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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건설현장에 선 양혜춘씨
 아파트 건설현장에 선 양혜춘씨
ⓒ 김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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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수에도 종류가 많다. 내장목수, 외장목수, 인테리어목수, 목조주택목수, 한옥목수 등등이 있고 가구나 공예품을 만드는 소목수도 있다. 외장목수인 형틀목수는 건설현장에서 콘크리트 건물의 골조를 만드는 목수를 말한다.

형틀목수는 도면에 따라 먹을 놓고 '폼' 이라는 자재에 목재와 합판을 이용해서 콘크리트가 부어져도 흔들림 없는 거푸집을 만든다. 만들어진 거푸집에 콘크리트가 부어지고 양생기간을 거치면 건물의 뼈대가 완성되고 거푸집을 해체하기까지가 형틀목수가 하는 일이다.

형틀목수는 남성의 영역이다. 물리적으로 그렇다. 기본 자재가 무겁고 사용하는 공구는 위험하다. 거푸집을 만들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가로 육백, 세로 천이백 센티미터 '육백폼'은 무게가 19킬로그램이다. '폼'은 가로 오십 단위, 세로 백 단위로 종류가 세분 되는데 형틀목수는 하루에 적게는 수십 장에서 많게는 백여 장 이상도 들고 날라야 한다.

나무를 자를 때 사용하는 공구도 전기로 돌아가는 잘 벼려진 둥근 톱날이다. 자칫하다간 손가락 몇 개는 순식간에 날아갈 수 있다.

뿐만 아니다. 위험한 노동이다. 높은 곳을 수시로 오르내려야 한다. 공정상 높은 곳에 올라 한 참 동안을 위태롭게 서 있어야 할 때도 많다. 안전 난간 대와 발판과 안전망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임시가설물이다. 금방 설치하고 금방 해체하기 용이하되 견고함이 부족하다.

작년 기준으로 매일 한 명 이상의 노동자가 건설현장에서 죽었다. 이런 저런 부상까지 합하면 숫자를 파악하기조차 어렵다. 물리적으로 남자들의 영역인 이유가 그렇다.

형틀목수에 입문하고 지난 6년 동안 제주에서 육지까지 많은 건설현장을 거치면서 내가 목격했던 여성노동자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건설현장에서 여성들은 주로 얼기설기 엮어 놓은 철근을 얇은 결속 선으로 묶거나 아니면 현장청소를 하거나 부속자재들을 정리하는 게 주된 일이었다. 말하자면 여성이 물리적으로 감당할 만한 일을 했다.

그렇지만 그 감당할만한 일도 만만한 노동은 아니다. 더군다나 더러운 작업복을 입고 작렬하는 햇빛에 그대로 노출되는 작업환경은 나이가 적든 많든 여성이라면 가장 두려워하고 피하고 싶은 대목이다.

건설현장에서 일을 한다는 건 여러모로 아름다움과 멀어지는 일이다. 게다가 건설현장 주류인 남성노동자들의 세상은 투박하고 거칠기로 소문나 있다. 남자들도 처음 현장에 나갈 때는 모종의 두려움을 느끼는 곳이다.

예쁜 가구를 만들거나 공방을 운영하며 작은 소품을 만드는 여성목수는 종종 볼 수 있었다. 하지만 필요한 노동 강도에 역부족인 근력의 한계와 함께 작업환경마저 위험에 상시 노출되어 있는 형틀목수를 여성이 한다는 생각은 사실 해보지 못했다. 목격한 바도 물론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게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형틀목수의 상식을 믿고 있었다.

내가 믿었던 건설현장 노동자들에 대한 상식이 또 한 가지 있었다. 내가 지나 온 현장에서 만난 목수들 중에 건설현장 노동자가 되기를 처음부터 간절하게 원했던 사람은 없었다. 대개는 어쩌다가 아니면 하다 하다 할 게 없어서, 그도 아니면 사업이 망하거나 회사에서 갑자기 해고됐거나, 등등의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형틀목수는 인생 가장 최악의 고비에서 선택한 최후의 직업이었던 셈이다.

당연한 결과지만 그들 중 또 대다수는 형틀목수에 입문하고 단 한 번의 이탈도 없는 외길 인생을 걷지 않았다. 거친 노동이 힘에 겨워, 노가다나 하고 산다는 사람들의 시선이 따가워 기회만 있으면 '못 주머니'를 던졌던 경험을 한 두 번은 가지고 있었다. 물론 대부분은 다시 돌아왔다. 그러므로 육체노동은 하는 당사자나 주변 사람들이나 가능하면 해선 안 될 직업 중의 하나였다.

