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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은 감자 같은 거다. (몸에) 좋은데 날것으로 먹기는 힘든 감자 같은 거. 그래서 먹기 좋게 만든 거다. 축약본을 보고 관심이 가면 그때 완역본을 찾아 읽는 것도 나쁘지 않다. 아예 읽기조차 하지 않는 것보다는."

'고전은 완역본으로 읽어야 한다'는 굳건한 믿음을 이제는 조금 깨도 좋을까? 지난 9월 초 진형준 교수의 <생각하는 힘 : 세계 문학컬렉션> 출간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두 학자는 필연적으로 '문학(고전)의 축역본' 시대가 도래했음을 역설했다. 먼저 홍익대 채수환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아이들이 소설을 안 읽는다. 요즘 아이들은 영상만 본다. '소설을 왜 읽어?', '소설이란 게 세상에 필요해?' 이렇게 생각하는 게 대한민국의 젊은 세대다. 대학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정년이 2년 남았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필연적으로 패배할 수밖에 없는 싸움을 더 이상 안 해도 되니까(웃음). 소설을 공부하는 사람들이라면 <전쟁과 평화> <돈키호테> <레미제라블> 이 셋은 읽어야 하지만, 다 안 읽는다. 읽기 쉽지 않다. 소설을 전공하는 아이들도 이런데, 다른 독자들은 어떻겠나.

장편 소설이라는 세계는 앞으로 없어질지도 모른다. 고독 속에서 인간의 내면이 성장할 수 있는 그런 독서의 경험이 이제는 없어질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문학이라는 낡은 장르로, 신춘문예라는 낡은 도전 방식에 몇 천 명의 사람들이 몰린다. 문제는 문학으로의 관심과 열망을 어떻게 이끌어 낼 것인가이다. 축역본이 필요한 이유다. 책을 볼 시간이 없다. 필연적으로 줄여서 읽을 수밖에 없다. 우선은 많이 읽히고 볼 일이다. 이 시점에 이런 책이 나온 건 이건 문화사회적으로도 중요한 자극이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전권과 <수의사 헤리엇의 개 이야기> 등 제임스 헤리엇 시리즈 3권을 번역한 번역가 김석희씨도 말을 이었다.

"청소년 아이를 둔 엄마가 이런 말을 하더라. 고전이 어려운 건 번역의 문제가 아니냐고. 고전이 어려운 건 고전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쉽게 읽는 거라면 고전이라는 반열에 오르지 못했을 거다. 물론 고전이 읽는 과정에서 어려움은 있다. 하지만 그런 걸 이겨내다 보면 정신이 성장하는 것을 스스로 체크할 수 있다.

문제는 자기 세계를 넓혀가는데 꼭 필요한 고전이 이렇게 어렵기만 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다. 번역하는 입장에서 고전 읽기와 번역이 섞여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너무 텍스트를 숭배하는 경향이 있다는 말이다. 텍스트에 지나치게 갇혀서 우리와 관계 없는 맥락까지 읽게 해서 (읽는 것 자체를) 지치게 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 점에게 청소년뿐만 아니라 성인들이 읽기 편하게 만든 이 시리즈가 문학을 통해서 상상하는 힘을 키우는데, 좋은 역할을 하리라 기대한다."

진형준 교수의 <생각하는 힘: 세계 문학컬렉션> 출간 기자회견
 진형준 교수의 <생각하는 힘: 세계 문학컬렉션> 출간 기자회견
ⓒ 최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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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의견에 반박이 나오는 건 당연하다. 김씨의 말마따나 '어려운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곧 정신이 성장하는 것'이니, 힘들더라도 원문대로 읽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거다. 그런데도 기획부터 출간까지 살림출판사가 이 시리즈를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는 하나란다. "아무리 좋은 책이라도 독자들이 읽지 않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저자 진형준 교수의 말이다.

"일리아스부터 카뮈까지 100권의 대장정이라니, 신나는 작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작업에 들어가자마자 기대가 깨졌다. 못 읽겠더라(웃음). 너무 길더라. 재미가 없어서 못 읽겠더라. 책을 꽤 읽은 편인 내가 그랬다. 이걸 어떻게 책으로 내나 걱정이 들었다. 그러던 중에 심만수 사장이 말한 '청소년들을 지금 이대로 두면 안 되겠다'는 마음이 상승작용을 일으켰다. 나 자신도 읽기 어렵다고 생각한 그 사실이 오히려 용기를 내게 만들었다. 그래서 더 신나고 재미났고 열정을 쏟을 수 있었다. 아무리 몸에 좋아도 입에 쓴 약을 먹어라 먹어라 하기보다는, 당의정이게 만들자. 위선은 그만 두자.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삼킬 수 있는 그런 약을 만들자. 그 생각을 하고 매달렸다."

