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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령산 전망대에서 겸손의 가치를 생각하며 썼다. 사람의 덕스러운 행위 가운데 으뜸은 겸손이다. 겸손은 사람의 가치를 높여 더욱 빛이 나게 한다.
▲ 謙尊而光, 겸손은 높고 빛난다 축령산 전망대에서 겸손의 가치를 생각하며 썼다. 사람의 덕스러운 행위 가운데 으뜸은 겸손이다. 겸손은 사람의 가치를 높여 더욱 빛이 나게 한다.
ⓒ 이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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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에서의 '갑질' 문제가 심심찮게 보도되는데, 상상만 해도 서글픈 광경이다. 막강한 힘을 가진 자가 기분 내키는 대로 화를 폭발할 때 힘없는 자는 고스란히 온몸으로 받아내야 한다. 생계가 걸린 문제, 특히 가족의 생계가 걸린 문제 앞에서 소시민은 한없이 무력할 수밖에 없다.

권력이든 금력이든 힘을 가진 사람에게 교만이 따르게 마련이다. 마치 이것은 자석에 쇠붙이가 들러붙는 것과 같다. 부와 권력이 생기는 곳에 인간의 관심과 탐욕은 집중되고, 알게 모르게 권력을 가진 자의 환심을 사려는 사람들 간의 충성 경쟁이 벌어지는 것이 필연적이다. 권력자 앞에서 서로가 잘 보이려고 경쟁을 하니, 그것을 지켜보면서 한껏 콧대가 높아지는 것이다.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수많은 권력자가 교만과 부패에 빠졌다는 것을 역사가 말해 주고 있다. 처음 권좌에 올랐을 때는 괜찮았던 사람도 시간이 조금 지나면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오만방자해져서 권력을 남용한다. 로마 제국의 실력자들이 어떻게 타락해 갔는지를 옆에서 지켜보았던 저술가 플루타르크는 "권력과 자리는 사람의 심성을 드러낸다. 어떤 짐승도 권력을 손에 쥔 인간만큼 잔인하지 않다"라고 기록했다. 교만한 권력은 시퍼런 칼날처럼 비정하고 잔인하여 사람의 생명마저 하찮게 여기고 인간의 존엄성을 함부로 유린한다.
 
2400여 년 전 신탁을 받으러 델포이로 간 소크라테스는 신전에 새겨진 경구를 보고 무릎을 쳤다. 거기엔 "너 자신을 알라(Nosce Te Ipsum)!"라고 적혀 있었다. 원래 이 경구는 신이 인간에게 주는 경고문이다. 유한한 인간이 마치 신이라도 된 양 건방 떨지 말라는 경고다. 인간이 분수를 모르고 교만하게 굴다가 신의 심판을 받는 이야기는 그리스 비극의 단골 소재이다.

테베의 왕비 니오베는 아들 일곱과 딸 일곱을 두었다. 일곱 명의 아들은 모두가 미남자에 용감했고, 일곱 명의 딸들은 너무도 아름답고 우아했다. 잘난 14남매를 둔 니오베는 아폴론과 아르테미스 남매를 낳은 여신 레토를 깔보았다. 그 당시는 자녀의 수가 대단한 자랑거리였다. 가는 곳마다 자식 자랑을 하면서 겨우 남매만을 낳은 레토 여신을 깎아내렸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여신 레토는 아들 아폴론과 딸 아르테미스를 불러 눈물로 하소연했다. 남편 없는 것도 서러운데 보잘것없는 인간에게까지 모욕당한다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분한 마음을 알게 된 남매는 분기탱천하여 곧바로 응징에 나섰다. 궁술의 신 아폴론이 쏜 화살이 니오베의 멋진 아들들의 몸뚱이를 여지없이 꿰뚫었다. 그 충격에 니오베의 남편이자 테베의 왕인 암피온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래도 니오베는 딸 일곱이 남았다며 뻣뻣하게 굴었다. 아르테미스가 날린 화살이 니오베의 아름다운 딸들마저 하나씩 쓰러뜨렸다. 막내딸만 남자 그제야 니오베가 레토 여신에게 애원했으나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난 뒤였다. 생때같은 아들 일곱과 딸 일곱의 시신을 본 어머니는 그 엄청난 슬픔을 감당할 길이 없어 돌이 되었다. 돌이 되어서도 니오베의 눈에서는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고 한다.

