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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평생을 헤매어 찾아왔건만
자욱을 뗄 수가 없네
아버님 누우신 자리

원수들의 총칼 앞에 가신 영혼들
역사는 흘러 국가의 원수가 몇 번이나 바뀌었는가
그중 한 사람도 참마음 양심 가진 이가 이리도 없었더냐

술 한 잔 부어 올릴 공간도 없이
더러운 쓰레기가 주인 행세하고 있으니
원통해 절규하는 울부짖음

.....

끌려가실 때 걸음마 배우던 어린 자식
반백 년을 훌적 넘어 오매불망 그리던 아버님 찾아왔건만
흔적 없는 학살 현장 기막힌 현실 앞에 힘없이 주저앉네

하늘이여 땅이여 거기 누구
내 아버님 가실 적에 본 사람 없소

대전산내사건유족회 회원 전숙자 시인의 한국전쟁 시기 억울한 누명으로 국가권력에 의해 학살당한 아버지를 생각하며 아버지가 묻혀 있는 산내 골령골을 처음 찾았던 2001년 5월 2일에 쓴 '골령골에서'라는 제목의 시 일부다.

전숙자 시인은 그간 산내위령제를 비롯하여 고양, 공주, 합천, 포항, 경주, 광주, 나주, 화순, 해남, 순천, 영암, 부산, 진주, 제주 등을 전국 위령제에 참석하며 쓴 시 등 160여 편을 모아 시집 <진실을 노래하라>(인권평화연구소)를 펴내고, 출판기념회를 갖았다.

 출판기념식에서 인사를 하고 있는 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 회원 전숙자 시인
 출판기념식에서 인사를 하고 있는 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 회원 전숙자 시인
ⓒ 임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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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잃은 슬픔 시로 승화... 서정시이자 서사시

9월 22일 오전 11시, 신촌의 케이터틀(구 거구장)에서 진행된 출판기념회에서 전숙자 시인은 "아무것도 모르는 시골 아낙네가 한권의 시집을 내놓기까지는 여러분들이 버팀목이 되어주셨다"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또한 그는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 정책은 한권의 책을 출판해 세상에 펼칠 수 있는 전화위복의 기회가 되었다"고 말했다.

이날 전숙자 시인은 자신이 가장 애착을 갖는다는 '나는 상중이오' 시를 낭독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표했다. 이 시는 '골령골에서'와 마찬가지로 그가 산내 골령골을 처음 찾았던 2001년 5월 2일에 썼고, 시집의 여는 시이기도 하다. 전숙자 시인은 또한 "붉은 허리띠 지울 자신 없으면 긋지나 말지... 오고 갈 수 없는 산천 구름만이 넘나드는 한 많은 삼팔선아 붉은 허리띠"라며 '붉은 허리띠'라는 제목의 시를 낭독하면서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통일을 희망하기도 했다.

이날 출판기념회에서 역사학자이자 이이화(금정굴인권평화재단 이사장) 선생은 "전숙자 시인의 시는 스스로 마음에서 우러나온 서정시이지만, 민족의 아픔 담고 진실을 찾는 서사시이기도 하다"며, "시집 제목 '진실을 노래하다'에 너무나도 걸 맞는 시들"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전숙자 시인의 시에는 한용운 시의 '한'에 버금가는 한이 서려있다"고도 말했다.

축사를 하고 있는 이이화 선생. 이날 출판기념식에는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을 비롯해 전국유족회 회원 등 50여명이 참석했다.
 축사를 하고 있는 이이화 선생. 이날 출판기념식에는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을 비롯해 전국유족회 회원 등 50여명이 참석했다.
ⓒ 임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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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숙자 시인의 아버지, 전재흥 씨는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을 했고 해방 후에는 사회주의 운동을 했던 동생의 도피를 도왔다는 이유로 군경에 의해 체포되었다가 1951년 3월 4일 산내 골령골에서 죽임을 당했다. 산내 골령골에서는 대전형무소 재소자를 비롯해 보도연맹원 등 7천여 명이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16일 사이에 학살되었는데, 9.28 수복이후에도 민간인 학살은 부역혐의를 씌워 지속되었다.

전숙자 시인의 부친의 경우도 부역혐의에 의한 학살에 해당된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전숙자 시인의 할머니, 할아버지는 전 시인의 어머니를 억지로 재가시켰고, 그 후로 그는 두 아들을 잃은 조부모 슬하에서 자라게 되었다. 하지만 가족에 대한 경찰의 감시와 괴롭힘 그리고 주위의 '빨갱이 자식'이라는 시선은 그의 삶을 고단하게 만들었다. 국민학교(초등학교) 4학년에 학교도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그런 삶 속에서 그는 일기를 쓰기 시작 했고, 일기는 시가 되었다.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진실을 찾아다니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고, 대전 산내 위령제뿐 아니라 전국의 위령제에서 추모시를 낭독하고 있다.

이날 출판기념회에는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 전국유족회 박용현 상임이사, 윤영전 감사, 경기도유족회 민경철 회장, 대전유족회 이계성 부회장, 인권평화연구소 신기철 소장 등 50여명이 참석했다.

전국유족회 윤영전 감사가 전숙자 시인에게 ‘眞善美文樂’이라고 쓴 족자를 선물하고 있다.
 전국유족회 윤영전 감사가 전숙자 시인에게 ‘眞善美文樂’이라고 쓴 족자를 선물하고 있다.
ⓒ 임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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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에 충남 서천군 시초면 선동리에서 태어난 전숙자 시인은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진실규명을 신청했다. 하지만 진실화해위원회는 2010년 6월 진실규명을 할 수 없다고 결정했다. 이에 시인은 이의를 제기했고, 다시 증언자들과 증거들을 찾아다녀 마침내 그해 12월 진실규명 결정을 받아냈다. 또한 대전지법 홍성지원에 사건에 대한 재심을 신청해 2011년 무죄 판결을 끌어냈으며, 2014년 10월에는 대법원에서도 부친의 억울한 죽음을 인정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통일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전숙자, #진실을노래하라, #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 #대전산내사건, #인권평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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