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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이란 말을 넘어 '문장의 구조'까지 얘기하고 보니, 자칫 이 글 역시 나도 모르게 관념적이거나 현학적으로 가는 것은 아닌지 경계심이 생긴다.

물론 글쓰기란 주제를 놓고 얘기하다보면 문장은 물론이거니와 문법이나 품사(명사, 동사, 형용사 등)와 같은 용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나는 이런 것들의 사용을 최소화해가며 한껏 입말체 글을 구사하겠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하지만 오늘 '문장론' 세 번째 글에서도 몇 가지 문법적 용어들을 불가피하게 사용할 수밖에 없음을 미리 밝힌다.  

지난주의 글 '문장의 구조'에서 보았듯 문장의 기본형은 매우 간결하다. 주로 서너 단어가 한 문장의 기본 구조를 이루는데, 심하면 한 단어로도 충분하다.

가령, "간다!"라는 문장을 보자. 쓰고 보니 이것저것 궁금한 것들이 많다. '누가' 가는 건지, '어디로' 가는 건지, '왜' 가는 건지, '무엇을' 하러 가는 건지, '언제' 가는 건지, 그야말로 육하원칙(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의 모든 요소가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그렇지만 문맥 속에서 생략해도 독자가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다면 거두절미하고 한 단어 문장을 써도 전혀 문제될 게 없다. 앞에서 누가 언제 어디로 무얼 하러 왜 가는지에 대한 서술이 있었다면, 굳이 여러 단어를 나열할 것 없이 "간다" 한 단어 문장을 써도 독자가 오독할 이유가 전혀 없다. 

이렇게 간단한 몸피를 자랑하는 것이 문장이지만 책 등을 통해 만나는 문장은 그렇지 않다. 간결한 것보다 어느 정도 살이 통통하게 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 글에서 한 번 언급한 바 있는 작고한 작가 박상륭 선생 같은 경우는 문법적 용어로 '만연체'를 썼는데, 그 몸피가 상상을 초월한다. 읽다 보면 끊임없이 쉼표와 괄호가 등장할 뿐 좀처럼 '~다'라는 마침표를 만나가 쉽지 않다. 그의 이 같은 문체는 작가적 의도 아래 작품을 써나가는 중요한 수단으로 기능했기에 지금 우리의 글쓰기 고민에서는 논의의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그 문장의 길이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길이를 구사한다는 점만 기억하자. 

그렇다면 왜 이렇게 문장이 길어지는 걸까.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는 우선 문장이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싶어 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설명이 필요한 부분을 꾸며주는 말, 수식어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사실 수식어를 설명하려면 '관용어'와 '부사어'라는 문법 용어가 불가피하게 동원돼야 한다. 다시 말해 명사나 대명사 등 체언을 수식하는 것을 관용어라 부르고, 동사나 형용사 등 용언을 수식하는 단어를 '부사어'라 부른다.

그러나 솔직히 이런 문법 요소는 학창 시절 국어시험 문제에서나 요긴할지 모르지만 평상시 말글살이에서는 굳이 용어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 

또한 글을 쓸 때 이런 문법 요소들을 하나하나 따지면서 쓰지는 않는다. 더욱이 앞의 '문장론'에서 얘기했듯 우리의 몸은 이런 것들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이미 정확하게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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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문장이 왜 꾸미기를 좋아하는지 알아보자.

"나는 간다"는 문장은 단 두 단어가 서로 마주보고(주어와 서술어로 호응) 서 있다. 그런데 이 둘만으로는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다 전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래서 "나는 집에 간다"라고 하고 싶어진다. 그러다 보면 맨 앞의 주어 "나는"도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길 바란다. 그래서 문장은 "피곤한 나는 집에 간다"가 된다. 그것뿐이겠는가. "피곤한 나는 안락한 집에 간다"→"피곤한 나는 따스함이 있는 안락한 집에 간다"→"피곤한 나는 따스함이 있는 안락한 집에 뛰어 간다"….

이렇듯 문장을 구성하는 주어나 목적어, 서술어, 보어는 부족한 부분을 채우거나, 의미를 보다 명확하게 하고 싶어 하는 속성을 갖고 있다. 불명확한 상태에서 누군가에게 전달되는 상황을 못 견뎌 하는 것이다. 문장은 언제나 자신의 정체성을 명확히 드러내야 제 맛을 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문장은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서 화장하듯 꾸미기를 좋아한다. 예를 들어보자. 그냥 '아이'이기보다는 '예쁜 아이'이고 싶고, 그냥 '빵'이기보다는 '달콤한 빵'이고 싶은 것이다. 그냥 '먹다'보다는 '맛있게 먹다'이고 싶다. "예쁜 아이가 달콤한 빵을 맛있게 먹는다" 이 정도로 끝날까. 아니다. 문장의 화장 욕심은 끝이 없다.