인간이 주제넘게 신에게 대들거나 신의 영역을 넘보는 짓을 '휴브리스(Hubris)'라고 한다. 영국의 역사학자이자 문명비평가인 토인비가 과거에 성공한 사람이 자신의 능력과 방법을 우상화함으로써 오류에 빠지게 된다는 뜻으로 사용한 역사 해석학 용어인데, '지나친 자신, 오만, 오만에서 생기는 폭력' 등을 뜻한다.
 
교만은 악마의 정원에 피는 치명적인 꽃이다. 그 향기에 취해 수많은 사람이 독살되었고, 한 번 취하면 약이 없어서 결국 파멸로 이어졌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간절히 염원하는 것이 부와 명예다. 부와 명예는 가지면 가질수록, 지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더 크게 누리고 부리고자 하는 욕심이 커진다. 교만에 빠지면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버릇이 생긴다. 권세를 지닌 자가 힘을 과시하면 약자들은 눈앞에서 벌벌 떨고 긴다. 날아가는 새도 입김으로 떨어뜨리는 권세의 매력은 참으로 달콤할 것이다. 약자에게 수치심을 주거나 모욕을 가해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거기서 얻는 만족감이 꿀보다 달콤하겠지만, 당하는 사람의 처지에서는 치욕으로 쌓아두게 된다.

인간은 누구나 멸시당하는 걸 싫어한다. 누구나 존중받고 싶어 한다. 타인으로 인해 자존심에 상처를 받으면 갚아줄 마음이 생기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인간의 보복 심리는 잔인하게 표출되기도 한다. 당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가 그에게 받은 것에 이자까지 붙여 돌려주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참으로 많은 사람이 교만해지는 병을 경계했고, 경구를 만들어 후세에 전했다. 한나라 유향이 정리한 <전국책>에 "부귀한 자는 교만과 약속을 하지 않아도 교만은 스스로 찾아오고, 그 교만은 망하는 일과 약속하지 않아도 망하는 일이 스스로 찾아든다(貴不與驕 期驕自來 驕不與亡 期亡自至)"라는 구절이 나온다. 부귀해지면 교만해지기 쉽고, 교만해지면 망하게 된다는 말이다. 교만의 끝은 결코 아름답지 못하다. 개망신을 당하거나 파멸로 이어지기에 십상이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헌신짝처럼 여기며 살았던 사람도 적지 않다. 예컨대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와 같은 사람도 존재했었다. 하루는 어떤 부자가 디오게네스를 집으로 초청했다. 그에게 자신의 집을 자랑하기 위해서였다. 부자의 집은 으리으리했다. 정원은 온갖 기화요초로 가득했고, 집안은 각종 보석으로 사치스럽게 꾸며졌다. 그는 자기 집을 자랑하는 데 여념이 없어 디오게네스에게는 단 1분도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때 별안간 디오게네스가 부자의 얼굴에 가래침을 '퉤!' 뱉고서 말했다.

"당신의 집은 너무 깨끗하고 아름답군요. 그래서 아무리 둘러보아도 내가 가래침을 뱉을 만한 곳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단지 교만과 위선으로 가득한 당신의 얼굴이 내게는 쓰레기통처럼 보이는군요."

이 예화처럼 얼굴에 침이라도 뱉어주고 싶은 사람을 만날 때도 있다. 우리 주위에는 겸손하지 못한 부류들이 너무 많다. 권력을 거머쥐었다고 거들먹거리는 정상배들, 어쩌다 재물을 손에 쥐었다고 거드름을 피우는 졸부 따위가 그들이다. 교만에 빠진 그들은 주변 사람들을 우습게 보고, 불쌍한 인생으로 무시한다.

하지만 내일을 장담하지 못하는 것이 인생이다. 앞날에 어떤 일을 겪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떵떵거리던 재벌이 순식간에 부도가 나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건강하던 사람도 하루아침에 사고를 당하거나 죽을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게 된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이 얼마나 연약하고 별것 아닌 존재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생은 잘 풀릴 수도 있고 잘못 풀릴 수도 있다. 그러기에 지혜로운 사람은 일이 잘될수록 더욱 조심하고 겸손한 자세를 유지한다.
 
영국에 있는 한 교회는 출입문이 유난히 낮아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고 그 문을 출입해야 한다고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부딪칠 게 틀림없기 때문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겸손이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자신을 품위 있게 드러내는 방법은 바로 겸손이다. 자신을 낮출수록 더더욱 높아지는 힘, 그게 바로 겸손이다.

