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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사피엔스'라는 말이 있다. 스웨덴의 식물학자 린네가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뜻으로 라틴어 학명을 붙인 말이다. 여기에 핵심은 인간은 이상적 사유를 한다는 합리성을 강조했다. 그후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그르송은 인간의 본성은 도구를 사용한다고 해서 도구 인간, 만드는 인간이라는 뜻에서 '호모 파베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성적인 사람도, 도구 인간도 아니다. 바로 놀이하는 인간인 호모루덴스가 아닐까. 호모루덴스는 네덜란드의 역사 문화학자 요한 하위장아가 만든 용어다. 인간의 본성은 유희에 있다고 주목하고 모든 문화현상에는 놀이가 있고 이를 바탕으로 인류 문화가 발전했다는 내용이 주된 내용이다.

"진정한 문명은 특정 놀이 요소가 없는 곳에서는 존재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문명은 자아의 제약과 통제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자기의 이기적 경향을 더 높은 궁극적 목표와 혼동해서는 안 되고, 자신이 자유롭게 받아들인 일정한 한계에 의해 둘러싸여 있음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어떻게 보면 문명은 일정한 규칙에 의거하여 놀이되는 것이며, 진정한 문명은 언제나 페어플레이를 요구한다. 페어플레이는 놀이의 관점으로 표현된 신의(信義)성실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속이거나 놀이 정신을 망치는 행위는 문명 그 자체를 동요시킨다."(396p)

요한 하위징아가 이 책을 처음 출판한 시기는 1938년이다. 그로부터 거의 한 세기가 흐른 지금, 다시 세인들에게 회자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문화 현상들 중에서 놀이가 차지하는 지위를 논하지 않았기 때문 아닐까. 예를 들어, 서유럽의 종교 개혁 시대에 벌어진 신학적 논쟁들(222p), 신화에서 드러난 시의 형태성(248p), 조금은 급진적이라 할 수 있는 침략자의 관점에서 바라본 전쟁(396p) 등이 그렇다.

요한 하위징아 지음 <호모루덴스>
 요한 하위징아 지음 <호모루덴스>
ⓒ 연암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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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현상만을 가지고 이야기 했을 때 그것의 범주는 넓지 않다. 하지만 다양한 문화들의 나열 속에서 공통된 규칙을 발견하여 그것과 놀이의 유사성을 비교한다면 그것은 보편적 법칙이 되며 어느 학문에서나 인용할 수 있게 된다.

실제로 호모루덴스는 역사와 철학 뿐만 아니라 그 지방의 민속학, 문화 인류학, 언어학, 법학 등의 헤아릴 수 없는 양의 학문이 마치 빛의 스펙트럼처럼 독자들 눈에 펼쳐진다.

이것은 학자로서 갖추는 성실성의 방증이기도 했다.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그의 반대 의견을 존중하며,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닌 학문의 종합을 이루려고 했던 그의 자세는 정말 배울점이 많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 그를 비판하여 수용소에 감금되고 1945년 가족의 면회 조차 금지된 테스테흐 작은 시골집에서 작고(作故)할 때까지의 그의 삶은 지성인의 대변이자 똘레랑스의 실천자였다.

호모루덴스는 그의 역작(力作)이자 그의 놀이였다. 산업화 시대 놀이는 노동과 분리된 여가 시간에만 허용되는 것이었다. 여가는 휴식이고, 휴식 시간에만 놀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책에서는 이것을 조금 다른 개념으로 설명한다.

"파이디아(놀이)는 일에서 받은 긴장을 완화하고, 정신에 휴식을 제공하는 일종의 강장제로 여겨졌다. 하지만 여가는 그 자체에 모든 즐거움과 인생의 기쁨을 담고 있었다. 평상시에 자기에게 없는 것을 열심히 추구하다가 어느 순간에 이르러 그런 노력을 중단함으로써 얻게 되는 행복, 그것이 삶의 목적(텔로스telos)이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은 같은 것에서 행복을 찾지 않는다. 더욱이 여가를 즐기는 사람들이 가장 선량한 사람이고 또 그들의 열망이 가장 고상할 때 행복은 최고가 된다."(307p).

그리스 시대 놀이의 개념이다. 여기서 가장 주목할 점이 바로 '중단'이다. 열심히 노력하다 중단하는 것, 그리고 행복을 맞이하는 것의 기쁨이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결과 중심'의 대한민국에서 성과는 또 다른 인격이다는 말로 환유되는 안타까움에서 중단이 포기가 아닌 행복의 근원임을 밝히는 이 말이 새삼 귀중하다. 더욱이 모든 사람이 같은 것을 지향하지 않고 다름을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은 차이의 존중이다.

어린시절 술래 잡기를 하다보면 동네 어린 동생들이 누나나 형을 쫓아 나왔다. 우리는 그 아이를 동등한 입장에서 편을 가르지 않았다. 동네마다 표현은 다르겠지만 '깍두기'라고 불렀다. 힘이 약한 고리는 예외의 대상이 아니라 배려의 대상이었다. 어쩌면 규칙을 정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놀이의 가치는 배려일지도 모른다.

앞으로의 시대는 노동의 강도는 기계가 대신하는 시대가 올 것이다. 사람들은 여가를 즐기거나 삶을 즐길 수 있는데에 더 관심을 가질 것이다. 이것은 또 다른 사회가 추구하는 방향이기도 하다. 놀고 즐기는 서비스 업종이 많아진다는 것은 기계로 대치할 수 없는 인간 본성의 유희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놀아야 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호모 루덴스 - 놀이하는 인간, 개정판

요한 하위징아 지음,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2018)


태그:#호모루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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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생. 전남대학교 일반대학원 문화재협동학 박사과정 목포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어교육학석사. 명지대 문예창작학과졸업. 융합예술교육강사 로컬문화콘텐츠기획기업, 문화마실<이야기>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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