그냥 '아기'와 '먹는다'가 만난 문장이 "예쁜 아이가 달콤한 빵을 맛있게 먹는다"로까지 화장을 했는데도, 더 화장하고 싶어 하더니만, "옆집 사는 예쁜 아이가 할머니가 준 달콤한 빵을 누가 빼앗아 먹을까 봐 힐끔힐끔 눈치를 보며 맛있게 먹는다"까지 된다. "아기가 빵을 먹는다." 단어가 세 개였던 이 문장은 무려 17단어로 불어나면서 고도비만 형태를 보여준다.

그런데 어떤가. 이 고도비만 문장을 읽고 나면, 내가 강력하게 주장하는 '쉽고 빠르고 정확하게' 의미가 전달되는가. 의미가 분산되고 있음을 느낄 것이다. '아이'만도 '예쁜 아이'인데, '옆집에 사는 예쁜 아이'가 되면서 나름 자체적으로도 하나의 문장을 이루기에 충분하다. "예쁜 아이가 옆집에 있다." '빵'도 '달콤한 빵'을 넘어 '할머니가 준 달콤한 빵'이 된다. 역시 따로 한 문장을 구성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할머니가 달콤한 빵을 준다."

'먹는다'도 보자. '맛있게 먹는다'에 '누가 빼앗아 먹을까봐 힐끔 눈치를 보며'가 달라붙었다. 이 문장 역시 나름대로 하나의 문장으로 손색이 없다. "누가 빼앗아 먹을까 봐 힐끔힐끔 눈치를 보며 맛있게 먹는다."

그래서 문장 역시 다이어트가 필요하다. 지나치게 비만한 문장은 여러 가지 부작용을 초래한다. 이 문장의 중요 포인트가 '아기'인지, '빵'인지, '먹는다'인지 도무지 감을 잡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이 문장은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 다이어트를 조금 해서 "아이가 빵을 누가 빼앗아 먹을까봐 힐끔 눈치를 보며 맛있게 먹는다"로 하면 아이의 먹는 행태에 포인트를 주는 문장이 된다. "아이가 달콤한 빵을 맛있게 먹는다"는 '빵'이 맛있다는 의미를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 글쓰기 책 치고 "짧게 쓰라"는 경구를 담지 않은 것이 없다. 가능하면 짧게 쓰는 것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쉽고 빠르고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장이 한 없이 길어지면 억지로라도 제지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과체중인 사람으로 하여금 억지로라도 먹는 것을 줄이도록 해야 하는 것처럼. 나중에 따로 자세하게 설명하겠지만 "짧게 쓰라"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 강조되는 글쓰기 요령이다. 화장을 하더라도 적당히 해야 한다. 입체적인 분장 수준으로 화장을 했다가 그 화장을 지우면 정작 민낯이 낯설 수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뭐든 지나치면 해롭듯 적당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문장이 화장(꾸밈)하는 기본적인 원칙도 알아두자. 눈을 예쁘게 하고 싶으면 화장을 눈에 하지 코에 하지 않는다. 문장도 이치가 똑같다. 꾸미고자 하는 말 바로 앞에 꾸밈말을 위치시키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다. 그렇지 않고 저 멀리 위치시키면 도대체 무얼 꾸미는지 알 수 없게 되어 의미를 불분명하게 만든다. 가끔 문학에서 쉼표 등을 활용하여 꾸밈말을 저 멀리 위치시키는 경우가 있는데, 생활글에서는 굳이 이 같은 방법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수식어 사용도 어려운 문법 용어를 동원해 설명하지 않더라도 글을 쓰다보면 저절로 좋은 요령을 터득하게 된다. 별다른 요령을 습득하지 않더라도 몸이 알아서 수식어를 사용하여 문장을 '아름답게' 완성한다.  

마지막으로 그냥 참고 사항으로 말하는데, 보통 적당한 한 문장의 길이를 30~50자라고들 한다. 200자 원고지 3줄을 넘기지 않는 글이 의미 전달에 좋다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네이버 블로그 '조성일의 글쓰기 충전소'에도 포스팅했습니다.



태그:#문장론, #글쓰기, #문장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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