20세기를 보내고 21세기를 맞이하는 지난 2000년 말, 영국의 권위 있는 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세계의 석학들에게 인류가 20세기에 반성할 점은 무엇이며, 21세기에 갖춰야 할 덕목이 무엇인지 묻는 글을 실었다. 이 물음에 대다수 석학이 같은 답변을 제시했는데, 그 답은 바로 '지식적 겸손(Intellectual Humility)'이었다. 인류가 지난 세기를 너무 겸손하지 않게 살았으며, 다가올 세기는 이를 반성하고 좀 더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얼마나 아는지를 기준으로 경쟁하는 시험장이다. 갖가지 시험을 거치면서 나와 다른 사람을 비교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상대방이 자신보다 탁월하면 좌절하고 열등감에 빠지지만, 반대로 상대방이 자신보다 못하면 우월감을 느끼고 그를 우습게 여긴다. 그러나 인간이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인간이 지닌 지식이라는 것은 정말 보잘것없고 하찮다. 전공 분야를 떠나면 낯설고 모르는 것투성이다. 정말 사소한 지식을 가지고 무슨 대단한 지식인 양 허세를 떠는 허풍선이들도 많다. 교만이라는 중병에 걸린 탓이다.

교만한 사람은 말과 행동으로 남에게 우월감을 인정받으려 하면서 상처를 주지만, 겸손한 사람은 결코 남의 인격을 짓밟는 언행을 하지 않는다. 낮고 천한 곳에 있을 때 겸손해지는 것은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칭송을 받고 있을 때 겸손해지는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며, 성취하기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겸손한 사람은 개구리가 되어서도 올챙이 적 시절을 잊지 않는다.

살다 보면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때가 있다. 세상에는 엄청난 양의 지식이 존재하고, 끝없이 생겨나고 있다. 예전에 배운 내용이 잘못되어 수정된 경우도 적지 않다. "내가 배울 때는 이렇게 배웠어" 하고 고집을 부리는 사람을 왕왕 만나는데 여간 피곤한 것이 아니다. <탈무드>에 "혀한테 열심히 모른다고 가르쳐라"라는 말이 있다. 스스로 많이 아는 체하는 사람은 수영도 할 줄 모르면서 물에 뛰어드는 것만큼 어리석은 사람이다. 빈 수레는 요란하지만 가득찬 수레는 그렇게 요란한 소리가 나지 않는다.
 
<주역>(周易)의 64괘 가운데 모두가 길한 것은 오직 겸괘(謙卦)뿐이다. 겸은 땅속에 산이 있는 형상으로 '지산겸(地山謙)'괘라 부른다. 겸괘 단사(彖辭)에 '겸존이광(謙尊而光)'이란 말과 더불어 "하늘의 도는 가득한 것을 일그러뜨려 겸손한 자를 보태주고, 겸손한 자를 복 주며, 사람은 가득한 자를 싫어하고, 겸손한 자를 좋아한다"라는 가르침이 있다.

겸손은 구시대의 유물이 아니다. 겸손은 자신을 빛나게 하며 타인으로부터 존경받게 하고, 오래도록 향기를 드러내게 하는 강력한 힘이 있다. 기독교의 역사 가운데 성자라고 불릴 만큼 큰 업적과 아울러 흠모할만한 신앙과 인격을 지녔던 어거스틴에게 어떤 사람이 찾아가서 질문했다. "신앙생활에서 첫째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거스틴은 "겸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물음에도 역시 '겸손'이라고 대답했다. 어거스틴은 "천사를 마귀로 만든 것은 교만이며, 인간을 천사로 만든 것은 겸손이다. 모든 미덕의 바구니가 겸손이다"라고 했다.

사람은 누구나 교만한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교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교만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한다. 잘난 척하는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이 잘난 척하는 꼴은 못 본다. 반대로 겸손한 사람은 모두가 좋아한다. 지식도 겸손의 바구니에 담겨야 가치가 있다. 능력도, 돈도, 아름다움도, 권력도 겸손의 바구니에 담길 때 아름답고 훌륭하다. 겸손한 사람은 모든 사람으로부터 호감을 산다. 언제나 겸손은 높고 가장 빛이 나는 인간의 가장 큰 지혜이며 미덕이다.



태그:#인문학적 붓장난, #謙尊而光, #축성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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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문학 21』 3,000만 원 고료 장편소설 공모에 『어둠 속으로 흐르는 강』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고, 한국희곡작가협회 신춘문예를 통해 희곡작가로도 데뷔하였다. 30년이 넘도록 출판사, 신문사, 잡지사의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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