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지난 9월 15일 베트남 여행 중 하노이 바딘 광장의 호치민 묘 앞에서.
 지난 9월 15일 베트남 여행 중 하노이 바딘 광장의 호치민 묘 앞에서.
ⓒ 임은경

관련사진보기


세뇌의 힘은 무섭다. 이것을 나는 20여 년 전 대학생 시절에 뼈저리게 체험했다. 당시 나는 토익 시험 준비를 하면서 영어 학원을 찾고 있었다. 마침 한 친구가 '박ㅈ 어학원'이라는 곳을 추천해주기에 그 학원 이름을 머리에 새겨두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 무렵 음악 때문에 즐겨듣던 라디오가 화근이었다. 프로그램 중간 중간에 '박종〇 어학원'이라는 광고가 유난히 끈질기게 나왔다. 한 달쯤 뒤, 강남의 '박ㅈ 어학원'에 강의 등록을 하러 간 나는 홀린 듯이 '박종〇 어학원'을 찾아 들어가 등록을 하고 말았다.

강의 수준은 실망 그 자체였다. 이미 토익 시험이 많이 어려워지는 추세였는데, 그 수준에 한참 못 미치는 교재로 대충 시간을 때우는 수업이었다. '강사는 요즘 토익 시험을 한 번도 안 봤나?' 접수 데스크에 항의하러 갔다가 마침 학원 설립자라는 박종〇 원장을 만나서 얘기를 했지만, 20만원에 가까운 수업료는 환불받지 못했다. 씁쓸한 추억이다.

이름이 비슷하다고 해서 어떻게 박종〇를 박ㅈ으로 착각하고 한 달 치 수강료를 날렸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어처구니없는 실수였다. 내 인생에 또 다시 이런 일이 생기지는 않겠지. 짧은 다짐과 함께 그 일은 어느새 시간 속으로 잊혔다.

'뭉쳐야 뜬다'가 화근이었다. "패키지 관광 한번 떠나볼까?"

그런데 20년 후 비슷한 일이 또 일어날 줄이야. 지난 여름, 우연히 JTBC 예능 프로그램 '뭉쳐야 뜬다'를 보게 된 나는 프로그램을 1회부터 다운받아 차근차근 섭렵하기 시작했다. 나는 평소에도 여행 관련 프로그램을 좋아하고 즐겨 보는 편이다. 보기만 해도 시원한 여행 영상들은 피서용으로도 그만이었다.

'뭉쳐야 뜬다'는 가이드가 짜준 일정을 따라다니기만 하면 되는 소위 '패키지 여행'을 다룬 프로그램이다. TV를 통해 본 패키지 여행은 무척 매력적이었다. 가라는 대로 가고, 보라는 대로 보고, 먹으라는 대로 먹는 여행이란 얼마나 편한가. 내손으로 일일이 일정과 정보를 알아볼 필요가 없으니 시간과 노력도 절약돼서 좋다.

김용만, 김성주 등 출연 연예인들의 바람잡이도 나의 환상에 한몫을 보탰다. "역시 가이드 여행이 좋아", "가이드가 있으니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어서 좋다"는 추임새들. 그것이 사실은 모두 여행 상품을 홍보하기 위한 밑밥이었음을 그때 내가 어찌 알았을까.

남편과 나는 둘 다 여행을 좋아해서 일 년에 한번은 꼭 해외여행을 떠난다. 작년에는 일본, 재작년에는 미국과 중국을 다녀왔다. 모두 우리가 직접 비행기 티켓과 숙소를 예약하고 현지에서도 직접 발품을 팔아 정보를 구해서 다니는 일정이었다.

미국‧중국 여행은 2주, 일본 여행은 1주라는 짧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저가 항공과 현지 민박을 이용했기에 비용은 얼마 들지 않았다. 그냥 하던 대로 할 것을. 그놈의 '뭉쳐야 뜬다'가 내 맘에 불을 질렀다.

"오호라, 패키지 관광이야말로 괜찮은 여행이 아닐까?"

급기야 이달 초, 나의 설득에 넘어온 남편이 인터넷을 검색해 베트남으로 떠나는 패키지 상품을 찾아냈다. '날짜 임박 땡처리 특가.' 1인당 24만 9천원이라는 파격적인 가격에 하노이와 하롱베이를 관광하는 3박 5일 여행이었다.

