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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군지>는 '임진왜란 초기에 현령으로 있으면서 선정을 실시하고 많은 업적을 남긴 장현광을 기리는 비석이 의성향교 뜰에 세워져 있다.'라고 해설한다. 하지만 장현광이 의성현령으로 부임한 때는 1603년이다.
 <의성군지>는 '임진왜란 초기에 현령으로 있으면서 선정을 실시하고 많은 업적을 남긴 장현광을 기리는 비석이 의성향교 뜰에 세워져 있다.'라고 해설한다. 하지만 장현광이 의성현령으로 부임한 때는 1603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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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군지 편찬 위원회'가 발간한 <의성군지(1998)>에 '여헌 선생의 예언'이라는 설화가 실려 있다. <두산 백과>에 '17세기 영남학파를 대표하는 유학자'로 소개되는 여헌은 세상을 떠났을 때 인조가 제문(祭文)을 내리면서 '500년에 한 번 태어날 만한 우리나라의 위대한 인물'이라고 평가한 장현광(1554∼1637)의 호이다. 설화를 요약해서 읽어본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얼마 전이었다. 돈을 빌려준 사람과 빌린 사람 사이에 소송이 제기되었다. 의성 현령 여헌은 돈을 빌리고 갚지 않는 사람에게 "세상에 바른 마음을 가지고도 옳게 살기가 어렵거늘 너는 어찌하여서 남의 돈을 쓰고도 갚을 생각을 하지 않는단 말이냐? 어서 갚아라"하고 크게 꾸짖었다. 그리고 돈을 빌려준 사람에게는 "돈을 돌려받아 보았자 너에게는 별 쓸모도 없겠으니 그 일을 어찌하겠느냐?"라는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강산은 초토가 되고 인명은 무참하게 유린되었다.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이 되니 엽전 꾸러미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사람들은 그제야 여헌이 한 말의 뜻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돈이 가치를 잃을 것이라는 여헌의 명담은 크게 적중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고, 임진왜란을 예측한 선견지명까지 인구에 회자되었다.

그 후 여헌 선생은 의성을 떠났으나 높은 학덕과 현령으로 재임할 때의 업적을 인정받아서 청덕 선정비(淸德善政碑)가 세워졌으며, 의성 향교 경내에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설화는 장현광이 임진왜란 발발 이전에 의성 현령으로 왔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장현광은 1603년(선조 36년)에 의성 현령으로 왔다가 이듬해인 1604년(선조 37)에 그만두었다. 재임 기간은 불과 몇 달뿐이었다.

'장현광 설화'는 전쟁 겪은 민심의 표출

사람들은 장현광이 떠난 뒤 그의 '높은 학덕과 현령으로 재임할 때의 업적을 인정'하여 의성읍 도동리 808 의성향교 경내에 '현령 여현 장 선생 청덕비'를 세웠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사람들은 '여헌 선생의 예언' 설화를 만들어 세상에 회자시켰다. 장현광의 덕망을 숭앙한 나머지 그가 현령으로 재임한 시기마저 사람들은 깜빡 잊고 말았다.

왜란을 겪으며 백성들은 무참한 피해를 입었다. 백성들은 종전 이후 새로 부임한 장현광 현령의 선정을 경험하면서 '장 현령 같은 선비들의 고견이 국정 운영에 제대로 반영되었더라면 왜란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역사의 가상'을 느꼈다. 그래서 '여헌 선생의 예언'과 같은 설화가 생겨났고, 또 입에서 입을 타고 전파되었던 것이다.

김치중을 기려 건립된 정려가 그가 순절한 전투 장소 건마산을 바라보며 서 있다.
 김치중을 기려 건립된 정려가 그가 순절한 전투 장소 건마산을 바라보며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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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곡면 사촌리 출신의 김치중(?∼1592) 가문은 임진왜란 당시 의성인들이 입은 피해를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1594년 4월 13일 부산 앞바다로 쳐들어온 일본군은 금세 의성까지 치달았다. 김치중은 격문을 뿌려 열혈 청년들을 의병으로 규합했다. 물론 그의 작은아버지인 김응주, 친동생 김치화, 사촌 동생들인 김치홍, 김치강, 김치공 등 집안사람들부터 솔선수범하여 창의에 가담했다.  

그러나 몇 명 되지도 않은 의병군이 일본 대군을 막을 수는 없었다. 미천강을 옆구리에 낀 채 솟아있는 건마산 일대에서 전투가 벌어졌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중과부적의 열세를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의병들은 모두 순절했다.

