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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경북은 '한국 보수의 정치적 고향'으로 꼽힌다. 대구경북 사람들도 스스로 그렇게 믿으며 살아간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이후 정치적 위기와 분열에 처한 보수 세력이 가장 먼저 달려간 지역도 대구경북 지역이었다. 타 지역 사람들은 대구경북의 이런 모습을 바라보며 다양한 반응을 보인다. 때로는 안타까워 하거나, 때로는 이상하게 여기거나, 때로는 '지역이기주의'라며 비난을 퍼붓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대구경북의 보수 지지세는, 예전에 비하면 약화됐다고도 볼 수 있지만, 여전하다.

하지만 역사를 되돌아보면, 과연 대구경북을 보수의 정치적 고향으로 볼 수 있을지, 또 현재 대구경북인 스스로의 믿음이 옳은 것인지 의문스럽다. 지금부터 대구 10월항쟁 71주년을 맞아 현대사 속 대구경북의 진면목을 살펴보자.

대구 경북이 진원지가 된 10월항쟁과 2.28운동

지금으로부터 71년 전, 그러니까 해방 직후 미군정 시기였던 1946년 10월, 남한 각지에서는 1919년 3.1운동 이래 최대 규모의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당시 미군정 당국에서는 이 전국적 민중봉기를 두고 '북한'과 '공산주의자'들의 지령에 의해 발생한 것이라 설명했지만, 그러한 증거를 제시하지는 못했다.

전국적 민중봉기의 주요 원인은 해방 이후 살아남은 친일 경찰 및 군정 관리들의 민중에 대한 횡포와 미군정의 쌀 수급정책 실패에 있었다. 특히 미군정의 이른바 하곡수집 정책은 일제 때의 공출과 다름없는 것이었다. 더욱이 이해 6월 대규모 홍수를 겪어 생산량 감소에 직면한 농민들로선 군정당국의 미곡 수집 정책에 격렬하게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식량정책 실패의 결과는 곧 농민들의 생활난이었다.

봉기를 일으킨 농민과 민중들은 미군정 당국에 식량난에 대한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한편, '친일파 척결' 및 '미군정 반대'를 외쳤다. 그 일환으로 민중들은 경찰서와 지서를 잇달아 공격했다. 이들은 때로 경찰관을 생매장할 정도로 경찰에 대한 적대감을 분출했다.

이는 미군정 설치 이후 재등장한 친일 경찰들이 군정당국의 '대민(對民) 무장력'으로 역할했기 때문이었다. 경찰들은 해방 이후 각지에서 자생적으로 결성된 인민위원회를 탄압하고, 농민들에게 미곡 수집을 강제했으며, 사상, 표현, 양심의 자유 및 파업 등을 억눌렀다. 미군정의 마글린 대령이 당시 경찰들을 두고 "그들이 일본인을 위해서 훌륭히 임무를 수행했다면 우리(미국)를 위해서도 그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라고 발언한 사실은, 이러한 저간의 사정을 웅변한다. 이는 민중들의 자주적 주권국가 수립 요구로 이어졌다.

1946년 10월부터 이해 연말까지 남한 전역 각지에서 발생한 이 민중항쟁을 역사에선 '10월 항쟁', 또는 '10월 인민항쟁'이라 부른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전국적 민중항쟁의 진원지는 대구였다.

1946년 10월 1일 저녁 7시, 대구역 앞에선 총성이 울렸다. 경찰이 파업 중이던 노동자들을 향해 총을 쏜 것이다. 이날 오후 1시, 운수 금속 화학 노동조합 노동자 5백여 명은 대구역 앞에서 집회를 열었다. 그러자 경찰 측은 이들의 해산을 시도했고, 그 과정에서 1만 5천명으로 불어난 군중은 무장경찰의 철퇴를 주장하며 해산을 거부했다. 급기야 오후 6시에는 군중과 경찰 간에 상호 물리적 충돌이 벌어졌다. 그로부터 1시간 후, 갑자기 총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경찰이 무차별 사격을 개시한 것이다. 그 결과 학생 1명이 사망하자 격분한 학생과 시민들은 다음날 대구경찰서를 접수한 뒤 경찰들을 끌어내고 유치장 문을 열어 죄수들을 석방하였다. 이때 몇 명의 젊은 경찰들은 경찰복과 총을 버리고 학생 측에 합류했다.

이 소식은 곧바로 대구시내 전역으로 퍼졌다. 이에 대구시내 각지에서 봉기한 민중들은 경찰을 발견하는 즉시 공격했다. 그러자 경찰은 미군정의 명령을 얻어 수만의 군중이 모여 있던 파업투쟁위원회 본부를 습격했다. 이때 경찰의 발포로 군중 측 인원 18명이 사망했다. 결국 사태는 미군이 출동하고 계엄령이 선포되며 가까스로 끝났지만, 대구시민들의 봉기는 삽시간에 인근 경남북지역을 비롯한 전국으로 확산됐다.