야호, 24만 9천원에 베트남 여행이라니

당시 우리는 새 집으로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짐 정리도 다 안 끝난 상태였다. 하지만 '뭉쳐야 뜬다'에서 본 패키지 여행의 매력에 푹 빠진데다, 저렴한 여행 비용에 홀딱 넘어간 나는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없었다. 우리는 난장판이 된 집을 뒤로 하고 하노이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언젠가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내 인생의 버킷리스트 하롱베이! 얼마나 가슴이 설렜는지 모른다.

저녁 8시 반에 인천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밤 12시쯤 하노이 노이바이 공항에 도착했다. 함께 여행하는 팀원은 모두 22명. 그 중 두 명은 다른 비행기로 왔는데, 하필 그 비행기가 연착하는 바람에 나머지 스무 명이 공항에서 한 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했다. 알고 보니 서로 다른 여행사를 통해서 온 세 팀이 함께 움직이는 일정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크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TV에서 본 패키지 여행 팀원은 10여명이 될까 말까했는데, 우리 팀은 왜 22명이나 되는지 잠시 의아하긴 했지만. 가이드 말로는 그나마 지금은 수가 적은 거고, 가이드 한 사람이 40명 가까이 인솔하고 다닐 때도 있다고 했다.

첫날 밤은 바로 호텔로 이동해서 쉬고, 다음날 아침부터 본격적인 일정이 시작되었다. 조식 뷔페는 평범했지만, 눈앞에서 직접 만들어주는 오믈렛과 쌀국수는 정말 맛있었다. 쌀국수 담당 이모님이 손짓으로 알려준 대로 넣은 고추와 마늘 토핑은 우리 입맛에 꼭 맞았고, 신선한 라임즙을 아낌없이 짜 넣은 국물은 짜릿했다.

옌뜨 사원으로 올라가는 길. 관광을 왔으니 꾸역꾸역 올라가긴 했지만, 가파른 계단과 찌는 더위가 우리를 괴롭혔다.
 옌뜨 사원으로 올라가는 길. 관광을 왔으니 꾸역꾸역 올라가긴 했지만, 가파른 계단과 찌는 더위가 우리를 괴롭혔다.
ⓒ 임은경

관련사진보기


연유를 넣은 베트남 커피까지 한잔 하고, 9시 반에 가이드를 따라 호텔을 나섰다. 오늘은 옌뜨 사원을 방문하는 날이다. 우선 하노이 중심가의 호안끼엠 호수로 가서 스트리트 카를 타고 전통시장 거리인 36거리를 관광한 후 옌뜨로 출발했다.

베트남 고승들의 사리탑들이 즐비한 옌뜨 국립공원은 베트남 불교의 성지라고 한다. 하노이와 하롱베이의 중간지점에 위치해 있어서 하롱베이로 가는 길에 들르는 일정을 짠 것 같다. 케이블카를 타고 산을 오른 후, 다시 가파른 계단을 한참 올라서 사리탑과 사원을 구경하는 코스다.

공중에 대롱대롱, 케이블카에서 겪은 정전

그런데 케이블카에서 내려서 마주친 다른 한국 패키지 관광 팀의 표정이 하나같이 어둡다. 잠시 뒤 우리는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오르고 또 오르고.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경사가 가파른 계단을 한참이나 올라서 도착한 사리탑과 사원의 모습은 그냥 소박했다.

정말 오래된 문화재이고, 베트남 사람들에게는 소중한 성지라는 것까지는 이해하겠다. 하지만 외국인인 우리가 굳이 그 고생을 해가며 올라가서 봐야만 할 정도는 아니었다.

베트남은 9월까지 여름이어서 날씨는 찌는 듯이 더웠다. 한낮 기온 섭씨 33~4도. 땀으로 푹 젖어버린 등짝을 말리며 정상에 잠시 앉아있다 내려왔다. 2만동(우리 돈 약 천 원)을 주고 사먹은 베트남 아이스크림이 더위에 지친 몸을 조금이나마 달래주었다.

