 장에 나오고, 미술사에서는 전위예술의 발상지, 문학개론에서는 '러시아 형식주의'가 빠지는 법이 없다.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모형.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모형.
ⓒ 강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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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뿐인가, 화학에서는 '주기율표'의 고향, 물리학에서는 '질량보존의 법칙'의 탄생지, 항공과학에서는 '최초의 인공위성'을 쏘아올린 나라이자 '인류 최초로 인간(그리고 쥐와 개도)을 우주에 보낸 나라'로 기록하고 있다.

이것으로 부족하다면, 이 나라가 사상 최초로 사회주의 혁명을 경험한 나라라는 사실도 떠올려보자. 하지만 놀랍게 우리는 이 나라에 대해 아는 게 없다. 나는 이 기이한 무관심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러시아에 대해 대단히 무관심한, 따라서 대단히 무지한 나라로 미국을 꼽지 않을 수 없다. 2015년 러시아에 취재를 다녀 온 내게 미국인 친구들이 물었다.

"러시아에 종교가 있어?"
"러시아에서도 마음 놓고 인터넷을 쓸 수 있어?"

러시아 정교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명실상부한 기독교다. 나는 친구에게 러시아 내 기독교 신자 비율이 인구 절반이 넘으며, 인터넷을 마음껏 쓸 수 있는 것은 물론, 한 달에 12불(약 1만4천 원)이면 스마트폰으로 60기가 데이터(700분 통화에 문자 700통 포함)를 쓸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지난 봄, 학기를 마치고 러시아에서 연구하기 위해 친구들에게 작별인사를 하자, 한 친구가 다정하게 말했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USSR)'에서 즐거운 시간 보내다 와."

농담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한국사회도 크게 다르지 않다. 2016년 10월, 노벨문학상 수상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대담을 위해 한국의 대학을 방문했다. 이 벨라루스 태생의 작가를 초청했던 대학의 총장이 그 자리에서 축사를 했다.

그 '축사' 속에는 기막힌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예컨대 '작가가 소련 사람인줄 알았다', '노어노문학을 전공한 내 딸은 로스쿨 갔다', '노벨상 수상자가 한국에 많이 왔지만 여자는 처음이다' (사실과 거리가 멀고, 불필요한 맥락에서 수상자의 성별을 거론하는 행위도 부적절했다) 따위의 발언을 했다.

한국에서 가장 들어가기 어렵다는 이 대학은 사회적으로 막강한 권력자들을 배출해 왔다. 이 대학의 총장도 한국 교육의 현재와 미래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인물이다. 우리가 몸담은 사회에 대해 많은 것을 일깨운, 매우 교육적인 사건이었다.

러시아 혁명 100주년의 페테르부르크를 가다

 네바강 위로 유람선이 운행하는 가운데, 왼 편에 삼성과 기아의 간판이 보인다. 러시아에서 삼성 휴대폰, 엘지 텔레비전, 현대 자동차등은 인기 있는 제품들이지만, 러시아를 단지 '자원의 보고'나 '시장'으로만 파악하는 사고는 러시아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 큰 걸림돌이 된다.
 네바강 위로 유람선이 운행하는 가운데, 왼 편에 삼성과 기아의 간판이 보인다. 러시아에서 삼성 휴대폰, 엘지 텔레비전, 현대 자동차등은 인기 있는 제품들이지만, 러시아를 단지 '자원의 보고'나 '시장'으로만 파악하는 사고는 러시아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 큰 걸림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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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지를 러시아로 정하기까지 15차례 방문했다. 러시아에 대해 깊이 알수록, 이 나라가 우리가 알고 있던 것과 매우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러시아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학자나 정치인 가운데 러시아의 풍부한 자원이나 우리가 얻을 경제적 이득을 강조하는 이들을 자주 본다.

나는 이런 접근이 매우 단편적이고 저차원적이라고 생각한다. 생각해 보라. 어떤 나라가 한국에 관심을 보이면서 기껏 우리나라에 매장된 텅스텐이나 무연탄에 집착한다면, 우리가 그 나라를 믿고 존경할 수 있을까?

결국 손해보는 것은 그쪽이다. 그 나라는 우리의 신뢰와 호감을 얻지 못할 뿐 아니라, 한국이라는 나라의 총체적 가능성과 매력을 보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돈에 눈이 먼다고 해서 돈을 잘 벌게 되는 것은 아니다.

나이가 들고 방문하는 나라가 늘어가면서, 나라 간의 관계나 사람 간의 관계가 그리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물론, 사람들도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을 사귀고 싶어한다. 어떤 사람이 관심을 갖고 접근하면서, 당신의 매력, 교양, 지식, 개성을 제쳐둔 채, 재산이나 지갑에 든 돈에 집착한다고 생각해 보자.

우리는 모든 우방들을 경제적 이해관계 차원에서 접근하지 않는다. 예컨대 한국 사람들이 프랑스나 스위스에 관심을 갖는 까닭이 '막대한 포도주 보유고'나 '뻐꾸기 시계 제조 비법'을 탐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유독 러시아에 대해서는 이런 천박한 사고가 상식처럼 통용되고 있다. 우리는 어쩌다가 러시아라는 나라에 이런 기괴한 태도를 지니게 되었을까?

냉전적 사고로 인한 기피, 그리고 그 결과로 탄생한 무지가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수많은 '최초'의 역사가 보여주듯, 러시아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를 보여왔다. 그런 면에서, 나는 우리가 러시아로부터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이득이 '다르게 사고하기'라고 생각한다.

러시아가 완전한 사회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 나라 또한 해결해야 할 많은 숙제를 안고 있다. 하지만 러시아는 미국이나 서유럽 국가 등 우리에게 익숙한 나라들과 완전히 다른 사회, 경제, 교육, 문화 속에서 발전해 온 탓에, 다른 나라에서 보기 어려운 색다른 관점을 제공하는 것도 사실이다(러시아 역시 한국 등의 나라로부터 좋은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올해로 러시아는 10월 혁명 100주년을 맞는다. 러시아 내부에서도 혁명에 대한 부정적 견해가 많지만, 좋든 싫든 현재의 러시아를 말할 때 이 거대한 사건의 영향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소비에트 체제가 러시아에 드리웠던 그림자가 짙은 만큼, 그 체제가 베푼 혜택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지금 러시아 국민이 누리는 140일의 출산 휴가, 1년 반에서 3년에 이르는 육아휴직, 존재하지 않는 비정규직 차별, 고교까지 완벽한 무상교육과 한국 절반 이하인 대학 등록금, 기초과학과 예술에 대한 막대한 투자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따뜻한 빵을 구워 토요일마다 나누는 빵집도 하늘에서 떨어진 것은 아닐 터이다. 그런 점에서 러시아는 우리가 잃어가고 있거나, 아직 도달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 좋은 통찰력을 제공할 수 있다. 러시아는 과거이자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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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통신원입니다.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언론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 기...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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