대구가 전국적 민중항쟁의 진원지가 된 사례는 또 있다. 바로 1960년 4월 민중혁명의 도화선이 된 2.28학생운동이다. 1960년 2월 28일은 곧 있을 3·15정부통령선거를 맞이해 대구에서 야당(민주당) 후보의 선거 유세가 예정되어 있던 날이었다. 그러자 당국은 이날이 일요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구 시내 학생들의 유세장 참여를 막기 위해 등교를 지시했고, 이에 반발한 고등학생들은 "학원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고 외치며 거리로 나섰다. 이 시위는 4월 민중혁명의 전주곡이자 이후 30년간 전개된 학생운동의 원조였다. 1960년 4월 민중혁명 직후 교원노조활동이 가장 먼저 일어난 지역 역시 대구와 부산이었다.

조봉암을 지지하고 김대중의 신민당에 투표한 대구


이러한 대구 경북의 진보적 성향은 대통령선거, 국회의원 총선거와 같은 투표결과에서도 드러났다. 1956년 5·15정부통령선거에선 대통령 후보로 자유당의 이승만과 진보당의 조봉암이 맞붙었다. 조봉암은 당시 진보진영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개표 결과는 놀라웠다. '민족의 태양'이자 '국부'를 자처했던 이승만의 득표율이 55퍼센트 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부통령에는 보수 야당 민주당의 후보였던 장면이 당선됐다. 관권에 의한 전면적 부정선거였음에도 이승만은 압도적 당선에 실패했고, 부통령마저 야당에 내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투표에 이기고 개표에 지고"라는 유명한 말이 떠돌았다. 특히 진보진영 후보 조봉암이 얻은 표는 216만 표(전체 유효투표자 수 906만 7063명)로 집계됐던 바, 지금까지도 대통령선거에 출마한 진보진영 후보 중 조봉암 후보의 득표수를 능가한 사례는 없다.

그런데 전국에서 조봉암 후보한테 최다 투표한 지역이 대구경북이었다. 중앙선관위 자료에 따르면, 경북(대구 포함)에서 조봉암은 50만 1,917표를 얻어 44.7%를 기록했다. 이는 득표 비율로만 따지면, 전국에서 가장 많은 것이었다.(득표수로는 경남이 1위) 특히 대구에서는 조봉암 지지표가 이승만 지지표를 능가했다고 한다(서중석, <조봉암과 1950년대>상, 150쪽 참조).

해방 이후부터 지속된 대구 지역의 진보적 성향이 이 선거에서 분출됐던 셈이다. 1960년 4월 민중혁명 이후 치른 7.29총선에서 진보진영(사회대중당) 후보가 당선된 지역 역시 대구였다.

이런 양상은 1970년대 초까지 이어졌다. 박정희와 김대중이 맞붙은 1971년 4월 대통령선거에서 대구경북은 압도적으로 박정희를 지지했지만, 그 다음 달에 치른 국회의원 총선거에선 정반대의 양상이 나타났다. 대구의 경우 전체 지역구 5석을 당시 야당이던 신민당에 몰아주었던 것이다. 부산 역시 이때 전체 지역구 8석 중 6석에서 야당 후보가 당선됐다.

군사독재정권과 보수 세력의 프레임에 넘어간 대구경북

그렇다면, 해방 이후 이토록 진보적 성향이 농후했던 대구경북은 왜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바뀐 것일까?

우선 박정희 정권이 조작한 1·2차 인민혁명당 사건(1964년과 1974년)을 거치며 대구지역 (학생)운동 세력이 "뿌리가 뽑혔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타격을 입은 사실을 꼽을 수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박정희 정권의 집요한 지역주의 흑색선전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지역차별 정책은 1960년대에도 있었지만, 유권자를 대상으로 한 지역주의 마타도어는 1971년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대선 직전, 박정희 정권은 영남지역에 "신라 임금을 뽑자"는 둥, "김대중 후보가 정권을 잡으면 경상도 전역에 피의 보복이 있을 것이다"라는 둥의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한편, "호남인이여, 단결하라"는 전단지를 뿌리기도 했다.

한마디로 박정희 정권은 재집권 및 영구집권을 위해 지역 분할 통치라는 정치공작을 감행했던 것이다. 그것이 이후 한국인에게 남길 상처와 악영향은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전략이 꼭 성공한 것도 아니었다. 왜냐면 박정희 유신체제가 붕괴된 직접적 계기는, 1979년 10월 부산-마산 지역에서 일어난 '부마민주항쟁'이었기 때문이다.

