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한 장면. 주인공 병수는 기억이 흐릿하지만 본인이 분명 살인을 했다는 걸 기억하고 있다.

영화의 한 장면. 주인공 병수는 기억이 흐릿하지만 본인이 분명 살인을 했다는 걸 기억하고 있다. ⓒ 쇼박스


원신연 감독, 설경구 주연의 <살인자의 기억법>이 관객 수 250만 명에 육박했다. 손익분기점인 220만 명을 넘긴 숫자다. 이 정도면 보통 이상은 했다는 것이다. 여전히 주말 관객을 사로잡고 있는 영화가 바로 <살인자의 기억법>이다.

이야기만 놓고 보자면 한 편의 스릴러로서 손색이 없다. 어린 시절의 학대와 이로 인한 친부 살인, 아내의 외도와 이어지는 살인 등 과거 살인마였던 병수(설경구 분)는 너덜너덜해진 감정과 기억의 조각을 간신히 추스르며 살아간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수의사 병수는 경찰인 태주(김남길 분)를 만나 상대가 살인자임을 직감한다. 태주는 의도적으로 병수의 딸인 은희(설현)에게 접근한다. 병수는 기억과 싸우며 딸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특히 설경구의 연기와 김남길의 무게감만으로 영화는 쾌감을 선사한다.

하지만 개연성 없는 이야기와 연출이 매우 아쉽다. 영화의 미덕은 장면과 그 장면들의 이어짐에 있다. 어떤 이야기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관객들은 공감하고 웃거나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좋아하거나 혹은 불편해할 수도 있다. 그런데 <살인자의 기억법>은 제목에서도 나타나듯이 병수의 기억상실에 의존하고 있다. 주인공의 기억이 희미하기 때문에 화면상 전환이나 이야기가 끊기는 부분이 많다. 설정 자체가 그러하니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줄거리가 이어나가는 교차점들은 촘촘해야 한다. 아무리 주인공의 기억이 불분명하고, 그게 영화의 핵심이라고 하더라도 연결선은 필요하다. 최근 한국영화들의 문제점 중의 하나는 이러한 연결선들을 주인공의 독백으로 처리하려는 경향이 짙다는 것이다. <군함도>에서 민족의 비극과 개인의 수난사를 설명하는 장면들이나, <불한당>에서 주인공들의 브로맨스를 끊임없이 말로 확인하려고 했던 지점들은 이야기의 힘을 갉아 먹는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희미한 기억을 베일로 삼아 이런 문제점을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찬가지다. 심지어 병수의 목소리를 녹음해가면서까지 독백으로 이야기의 공백을 메우려고 한다.

이야기의 교차점들이 촘촘해야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태주와의 만남은 우연이다. 살인사건이 일어난 부근을 치매 노인(병수)이 차를 몰고 가다가 젊은 사람(태주)을 만난다. 그리고 단번에 서로가 살인마임을 직감한다. 언제나 영화에서 필요한 건 '어떻게'와 동시에 '왜'라는 물음이다. 전자는 연출과 장면, 연기 등으로, 후자는 서사와 이야기 등으로 나타난다. 병수와 태주의 만남은 '어떻게'는 있지만 '왜'가 없다. 안 그래도 기억이 가물가물한 병수의 말만 따라가는 건 관객에겐 힘든 일이다. 연출의 의도가 물론 흐릿한 '기억법'에 있다지만 그 기억들을 이어가는 데 우연적인 요소는 배제되어야 마땅하다.

또한, 영화 후반부에서 은희를 자신의 딸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장면 역시 어색하다. 이걸 반전이라고 한다면 분명 반전이다. 그러나 반전이 드러나기 전에 영화적 암시가 분명 있어야 한다. 아내의 외도가 있었다고 해서 한평생 키워온 딸이 순식간에 뒤바뀔 수는 없다. 막장 드라마가 아닌 이상 말이다. 자신의 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희생해왔던 동기나 회한 등이 사전에 독백이 아닌 행동이나 사건들로 구성되었어야 했다. 개연성이 부족하다.

출소 후 마지막 장면 역시 이상하다. 병수의 기억이 왔다 갔다 하니 이해하라고 한다면 억지다. 뜬금없이 병수 목걸이의 사진이 바뀌어 있다. 병수가 나타난 건 환영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게 다 기억상실, 알츠하이머 살인자의 기억이니 관객들이 감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영화의 큰 줄기를 놓치고 있는 셈이다. 메타포로서의 장치와 개연성 부족은 엄밀히 다르다.

영화의 미덕은 압축된 시간 속에 긴 사건들을 만나볼 수 있다는 점에 있다. 그렇다면 더더욱 압축된 시간은 세밀하게 계획되고 분할되어서 이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빈틈없이 구성된 장면들의 향연이야말로 관객들이 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살인자의기억법 설경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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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문화, 과학 및 예술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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