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서울 부산을 잇는 영남대로는 이 관문을 기점으로 한강과 낙동강으로 갈린다.
▲ '백두대간 이화령'이라 적혀있는 이유릿재 관문 서울 부산을 잇는 영남대로는 이 관문을 기점으로 한강과 낙동강으로 갈린다.
ⓒ 김길중

관련사진보기


밤새 뒤척였다. 피곤이 극에 달했던 모양이다. 더워지기 전에 일찍 달리는 게 좋겠다 싶어 6시부터 나섰다. 인적이 드물고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길을 나서 수안보로 향한다.

이번 여행 중 가장 높은 이유릿재를 넘어야 한다. 행정구역은 충북에서 경북으로 바뀌게 된다. 수안보에서 연풍으로 넘는 작은 새재(해발 362m), 다시 문경으로 넘겨주는 이유릿재(해발 548m)를 넘을 예정이다. 서울과 부산을 이어주는 가장 빠른 길이 영남대로다. 한강과 낙동강으로 갈리는 분수령인 이 길의 정점은 새재(해발 587m)다. 각각 小鳥嶺, 梨花嶺, 鳥嶺으로 적는 한자 이름이 있다. 한글 명칭이 더 적합하다고 여겨 이렇게 적는 것이다.

새재라는 고개 이름의 유래가 여럿이라고 한다. 한자처럼 새도 쉬어 넘는 고개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이유릿재와 하늘재 사이에 있어서 사잇재(새재)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초점이라 불렸던 시절도 있어 억새가 많이 나 부른 게 아닌가 하는 의견도 있다. 어쨌거나 그 고개는 새재(鳥嶺)로 굳혀졌다. 새재가 아닌 이유릿재로 넘으나 이 길의 이름은 '새재 자전거길'이다.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한강과 낙동강을 따라 비교적 길이 평탄하고 빠른 길인지라 영남대로가 새재를 두고 이어졌다. 근래 이 곁을 지나는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이 점을 선전하며 통행을 유치하기도 한다. 과거를 보러 가던 선비가 넘어야 하던 길이 새재였다.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을 내던 일제는 이화령을 선택했다. 길의 변천은 사람들 생활에도 영향을 끼쳐 이유릿재 아래 연풍이 영하(嶺下) 취락으로 발전했다고 한다.

2016년에 홀로 자전거 여행을 하던 길에 토박이 어르신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눈 대목이 떠오른다.

"어릴 적에는 문경으로 많이 다녔어. 여기가 충북 괴산이지만 고개 넘어 문경이 더 가까웠거든. 지금은 괴산도 문경도 아니고 충주로 댕기는 편이여. 차가 발달해서 큰 데로 다니는 거지."

스스로 겪어본 시대의 변화와 길의 변천사, 촌락의 부침에 대한 목격담인 셈이다. 고개 넘어 문경도 마찬가지다. 본래 문경읍 관할이던 점촌면이 먼저 시가 되었다. 통합하면서 문경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을 뿐, 문경의 옛 영화는 점촌에 넘겨주고 말았다. 영하 취락이었던 문경의 중요성은 빛을 잃고 탄전의 중심지대로 형성된 점촌의 시대로 바뀐 것이다.

강은 좁아지고 굽이치기 시작한다.
▲ 이른 아침, 충주를 떠나 수안보로 향하는 길 강은 좁아지고 굽이치기 시작한다.
ⓒ 김길중

관련사진보기


널찍한 탄금대까지와 달리 수안보로 향하는 길은 굽이쳐있고 맛이 다른 풍경을 비춰준다. 드문드문 앞서가다 우리에게 잡힌 라이더도 있다. 우리를 추월해 나가는 라이더를 만나기도 한다. 게 중 부산까지의 여정에서 '어제 보았던 그 팀?'으로 분간이 갈 만큼 익숙해진 사람들도 있다. 이렇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엇갈림으로 엮여간다. 누군가는 영영 따라잡지 못할 페이스로 휙 치고 나가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는 비슷한 페이스다. 스스로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나 거기서 거기인 장삼이사들 아닌가 싶다.

아침 먹기 적당한 거리를 달려와 버섯전골로 아침을 해결하고 다짐해두었던 사전투표를 마치고 나니 홀가분하다. 작은 새재를 오르기 시작한다. 드물게 보였던 라이더가 한눈에 늘어났다. 길게 늘어섰던 대열이 이 구간에서 좁혀진 것이다. 어제 몇 번의 작은 고개에서 익숙해졌는지 JH의 페이스가 제법 괜찮다. 비록 속도는 떨어지나 꾸준하게 굴려 나간다. 작은 새재에 넘어 연풍에서 한숨을 돌리고 이유릿재 접어들어도 JH의 페이스가 나쁘지 않다.

보다 높고 긴 고갯길의 늘어선 자전거 대열이 한결 늘어났다.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사람, 우리보다 앞선 곳에서 자고 조금 늦게 늘어난 사람, 괴산 방면에서 온 사람들이 섞였다. 도로에서 쉬고 있는 사람, 끌고 오르는 사람, 치고 나가는 사람들이 뒤섞였다. 걸어 올라가면 시속 4㎞ 가량. 나와 JH, 그리고 대부분의 페이스라면 시속 8~9㎞ 가량의 페이스다. 쭉쭉 올라가는 한 팀과 그중에서도 돋보이는 여인네를 보기도 한다. 고갯마루 휴게소에서 다들 그녀의 라이딩을 화제로 올린다. 그녀의 속도는 어림잡아 15㎞ 이상은 될 듯하다.