소박한 모습의 옌뜨 사원
 소박한 모습의 옌뜨 사원
ⓒ 임은경

관련사진보기


내려오는 길에는 정전으로 케이블카가 멈춰 서는 소동이 있었다. 케이블카 안에 갇힌 채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리게 되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정작 같이 탄 현지인 가이드는 늘 겪는 일이라는 듯 태평하기 짝이 없다. 베트남은 전력 수급이 원활하지 못해 정전이 드문 일이 아닌 듯했다.

심지어 이튿날 아침 하롱베이의 호텔에서는 나 혼자 엘리베이터 안에 갇히기도 했다. 방에 두고 온 물건이 생각나서 급하게 엘리베이터에 오른 순간 뚝, 암전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멈춰버렸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이런 갑작스런 정전이 오래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케이블카도 엘리베이터도 길어야 3,4분 내에 전원을 복구하고 정상 작동했다.

생각해보면 정전은 불과 30여 년 전 한국에서도 흔하게 겪던 일이다. '나 어린 시절에 한국에서도 가끔 전기가 나가서 밤에 촛불을 켜곤 했다'는 얘기를 현지인 가이드와 나누면서 산을 내려왔다.

친절하고 성실한 가이드가 사기꾼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만약 자유여행을 왔더라면 굳이 시간과 돈을 써가며 옌뜨에 가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저 패키지 관광의 특성상 3일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관광지 한 군데를 더 넣기 위해 옌뜨가 적당했을 뿐. 옌뜨 사원이 딱 하노이와 하롱베이의 중간 지점에 있기 때문이다.

정해진 시간 내에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 패키지로서는 되도록 가까운 거리 안에서 모든 일정을 해결하는 것이 유리했을 것이다. 잠시 뒤에 알게 된 것이지만, 패키지가 그토록 시간에 쫓겨 다녀야 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관광지 방문도 바쁜 일정이지만, 사실 가이드에게 더 중요한 것은 사흘 동안 4~5 군데 이상 들러야 하는 쇼핑센터 방문이었다. 일정표 상에 하루 종일 하는 것으로 잡혀 있었던 옌뜨 광관은 겨우 한 시간 안에 끝났다.

점심으로 먹은 쌀국수. 한국인이 운영하는 단체식당이라 그런지 한국 음식과 비슷한 맛이었다. 현지 음식을 먹어보고 싶던 우리에게는 좀 아쉬웠다.
 점심으로 먹은 쌀국수. 한국인이 운영하는 단체식당이라 그런지 한국 음식과 비슷한 맛이었다. 현지 음식을 먹어보고 싶던 우리에게는 좀 아쉬웠다.
ⓒ 임은경

관련사진보기


하노이에서 하롱베이까지 이동에 네 시간 정도가 걸린다는 것을 감안해도 너무 빈약한 일정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날 저녁식사 후 족제비똥 커피라는 위즐 커피 판매점에서 한 시간 이상을 보냈다. 옌뜨에서 보낸 시간만큼을 커피 쇼핑에 쓴 것이다.

한국인 사장의 열정적인 커피 강의(?) 후 5+3이라는 파격적인 조건에 홀려 일행 중 몇 사람이 위즐 커피를 구매했다. 그리고 이틀 뒤 출국하는 공항에서 우리는 그것이 시중보다 약 네 배 비싼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공항 가격 기준이니 시내의 가게에서는 더 저렴했을 것이다.)

너무도 친절하고 성실하고 말 잘 하는 가이드가 사기꾼으로 보이기 시작한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가이드는 하롱베이로 이동하는 도중 파인애플 농장에 들러 푸짐한 열대과일을 맛보여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농장에 내려 자리에 앉자마자 패키지에 필수로 따라붙는다는 소위 '선택 관광' 일정표를 들이밀었다.

*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태그:#패키지여행, #베트남여행
댓글7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대다수 사람들을 무의식적인 소비의 노예로 만드는 산업화된 시스템에 휩쓸리지 않는 깨어있는 삶을 꿈꿉니다. 민중의소리, 월간 말 기자, 농정신문 객원기자, 국제슬로푸드한국위원회 국제팀장으로 일했고 현재 계간지 선구자(김상진기념사업회 발행) 편집장, 식량닷컴 객원기자로 일하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