그녀는 어쩌다 형틀목수가 되었나

그녀는 작고 왜소했지만 자신의 삶에 늘 당당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작고 왜소했지만 자신의 삶에 늘 당당한 사람이었다.
ⓒ 김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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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나이 쉰다섯인 양혜춘씨는 건설현장에 흔치 않은 여성노동자다. 그러나 그녀는 건설현장에서 여성노동자들이 흔히 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그녀는 목수의 징표인 망치와 시누(철사를 묶는 공구의 현장용어) 가 달린 '못 주머니'를 차고 현장을 누비는 건설현장 목수다. 그녀는 열다섯 명으로 구성된 건설노조 형틀 팀에서 일하는 유일한 여성목수다.

여성이, 건설현장에서, 형틀목수로 일을 한다는, 그간 내가 가졌던 상식에서 한참 벗어난 이 조합이 나는 궁금했다. 그녀는 대체, 왜, 어쩌다가 형틀목수가 되었을까?

경기도 안산에 있는 아파트 건설현장에 찾아갔다. 헐렁한 작업복에 빈틈없이 '못 주머니'를 찬 그녀를 마주한 순간부터 대체, 왜, 어쩌다가 형틀목수가 되어야 했는지를 상상했던 내 편견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상상했던 것보다 몸집이 작고 왜소했으며 거친 것과는 전혀 무관하게 차분하고 선한 인상으로 나를 맞았다. 시내 카페로 옮겨 본격적인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이미 금이 간 내 상상과 편견은 무참히 깨져야 했다.

양혜춘씨는 1962년 충청남도 아산군 영인면 소재지에서 20리 떨어진 시골마을에서 4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크게 농사를 지었던 아버지는 소리 없이 맡은 일을 성실하게 해내는 이장이었다. 바지런하면서 인자했던 어머니는 부녀회장을 맡아 아버지와 함께 마을을 이끌었다. 그녀는 부부간 금실도 형제간 우애도 좋은 화목한 집안에서 가난을 모르고 자랐다.

중, 고등학교에서는 청소년적십자회 활동을 했고 단장까지 지낼 정도로 활동적이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에 올라와 금속회사 경리사원으로 취직했다. 금속인쇄 기술자였던 남편을 그 회사에서 만나 결혼했다. 스물두 살 때였다. 당시 관행은 결혼은 곧 퇴사를 의미했다. 그녀는 연년생으로 아들 둘을 낳았다.

남편은 다니던 회사에서 인쇄기술자로 정년퇴직 후 다시 재취업해서 포항으로 내려갔다. 남편은 평생을 인쇄기술자로 외길 인생을 성실하게 살고 있다. 가정에서도 남편은 훌륭한 사람이었다. 둘은 지금도 서로 높인 말을 쓰고 타인에게 서로를 말할 때 남편과 아내라는 호칭 되에 '분'자를 붙이는 게 자연스러운 사이다.

아이들도 큰 탈 없이 잘 자라주었다. 경남 창원에 사는 올해 서른넷인 큰 아들은 대학을 마친 후 큰 회사에 취업하고 결혼해서 아들을 낳았다. 서른셋 미혼인 작은 아들은 안산 집에서 양혜춘 씨와 함께 살며 회사를 다닌다. 

아이들은 오래 전 어른이 되었고 각자 자기 몫의 인생을 스스로 잘 살고 있다. 게다가 퇴직 후에도 성실한 직장인으로 살고 있는 남편 덕에 그녀는 당장의 생활비도 걱정할 이유가 없을 뿐 아니라 노후를 안정적으로 보낼 수 있는 연금도 보장되어 있다. 그녀를 둘러싼 주변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그녀가 노동강도와 위험수위가 높은 건설현장 목수 일을 당장 꼭 해야 할 이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나는 당혹스러웠다.

"가족들 뿐 아니라 친척들까지 나서서 반대했어요"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
ⓒ 김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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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아들들이 양혜춘씨가 무슨 일을 하시는지 알고 있나요?
"처음엔 제가 기능사 공부 하는 것처럼 말씀을 드려서 아무도 몰랐죠. 모르시다가 몇 개월 후에 우연찮게 남편 분이나 아이들이 알고 난리 났었죠."

-반응이 어땠나요?
"가족들 뿐 아니라 친척들까지 나서서 반대를 많이 했어요. 위험이 도사리는 현장이기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아요."

- 남편 분 반응이 궁금한데요?
"지금도 비가 오거나, 춥거나, 더우면 가슴이 저려 온데요. 저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고 그래요."

- 그 전에도 일을 쉬지 않고 하셨나요?
"제가 살면서 일을 손에서 놓아 본적이 없어요. 아이들 낳아 기를 때도 파트타임으로 일을 했어요. 아이들 어느 정도 크고 서른 다섯에 개인택시 조합에 경리로 들어가 9년을 일했고요. 거기를 그만 둔 건 공부를 하고 싶어서였는데 나이가 있어서 잘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봉사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안산시에서 행사가 있을 때마다 봉사를 했어요. 세월호 참사 때 화랑유원지 분양소에서 리본 만들기도 하고.