길었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구르면 오를만한 길 이었다. 이유릿재라고 부른 이유는 험한 산길, 짐승들로부터 습격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여럿이 무리를 지어 넘어야 하는 고개였다는 뜻이라고 한다.
▲ 이유릿재(이화령) 오르는 길 길었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구르면 오를만한 길 이었다. 이유릿재라고 부른 이유는 험한 산길, 짐승들로부터 습격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여럿이 무리를 지어 넘어야 하는 고개였다는 뜻이라고 한다.
ⓒ 김길중

관련사진보기


'생각보다 어렵지는 않았다'는 JH와 함께 숨을 돌리며 남은 길을 가늠한다. 아침부터 달린 거리를 합쳐 상주까지 130㎞, 구미까지 160㎞는 되겠다. 오늘의 목적지로 구미가 확정되는 순간이다. 올라올 때보다 경사가 급하고 굽이치는 내리막길을 길게 달려 내려가 문경읍에 이른다. 좀 더 달려 점촌에 이르렀고 달린 거리는 80여 ㎞가 되었다. 고갯길을 넘은 것 치고 나쁘지 않다. 부대찌개를 시켜 먹는 내내 아침과는 말투가 확실히 달라진 것을 느낀다. 경상도로 접어들었음을 실감한다.

새재만 넘어서면 오르막길이 없을 것 같았지만 예상치 않은 고개가 여럿 나타난다. 어제와는 달리 짧게 달리며 잠깐 동안의 휴식을 가지며 달려가기로 바꾸었다.

낙동강에 접어들었고 넓게 펼쳐지고 길게 S자 곡선을 드리우고 있다. 깎아자른 절벽과도 같은 경천대 못미쳐 끌고 올라야 했다.
▲ 상주를 앞두고... 낙동강에 접어들었고 넓게 펼쳐지고 길게 S자 곡선을 드리우고 있다. 깎아자른 절벽과도 같은 경천대 못미쳐 끌고 올라야 했다.
ⓒ 김길중

관련사진보기


상주에 접어들면서는 급격한 경사 구간을 마주쳤다. 상주보 못 미쳐 경천대이다. 도저히 타고 갈 수 없어 끌고 넘는다. 낙단보를 넘어서고 또다시 고갯길들 넘다 보니 꽤나 지친다. 많이 달려 지쳤다기보다 예상치 못한 고개를 만나 심리적으로 힘들었는지 마법의 음료를 자주 들이킨다. 구미까지의 막판은 다소 지루하고 힘들게 달려야 했다.

아침 6시에 시작한 라이딩이 7시가 되어 끝맺게 된다. 금오공대 앞에서 길을 잘못 들어 숙소까지 2㎞가 남았다. 마저 달리지 못하고 마법의 음료 하나를 더 들이킨다.

어제보다 근사한 모텔, 평일이라 4만 원이란다. 오늘 저녁도 돼지갈비로 간다. 말투 속 억양이 점심때 문경과도 한결 달라졌다. 대구에 가까워지고 있다. 먹고 씻고 나니 졸음이 밀려온다. 이 날은 푹 잠이 들게 된다.

지도를 펴놓고 경부고속도로를 보면 선형이 다소 이상하게 보이는 지점이 있다. 대구에서 김천으로 거의 직선인 기찻길과 달리 고속도로는 구미를 관통해 김천으로 간다. 경주로 돌아가는 것은 울산 포항 곁을 지나갈 필요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대구에서 김천으로 가는 길은 다소 의외다. 내륙 최초의 공업단지를 계획하고 추진하던 점을 감안해도 왜 굳이 구미를 관통해야 하는지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선산군 구미면' 출신 박정희 전 대통령의 배려와 암묵적인 지원 아래 공단과 고속도로가 같이 움직인 탓일까? '선산군 구미면'은 이내 읍이 되고 시가 되었다. 1995년에는 구미시가 선산군을 통합한다. '선산군 구미면'과 '구미시 선산읍'에 잘 담겨있다. 앞서 언급한 '문경, 점촌'의 부침과 '구미, 선산'의 관계에 차이가 있다. 시대의 변화와 인위적인 손길로 여겨지는 차이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어쨌거나 시대에 따라 길도 촌락과 도시의 성쇠도 달라지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구미에서 묵었던 하룻밤이 여러 가지를 생각게 했다. 확실하게 중요한 건 '길'이 가지는 의미 일 것이다. 그것을 고려해 입김을 행사했다는 건 그의 고향 구미를 위해서는 큰일을 한 셈이다. 길의 중요성을 깨달은 박 전 대통령의 안목만은 앞서 있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무엇이 되었건 길은 힘이다. 길에 대한 눈이 어두워 세상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고 움츠러들었던 조선이다. 조선왕조 500년을 마감한 여러 요인중 하나가 길에 대한 능동적인 생각을 가지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조선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는 운명을 맞지 않았을까?

덧붙이는 글 | '두 바퀴로 만나는 세상'이라는 제목으로 자전거 여행기를 담아보려 합니다. 이 기사는 인터넷 매체인 '전북 포스트'에 동시에 보냈습니다.



태그:#두 바퀴로 만나는 세상, #자전거 여행, #이화령, #이유릿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자전거 타는 한의사, 자전거 도시가 만들어지기를 꿈꾸는 중년 남성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