그렇다면 '어떻게' 축약했다는 걸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정 교수의 말이 이어졌다.

"축역본을 만들면서 정한 원칙은 세 가지다. 우선 책 선정은 많은 사람들이 이미 고전으로 평가한 것을 대상으로 하되, 가능하면 시대 변화에 따른 인간 삶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것을 고대부터 현대까지 체계적으로 엮으려 했다. 두 번째는 문학성과 원전의 정신은 살리되,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게끔 우리말로 된 새로운 작품을 쓴다는 각오로 썼다. 우리는 축역에 대한 많은 오해를 갖고 있다. 축역은, 원작의 정신을 놓치지 않고 포착하면서 그것을 줄여서 사람들 입맛에 맞게 쓸 수 있다면 그것은 아주 좋은 의미에서 의역의 하나라고 본다.

이 시리즈를 쓰면서 원전 전체 내용을 요약하는 방법은 아예 취하지 않았다. 작품의 중요 부분을 발췌해서 짜깁기하는 방식도 취하지 않았다. 과감하게 생략할 수 있는 부분을 생략했다. 축약의 첫 번째 과정은 돼지꼬리다. 생략이다. 독자의 접근을 어렵게 만드는 내용은 생략했다. 어디는 건너뛰고 읽어야 할지 작품에 몰입되지 않으면 판단하기 어려운데, 그걸 제가 대신했다고 생각한다. 원작에 충실하게 그래도 옮긴 부분도 있고, 작가의 생각을 보다 깊이있게, 은밀하게, 뚜렷하게 드러내는 데 도움이 된다라고 판단하면, 필요한 경우는 제가 덧붙인 내용도 있다(이 부분은 현장에서도 의견이 엇갈렸다 - 기자말).

세 번째로 문학 작품을 읽고 이 글을 쓰면서 제가 느낀 재미를 독자들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거였다. 이전에 보지 못한 것을 보게 됐을 때의 재미, 이런 걸 감동이라고 하는데 그걸 느낄 수 있는 훈련을 하게 해주려고 했다. 우리 사회가 아이들에게 그런 재미를 느낄 기회나 훈련을 줄 기회가 적었다고 생각한다. 축역이 원본 고전 무용론은 아니다. 그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라고 생각하면 좋겠다."

진형준 교수의 <생각하는 힘: 세계 문학컬렉션>
 진형준 교수의 <생각하는 힘: 세계 문학컬렉션>
ⓒ 살림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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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차 산업혁명 세대를 위한 생각하는 힘 시리즈로 기획된 진형준 교수의 세계문학컬렉션은 100권을 목표로, 현재까지 <일리아스> <이반인> <적과 흑> 등 20권이 먼저 나왔다. 출판사 측은 "아무도 읽지 않은 '죽은 고전'에서 벗어나 누구나 읽기 좋은, 믿을 만한 축역본을 내려고 오랜 세월 공을 들였다"고 밝혔다. "어릴 때일수록 이런 체계적인 독서가 중요한 것은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넓고 긴 안목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동서양 고전이 완역본에서 벗어나 독자들에게 좀 더 쉽고 친근하게 접근하려는 노력은 이미 많이 있었고, 또 여전히 진행중이다. 출판사 메멘토가 최근 출간한 <열일곱에 읽는 논어> <열일곱 살에 읽는 맹자>도 이런 흐름과 맞닿아 있다.

 <열일곱 살에 읽는 논어> <열일곱 살에 읽는 맹자>
 <열일곱 살에 읽는 논어> <열일곱 살에 읽는 맹자>
ⓒ 메멘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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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살에 읽는' 이 시리즈는 '한문 공부 쫌 해본' 현직 교사가 쓴, 청소년을 위한 동양고전 읽기 길잡이다. 출판사 책소개에 따르면, '고전 원문을 청소년 눈높이에 맞추어 저자가 직접 번역하였고, 성장기 청소년이 갖추어야 할 덕목을 중심으로 <논어> <맹자>를 재해석해 원문의 풍부한 뜻을 학생들에게 강의하듯 친절한 입말로 차분하게 풀었다'.

그런데도 자주 듣는 질문. "청소년들이 고전을 읽겠냐?" 이에 대해 메멘토는 '고전은 늘 다시 해석할 여지가 있는 것 아니냐'고 답한다. '그래도 가끔, 정말, 놀랍게도 고전을 읽는 아이들이 있다'면서. 고전의 형태가 계속해서 변화하는 이유도 어쩌면 이거 아닐까. 고전은 계속 변해야 한다. 고전이라 그렇다.


태그:#변하는책, #진형준, #살림출판사, #세계문학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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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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