내 집이 있고 남편 분도 성실하게 회사 다니고 돈이 궁하진 않았어요. 그냥 항상 일을 하고 싶었어요. 그것 때문이었어요. 일이 없을 때는 용역회사 통해서 공장에도 나가고 그랬으니까요."

- 타고난 성정이 부지런하고 성실하시네요?
"시골에서 자랄 때 가까이서 보았던 부모님 덕이라고 생각을 해요. 우리 아이들이 큰 문제없이 잘 자라고 회사 생활 성실하게 하는 것도 남편 분 영향이라고 보고요. 그래서 가정과 부모가 참 중요한 것 같아요."

- 목수 일은 어떻게 시작하시게 됐어요?
"남편이 퇴직 후 재취업할 때 포항에 따라 내려가 일 년을 같이 있었어요. 작은 아들 때문에 안산에 다시 올라왔는데 집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요. 남편 분은 여행도 하고 취미활동도 하라고 말씀하셨지만 저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생활정보지를 보다가 우연히 안산건설기능학교를 알게 되었어요. 바로 가서 상담했는데 아직은 힘이 있으니까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그 학교에서 20일 교육 받고 바로 현장에 배치됐어요. 19개월 전이네요."

- 처음에 형틀목수가 어떤 일을 하는지 알고 가셨어요?
"상담할 때 알았어요. 제가 호기심이 많은 편이에요. 보통 노가다라고 밖에서 볼 때는 안 좋은 인식을 가지고 있잖아요. 그분들이 얼마나 험악한 일을 하기에 그럴까 하고 호기심도 일었고 내가 아직은 건강하니까 한 번 해볼까, 그런 마음이었어요."

- 남편 분이 눈물을 흘리실 만큼 고통스러워하고 자식들에 친척들까지 모두 나서서 그만 두라고 하는데도 일을 계속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지금도 아이들도 남편 분도 그래요. 꼭 그 일을 해야 하느냐고요. 지금이라도 편하게 집에서 쉬면서 여행 다니고 취미활동 하기를 바라죠. 하지만 저는 이 일이 제 적성에 맞아요. 기술이 늘어나는 성취감도 있고요. 몸이 힘들다는 것보다 내 몸이 건강해지고 있다는 식으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요. 그러면 힘든 게 아니고 하루하루가 즐거운 거예요. 제가 고지혈증 수치가 상당히 높았거든요. 운동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안 됐는데 이 일을 하면서 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왔어요."

- 열다섯 팀원들 중에 유일한 여성분이세요. 처음에 부담스럽지 않았나요?
"처음 현장에 들어갈 때는 무섭고 두려웠죠. 그 분들도 부담스러웠을 거예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옆에서 많이 도와주고 배려해주고 그러세요."

형틀목수는 콘크리트 건물의 골조를 세우는 일을 한다.
 형틀목수는 콘크리트 건물의 골조를 세우는 일을 한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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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젠 아시겠지만 사실 형틀목수가 남자들이 하기에도 물리적으로 굉장히 강도 높은 노동이에요. 일을 계속 하고 싶은 건 알겠는데 굳이 이 일이 아니라 다른 그러니까 여성들이 감당할만한 일을 할 수도 있잖아요?
"사실 남편 분이 완전히 은퇴하면 시골에 가서 예쁜 집에 황토 방을 만들어서 노후를 즐기자고 했어요. 처음에 이걸 시작할 때 돈 보다 기술을 배우고 싶은 마음이 더 컸죠. 제 손으로 집도 짓고 황토 방도 만들고 싶었어요. 그리고 상담을 받고 현장에 들어가기 전까지도 저는 실제 저한테 이 일을 시킬 거라고 생각을 못했어요. 고민도 많이 했죠. 제가 과연 이 힘든 일을 해낼 수 있을까 하고요."

- 현장에 다른 여성목수는 있나요?
"제가 다닌 현장에는 없었어요. 하지만 다른 현장에 제가 나온 건설기능학교 출신 여성목수들이 여럿 있어요."

- 현장에서 가장 불편한 점은 무언가요?
"탈의실 하고 휴게실이 없는 거죠. 여자화장실은 요즘 현장마다 다 있어요. 하지만 참시간하고 점심시간에 따로 쉴 공간이 없어요. 다른 팀원들 잘 때 같이 잘 수도 없어 혼자 앉아있어여 하는 게 가장 고역이죠."