영남 사람들이 군사독재정권의 통치술이었던 지역주의를 완전히 내면화한 시점은 1980년대였던 것으로 보인다. 1980년 신군부의 광주학살과 광주항쟁은 호남 지역 사람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광주의 진상에 대한 정보가 통제된 상황 속에서 영남지역 사람들은 오랫동안 광주항쟁을 "폭동"이라 믿었다. 신군부의 선전과 날조를 그대로 수용한 것이다. 이후 광주의 진실이 밝혀진 뒤에도 영남지역 사람들의 인식은 바뀔 줄 몰랐다. 그래서 지금도 대구경북의 70~80대 노인들 중에는, 그러한 인식에 젖어있는 분들을 만날 수 있다.

이와 함께 박정희 정권 이래 군부독재 정권의 핵심에 오랫동안 영남출신(이른바 TK) 인사들이 기용되고, 경제개발의 과실이 영남지역에 편중되며, 장기간 군사독재정권의 지역 분할 통치 공작에 노출된 상황은 1987년 6월항쟁 이후 치러진 역대 투표 결과에 그대로 반영됐다.

특히 1987년 6월항쟁 이후 양 김씨(김영삼, 김대중)의 분열과 지역 연고에 기댄 선거 전략은 전두환 정권의 정치공작과 맞물리며 이런 상황을 더욱 부채질했다. 그 결과 1987년 제13대 대통령선거와 이듬해 치러진 13대 총선은 지역 대결 선거로 변질되었다. 군사정권의 지역 분할통치 공작이 민주화 이후 현실화된 역설이 일어났다고나 할까.

그러나 대구경북의 지역주의는, 말 그대로 '지역 이기주의'에 불과한 사실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었다. 호남의 경우 광주학살, 광주항쟁을 겪으며 군부 집권(보수) 세력으로부터 엄청난 피해를 당한 데 따른 정치적 자각에 의한 것이었던 반면, 대구경북의 경우 그러한 정치적 자각도, 뚜렷한 명분도 없는 지역주의였다.

예컨대 1991년 김기춘이 초원복집에서 외쳤던 "우리가 남이가!"라는 유명한(?) 말은, 대구경북 지역주의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그 말인즉슨, '우리 지역이 그동안 누려온 특혜를 빼앗기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광주학살을 겪었던 호남에 대한 공감이나 군사독재 잔당을 표로서 심판해야 한다는 의식은 전혀 없었다.

그런 속에서 대구경북 지역은 정치적 '명분'이자 '상징'으로서 죽은 박정희를 신격화한 '박정희 신화'를 내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현실'이 아닌, '신화'에 의존하는 의식구조의 장기화는, 그야말로 '집단적 퇴행현상'에 다름 아니었고, 대구경북 지역정치의 역동성을 무력화시켰다.

촛불 이후, 대구의 진로는?

흔히 대구경북을 '보수의 고향'이라고 하지만, 지금까지 쭉 살펴보았듯이 대구경북 사람들이 처음부터 보수를 지지했던 것도 아닐 뿐더러, 보수를 지지해야 한다는 당위성에 입각한 의지를 지녔던 것도 아니었다.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어쩌면 지금까지 대구경북 스스로가 자기 최면에 갇혀 있었던 것은 아닐까.

대구경북의 지역주의는 군사독재정권의 장기간에 걸친 지역 분할 통치 공작과 프레임, 그리고 군사독재정권 기간 동안 누려온 특혜를 빼앗기지 않겠다는 의식이 복합되며 1987년 이후부터 본격화된 것이었다. 아울러 이는 군사독재정권 부역자들이 스스로 '보수'로 '변장'하며 정치적 생존을 도모한 1990년대 초의 상황과도 맞물려 있었다. 그들은 민주화 이후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보수를 참칭(僭稱)하고, 대구경북을 '보수의 정치적 기반'으로 호도하며 역사적 진실과는 거리가 먼 허상의 프레임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촛불혁명과 정권교체 이후 작금의 국면은, 대구경북이 새롭게 깨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도 말할 수 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이명박 정권 게이트는, 지금까지 대구경북을 지역기반으로 삼아온 '가짜 보수'의 실체를 여지없이 폭로한 사건이자 '박정희 신화'가 그야말로 '신화'에 불과한 것임을 현실 속에서 입증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대구경북이 '박정희 신화'라는 '집단적 퇴행'에서 탈피해 새로운 자각에 이르기를, 대구 10월항쟁 71주년을 맞아 간절히 소망해본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저는 대구 시민입니다. 대구 경북 지역사람들이 자신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오늘의 모습을 반성하며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는 데 이 글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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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연,『박정희와 개발독재시대』, 역사비평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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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중석,『대한민국 선거이야기』, 역사비평사, 2008
정해구,『전두환과 80년대 민주화운동』, 역사비평사, 2011



성균관대학교 사학과에서 공부했다. 아나키즘에 관심이 많다. 총체적 반역으로서의 역사학과 그것의 사회화를 위하여. 노동, 생태, 평화의 가치가 전면화된 사회, 땀흘리는 사람들이 당당해질 수 있는 사회를 향해.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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