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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말로 기억한다. 어느 날, 실제 있었던 범죄 상황을 재연해 들려주는 '기막힌 이야기-실제상황'이란 프로그램을 보게 됐다. 결혼을 앞두고 동거 중인 여자에게 자신의 실체가 발각된 후 결혼을 다시 생각해보겠다는 여자 친구 몸 여기저기에 문신을 새기는 등, 여자를 지속적으로 학대한 남자의 이야기였다.

자신이 가르치는 남자 수강생 얼굴을 보거나, 몇 분만 늦게 집에 와도, 심지어는 글씨가 잘 안 보인다며 도움을 청하는 나이 든 경비원과 말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폭력을 가하는 남자. 또 벌로 문신을 새기는 등 남자는 당연한 듯 여자에게 범죄를 저질렀다. 이것으로도 모자라 여자에게 몇 천 만원에 달하는 돈까지 갈취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여자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닌 여러 차례나. 게다가 여자는 남자가 감시를 하는 상황에서도 출퇴근을 했다. 누구에게든 도움을 요청할 의지만 있으면 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이었지만, 어머니에게까지 알리지 못하고 되풀이해 당하기만 했다. 여자는 왜 말하지 못하고 당하기만 했을까?

물론 남자는 여자를 협박했다. 정말 헤어지거나, 누군가에게 사실을 알리거나, 자신의 뜻에 따르지 않으면 동영상이나 사진을 인터넷에 유포하겠다고. 가족들도 그냥 두지 않겠다고. 그게 무서워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여자를 이해해보려 했다. 그러나 이해하려고 하면 할수록 여자가 불쌍하고 안타까운 한편 여자가 처했던 상황에 화가 났다.

<꽃이 아니다, 우리는 목소리다> 책표지.
 <꽃이 아니다, 우리는 목소리다> 책표지.
ⓒ 로제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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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여자들이 세상을 바꾼다'란 부제의 <꽃이 아니다. 우리는 목소리다>(로제타 펴냄)는 그 방송을 보는 중 떠올려 읽은 책. 그날 밤부터 읽기 시작했다.

'최근 들어 우리 사회에서 많이 사용되기 시작한 '여성혐오'는 유독 오해와 논란을 많이 빚는 단어다. 영어 'misoginy'의 번역어인 이 단어는 단순히 여성에 대한 미움이나 증오를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을 성적 도구로 취급하는 것, 하나의 인격으로, 주체적인 인간으로 바라보지 않고 대상화하는 시각 모두를 가리킨다. "여성혐오를 하다니, 제가 여자를 얼마나 좋아 하는데요" 같은 발언은 이 단어가 어떻게 오해되고 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황현산은 <한겨레>에 기고한 ''여성혐오'라는 말의 번역론'이라는 칼럼에서 "남성 중심 사회에서 어머니에게, 아내에게, 직장의 여성동료에게, 길거리에서 만나는 여성에게, 심지어 만나지도 못할 여자들에게 특별히 기대하는 '여자다움'"이 모두 '여성혐오'라고 썼다. 즉 현실에서 존재하는 여성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들을 현실로부터 소외시키는 모든 태도와 방법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 27쪽에서.

그 여자도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쉽지 않았을 것이다. 방송에서 미처 언급하지 않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들 때문에 말이다.

어렸을 때부터 당연한 듯 강요되어온 '여자다움' 때문에 비롯된, 여자니까 어느 정도의 폭력이나 부당함은 참아야 한다는 잘못된 인식, (폭력을) 보고 자라 어느 정도의 폭력이나 부당함에 남들보다 무던한 감각, 자신을 위해 무엇이 바람직한지 모르는 부족한 자존감, 피해자이면서도 신고 등으로 남에게 알려지는 순간부터 당해야만 하는 따가운 시선이나 소외 그런 것들 말이다.

그와 같은 것들은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라 그녀 스스로 그래야 한다고 자기도 모르게 학습 당했을지도 모른다. 저자가 이 책을 쓰자 마음먹게 된 것은 "여성들이 자신들을 옭아매는 사회구조의 거대한 압박 속에서 내지르는 비명 소리에 귀 기울이면서"라고 한다.

그리고 "아직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목소리들이 책에 담긴 목소리들과 공명하여 그 울림이 넓게 퍼져나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벽을 무너뜨리는 힘이 되길 바라서"라고 한다.