- 지금 건설노조 팀으로 일을 하고 계세요. 일반 팀이라면 어땠을 것 같아요?
"일반 팀이라면 안 받아주겠죠. 일반 팀은 결과가 중요하기 때문에 그 분들 입장에서는 여성목수라면 이래저래 걸림돌로만 생각하겠죠. 그나마 성 평등 의식이 있는 노조가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어요."

- 자재가 다 무거울 텐데 현장에서 그걸 직접 들기도 하나요?
"어깨에 메고 다니죠. 핀 주머니도 들고 못 박스도 들고요. 오비까(8센티미터 두께에 3600센티미터 길이의 나무 각재)도 들고 다녀요. 폼도 하나 씩은 들어 옮기고 붙이기도 하고요. 제 힘이 닿는 선에서는 제가 해야죠. 여기 팀장님이 배려를 많이 해주세요. 가급적 무거운 것 덜 들게 하고."

- 일당은 만족하시나요?
"만족해요. 여자 수입으로 보면 적은 돈이 아니죠. 제가 일당을 15만원 받는데요. 한 달에 스무날 넘게 항상 일을 하니까요."

- 솔직히 이 일을 다른 여성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마음이 있나요?
"제가 소개해서 일 잘하고 있는 모임 동생이 하나 있어요. 나이가 마흔 셋이에요. 다른 사람들에게는 조심스러운 게 사실이에요. 아무래도 일반적인 일이 아니라 섣불리 권할 순 없죠. 밖에서 볼 때는 이 일이 그냥 노가다잖아요."

- 본인도 일을 하기 전에는 같은 생각이 들지 않았나요?
"그랬죠. 오죽하면 저런 일을 할까 그랬죠. 안쓰러운 마음도 들었고요."

- 가까이서 보니 어떤가요? 오죽하면 저런 일을 할까 생각했던 사람들이요.
"다들 목표가 있고 열심히 사세요. 단순하게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더라고요. 생활력도 강하시고."

- 아직도 건설현장에서 일 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 별로 안 좋은 게 사실이잖아요. 이제 그 당사자이신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어떤 말을 하고 싶어요?
"나름대로 기술도 있고 목표도 있는 분들인데 아직도 사람들은 노가다나 하는 사람들로 쉽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술 먹고, 욕 하고, 가정 돌보지 않고 그런 식으로요. 그런 사람도 물론 있겠지만 저는 그게 꼭 직업에서 생기는 문제는 아니라고 봐요. 저도 사회생활을 많이 해봐서 알지만 그렇게 하시는 분들 어딜가나 꼭 있거든요. 개인의 문제이지 다른 사람들까지 싸잡아서 생각하는 건 아니라고 봐요. 당장 저만 해도 이 일이 제 적성에 맞고 너무 만족하고 있어요."

그녀가 건설현장 목수가 될 수 있었던 이유

남자들만이 점유하고 있던 형틀목수라는 공간을 비집고 들어온 여자목수 양혜춘씨. 그녀가 남자들도 기피하는 건설현장 목수가 될 수 있었던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분명 있었다.

그녀는 노후에 남편과 함께 황토 방이 있는 집에 살겠다는 선명한 목표가 있었다. 그녀는 그 집을 자신이 직접 짓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집 짓는 걸 배워야 했고 우연한 기회에 목수가 되는 길을 찾았다. 처음 건설현장 앞에서 그녀 역시 다른 이들처럼 두려웠고 무서웠지만 그녀는 그 부정적인 마음의 실체가 허상 일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자신이 진정 원하는 삶이 있다면 오로지 그것만을 바라보고 살아왔던 지난 삶이 가르쳐 준 교훈이었다. 근거 없는 주위의 따가운 시선이나 다른 사람의 왜곡된 편견의 말을 그녀는 자신의 자존감 있는 선택으로 이겨냈다.

과거로부터 현재 그리고 자신에게 장차 닥칠 긍정적인 미래를 전해주던 그녀의 말은 차분했지만 가볍지 않았고, 강하지 않으면서 묵직했다.

다만 거친 남자들의 세계인 건설현장에서 여성노동자로 그것도 남자들도 버거워 하는 형틀목수로 살고 있는 그녀가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었다. 내가 물었다. 가장 힘든 게 무엇이냐고. 나는 그게 강도 높은 노동일거라 지레짐작했다. 틀렸다. 그녀는 주저 없이 말했다.

피부죠. 선크림을 바르고 두건을 뒤집어써도 하루 종일 햇볕에 노출되고 바람에 타니까요. 제일 속상한 게 피부죠.

그녀는 속상하게 그을려 있는 검고 건강한 피부위로 함박 밝은 미소를 지었다.


태그:#건설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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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유목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을 거쳤다가 서울에 다시 정착했다.

오마이뉴스 장지혜 기자 입니다.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기보다는 세상으로 바람을 날려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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