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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는 헬무트 슈미트 독일 총리의 사례를 들어 전술핵 재배치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는 헬무트 슈미트 독일 총리의 사례를 들어 전술핵 재배치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 중앙일보 화면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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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에서 전술핵 배치 문제는 1970~80년대 독일의 헬무트 슈미트 총리 사례를 참고할 만하다. 소련이 동독과 동유럽에 중거리 미사일을 일방적으로 전개하자 슈미트 총리는 '굴복하는 평화'냐 '생존을 건 도전이냐'를 고민했다. 그는 국민의 평화 욕구에 부응하기보다 국가 생존의 길을 선택했다. 슈미트는 카터 대통령을 만나 '미국의 핵우산을 믿을 수 없다. 서독과 서유럽에 전술핵을 배치해 달라'고 요구했다. 담판 끝에 소련의 핵미사일 수와 똑같은 전술핵 572기를 반입하기로 했다."

18일 자 <중앙일보>에 실린 칼럼 '전영기의 시시각각 - 좌파 슈미트, 왜 전술핵 결심했나'의 한 대목이다. <중앙일보> 전영기 칼럼니스트는 독일 헬무트 슈미트 총리의 사례를 들어 문재인 정부에 전술핵 재배치를 압박한다. 칼럼 일부를 다시 인용한다.

"무인도에서 총을 가진 두 사람 사이엔 평화가 성립한다. 총이 한 사람에게만 있으면 평화가 깨지고 굴종만 남을 것이다. 슈미트는 인간 본성을 국가 관계에 적용시켜 '핵은 핵으로'라는 생존 논리를 끌어냈다. 슈미트의 결단은 훗날 동·서 유럽에서 전술핵의 동시 철수라는 진짜 평화로 이어졌다. (중략) 

미국은 가만히 있는데 전술핵을 빌려주지 않는다. 불가론자들은 또 '북한이 겁먹을 리 없다'고 주장하는데 인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고르바초프가 슈미트에게 토로했던 모스크바의 공포를 상기시켜 주고 싶다. 문재인 대통령이 슈미트 사례를 허심탄회하게 탐구해서 실사구시적인 대책을 세워주기 바랄 뿐이다."

말하자면 북한이 핵을 보유한 이상 우리도 핵을 들여 공포의 균형을 맞추자는 주장이다. 지난 14일 방송된 JTBC 시사토크 프로그램 <썰전>에서도 이와 비슷한 주장이 나왔다. <썰전>의 보수 쪽 패널인 박형준 동아대 사회학과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지난 14일 방송된 JTBC 시사토크 프로그램 <썰전>에서 보수 쪽 패널인 박형준 교수는 전술핵 재배치를 통한 핵 균형 논리를 전개했다.
 지난 14일 방송된 JTBC 시사토크 프로그램 <썰전>에서 보수 쪽 패널인 박형준 교수는 전술핵 재배치를 통한 핵 균형 논리를 전개했다.
ⓒ JTBC 방송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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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보면 적성국 가운데 핵을 갖고 힘의 균형이 있었을 때 평화가 유지됐다. 미국과 소련이 냉전을 오래 했지만 핵 균형 때문에 전쟁이 나지 않았다. 서로 두려움 때문에 함부로 전쟁을 못 했다."

자유한국당이 미국까지 날아가 전술핵 재배치를 요구한 것도 이 같은 논리의 연장 선상에 놓여 있다. 결국, 전술핵 재배치는 보수 진영 쪽에서 의제를 주도하고 있는 셈인데, 정말 이들의 주장이 맞는 것일까?

핵 균형 상태여도 전쟁은 끊이지 않았다 

핵 균형이 세계평화를 유지하게 했다는 주장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미소 양국은 막강한 파괴력을 지닌 핵무기로 무장하고 있었음에도 전쟁을 벌일 수 없었다. 핵전쟁은 인류의 종말로 귀결될 것이란 공포감이 양국 정부 수뇌부를 사로잡았고, 그래서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에서 한발 물러섰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가 가장 대표적인 사례다. 역사학자 마이클 돕스는 자신의 책 <0시 1분 전>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니키타 흐루쇼프와 존 F. 케네디 둘 다 핵전쟁이 인류가 과거에 알고 있던 그 무엇보다 훨씬 더 끔찍할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했다. 두 사람은 전쟁을 직접 목격한 경험이 있었고, 최고통수권자가 군대를 항상 통제할 수는 없다는 사실도 이해했다. 두 사람은 자신들에게 인류를 멸망시킬 힘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두려워했으며 냉정을 유지했다."