강남역 살인사건 피해자가 전혀 모르는 남자에게 죽음을 당한 것은 단지 여자라는 이유 때문이다. 1장 '여자라서 죽었다'에선 이처럼 종종 범죄로 발전하기도 하는, 우리 사회 전반에 공기처럼 당연하게 스며있는 여성혐오에 대해 훑는다. 과정에 왜곡되어 있는 남자다움이나, 2016년 11월 모 대학에 붙었던 대자보 때문에 밝혀진 학생들의 단톡방 섹드립과 언어사건 등, 문화예술계에 만연한 성폭력 관련 사건들을 훑기도 한다.

"여자가 그게 뭐야?(여자가 그 모양이어서 어디에 쓰겠냐?)"
"여자는 일단 예뻐야…."
"60킬로 넘는 여자는 여자로 보이지 않는다."
"여자가 뭘 알겠어!(여자가 그런 것을 다 할줄 알고. 대단한데!)"
"천상 여자네!"

2장 '여자답게 아름답게'를 읽으며 생각났던 말들 일부다. 당연하게, 보편적으로, 참 흔하게 하는 말들이다. 2장에선 '여자다움'과 '아름다움'이 여성들을 어떻게 옥죄는지, 그 정교하고 악랄한 명령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3장에서는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남성이 100만원 받을 때 63만원 받는다든지 등 노동시장에서의 성차별에 대해 이야기한다.

4장에선 사랑으로 출발했으나 스토킹이나 데이트 폭력으로 끝나기도 하는 연애의 어두운 면을, 5장에선 가부장제도 속에서 남성들이 뒷짐 지고 있는 사이 시어머니에서 며느리로 이어지는 끝없는 착취 구조와, 모성 신화에 희생되는 결혼 이후 여성들의 삶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는 최근의 페미니즘 운동 그 풍경들을 들려준다.

저자가 '이 책을 쓰기 위해 만났던 여성들은 총 82명, 녹음 어플에 기록된 인터뷰 소요 시간은 무려 14524분, 녹취록을 푼 문서의 분량은 A4용지로 4026매'라고 한다. 저자가 이처럼 지난한 작업을 한 이유는 다양한 처지나 상황에 처한 여성들의 목소리를 최대한 담고 싶어서다. 책 전반에 걸쳐 여성들 스스로의 목소리를 녹여 들려준다. 전문가적 담론들이 아닌 실재하는 여성들의 고백이자 목소리라 훨씬 현실감 있게 와 닿았음은 당연하다.

'안데르센의 동화 <인어공주>에서 주인공 인어공주는 사랑하는 왕자 곁에서 인간으로 살기 위해 마녀에게 목소리를 내주고 다리를 얻는다. 마녀가 인어에게서 자기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인 목소리를 앗아간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인어는 왕자와 나란히 걸을 수 있게 되었지만 그녀가 사람이 되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왕자가 건네는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거나 미소 짓는 것 정도다. 사랑을 얻기 위해 인어가 잃어야 했던 것, 그것은 '발언할 권리'다.' - 6쪽 '프롤로그' 중에서.

그 방송을 본 지 한 달쯤 지났다. 그릇된 인식과 모순이 만들어낸 여자다움이 여성의 최고 미덕으로 간주되던 시대에 태어나 '여성=꽃'이란 인식이 상식이던 시대에 자란 여성으로서, 그리고 20대 딸을 둔 엄마로서 생각이 복잡하기만 하다.

책을 통해 우리 사회 수많은 '여자라서'를 만나며 내 스스로 부끄럽기도 하고, 무섭고, 한숨이 나오기도 했다. 여성인 나 또한 내 딸에게 은연 중 '여자니까'를 요구하고 있다는 자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여자가 살아가기에는 무서운 현실이란 한계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더욱 큰 필요성으로 읽은 책이 되었다.

덧붙이는 글 | <꽃이 아니다, 우리는 목소리다> (윤단우) | 로제타 | 2017-01-10 ㅣ정가 14,000원



꽃이 아니다, 우리는 목소리다 - 말하는 여자들이 세상을 바꾼다

윤단우 지음, 로제타(2017)


태그:#여성차별, #강남역살인사건, #페미니즘, #윤단우, #로제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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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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