그러나 힘의 균형이 곧장 세계 평화로 직결되지는 않았다. 미국과 소련은 피차 사활적 이해관계가 걸리지 않은 지역에서 자신들의 개입 사실을 숨긴 채 세력 게임을 벌였다. 이른바 대리전이다.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등이 대표적인 대리전이었다. 한국전쟁에서 미국이 대규모 병력을 보내긴 했지만, UN의 깃발 뒤에 자신의 존재를 숨겼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한편 미국은 1979년 옛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아프가니스탄을 소련의 베트남으로 만들기 위한 공작을 벌였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세력이 바로 탈레반이었다.

전술핵 재배치, 최악의 경우의 수 

한반도로 눈을 돌려보자. 한국의 전술핵 재배치는 북한 핵 개발로 인해 나올 수 있는 최악의 경우의 수다. 미국은 북한 핵 문제를 핵확산 억제라는 전략적 관점에서 접근해왔다. 만에 하나 미국이 북한 핵을 인정하면 북한보다 훨씬 더 정교한 핵기술을 보유한 한국이나 일본의 핵무장을 막을 명분이 없어진다. 한일 양국의 원자력 프로그램은 북한에 비해 상당 수준 앞서 있고, 군사용으로서 잠재력 역시 크다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미국이 전술핵 재배치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는 근본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헬무트 슈미트 총리의 사례가 한반도 상황에 유용할지는 미지수다. 유럽은 냉전 체제가 시작되던 시점부터 자신의 뒷마당에 소련의 핵무기를 두고 살아가는 방법을 모색해 왔다. 반면 동북아는 핵무기를 보유한 북한을 다루는 방법을 찾지 못하고 헤매는 중이다. 또 설사 북한이 핵무기 고도화에 성공했다고 해도, 핵 위협을 상쇄할 능력은 충분하다고 본다. 한반도 문제의 권위자인 셀릭 해리슨은 자신의 책 <코리아 엔드게임>에 이렇게 적었다.

"한반도의 경우, 미국은 설사 북한이 선제 핵 공격을 감행한다 할지라도 압도적인 제2격 대응 능력을 갖고 있다. 또 인접 지역의 다양한 핵무기와 핵 탑재 가능 무기들로 보복을 가할 수 있다. 이런 신뢰할 만한 억지력이 존재하는 한 재래식 전략에 대항하는 핵 선제공격의 위협은 과잉 살육이다."

셀릭 해리슨의 지적대로 한반도에 북한의 핵 선제공격을 무력화할 대응능력이 충분한 상황에서 전술핵 재배치마저 이뤄지면 동북아는 핵무기 과열지구가 될 위험성이 너무 높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4일 CNN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의 핵 위협을 맞아 한국이 자체 핵무기를 개발하거나 전술핵무기를 재배치하는 것에 찬성하지 않는다"며 선을 그었다. 그럼에도 조선·동아·중앙 등 보수 언론과 보수 논객들은 공포의 균형 논리를 꺼내 들며 전술핵 재배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이 와중에 북한은 14일 또 다시 미사일을 발사해 대화의 여지를 스스로 좁혔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런 와중이라고 해도 북한의 도발을 빌미로 전술핵을 다시 들이자는 주장은 위험하고, 한반도·동북아 정세를 더욱 불안에 빠뜨릴 가능성이 높다.

북한 핵 문제 해법을 논의함에 있어, 다시 한번 셀릭 해리슨의 <코리아 엔드게임>을 인용한다. 이 책 초판이 나온 시점은 2003년인데, 이 책이 제안한 내용은 지금 시점에 오히려 더 잘 맞는다. 정책 결정자들이 북한 핵 문제 해법을 설계할 때 아래 인용할 해리슨의 지적을 기본 전제로 깔기를 부디 권한다.

"북한은 미국이 한반도 비핵화와 미 공군에 의한 예방적 공격 위협을 제거 또는 감축하는 군비 통제 협정에 참여하지 않는 한, 자신의 핵 프로그램과 미사일 능력을 개발하는 권리를 저당 잡히려 들지 않을 것이다."



태그:#전술핵, #전영기, #셀릭 해리슨, #코리아 엔드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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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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