분연히 맞섰지만, 소수 의병으로는 이길 수 없었다
   
참혹한 소식을 들은 김치중의 큰아버지 김응하가 자결했다. 김치중의 아내 평산 신씨도 남편이 마지막 순간에 뛰어내려 목숨을 버린 절벽으로 올라 세상과 이별했다. 평산 신씨의 몸종 복분과 김치중의 순절을 알리기 위해 집으로 달려왔던 종 서석을 비롯해 집의 일꾼 10여 명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592년 4월 25일 상주에서 이일 부대를 격파한 일본군은 한성을 향해 북진했다. 그 후 일본군은 일부 병력을 보내 안동을 점령하려 했다. 이때 안동 부사는 청송으로 피란을 가버렸고, 판관 윤인성도 병력을 모으는 일이 여의치 않자 풍기 쪽으로 떠나버렸다. 다만 예안 현감 신지제만이 (공석이 된 안동부사를 겸직하여) 자리를 굳게 지키면서 적의 공격에 대비했다. 신지제는 경상 좌방어사 성응길의 지원에 힘입어 당분간 안동이 적의 치하에 들어가지 않도록 할 수 있었다. <의성 군지>는 '열읍이 붕괴됨에 수령들이 거의 자취를 감추었으나 그는 안동을 겸관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의병을 모집하였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28세 문과에 급제했던 신지제는 '난중에 순찰사, 관찰사, 통제사 등 3영의 종사관으로서 종횡으로 국난극복에 이바지하였다. 그는 임란 극복의 공헌이 크게 알려져 내외의 현직을 두루 거치고 만년에는 통정대부 동부승지에 이르렀다. 선무원종1등공신에 책록되고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사진은 그를 기려 세워진 사당을 거느린 오봉(신지제)종택으로 의성군 봉양면 구미리에 있다.
 1592년 4월 25일 상주에서 이일 부대를 격파한 일본군은 한성을 향해 북진했다. 그 후 일본군은 일부 병력을 보내 안동을 점령하려 했다. 이때 안동 부사는 청송으로 피란을 가버렸고, 판관 윤인성도 병력을 모으는 일이 여의치 않자 풍기 쪽으로 떠나버렸다. 다만 예안 현감 신지제만이 (공석이 된 안동부사를 겸직하여) 자리를 굳게 지키면서 적의 공격에 대비했다. 신지제는 경상 좌방어사 성응길의 지원에 힘입어 당분간 안동이 적의 치하에 들어가지 않도록 할 수 있었다. <의성 군지>는 '열읍이 붕괴됨에 수령들이 거의 자취를 감추었으나 그는 안동을 겸관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의병을 모집하였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28세 문과에 급제했던 신지제는 '난중에 순찰사, 관찰사, 통제사 등 3영의 종사관으로서 종횡으로 국난극복에 이바지하였다. 그는 임란 극복의 공헌이 크게 알려져 내외의 현직을 두루 거치고 만년에는 통정대부 동부승지에 이르렀다. 선무원종1등공신에 책록되고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사진은 그를 기려 세워진 사당을 거느린 오봉(신지제)종택으로 의성군 봉양면 구미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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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중 가문 사람들만이 아니라 의성에서는 김희, 박광춘, 박사숙, 신심, 신흘, 오계방, 오득심, 정몽열, 정호 등의 의사들도 왜적과 맞서 싸우다 순절했다.

왜적들은 무자비하게 조선 사람들을 죽였다. 의성이라고 다를 바는 없었으니, 다인면 용곡리의 남평 문씨 집성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마을로 들이닥친 왜군들은 습독관(요즘의 학예사와 비슷한 성격의 분야별 전문직 공무원)을 역임한 문경제와 그의 두 아들 문응주와 문명주를 살해했다.

문경제의 처 남양 홍씨가 분노와 두려움에 떠는 손녀를 보듬어 안은 채 며느리 함양 여씨와 마주 앉았다. 왜적들의 야만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논의했지만 얻을 수 있는 결론은 한 갈래밖에 없었다. 세 사람은 낙동강이 저 아래로 휘돌아 흐르는 반룡담 절벽 위로 올라갔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조선 민간인 학살과 능욕의 역사를 말해주는 두 빗돌이 봉양면 장대리에 세워져 있다. 왼쪽 비석은 어머니와 두 달이 일본군에 저항하다 죽은 일을 기리고, 오른쪽의 작은 비석은 죽은 세 모녀의 시신을 지키다 굶어죽은 개를 기린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조선 민간인 학살과 능욕의 역사를 말해주는 두 빗돌이 봉양면 장대리에 세워져 있다. 왼쪽 비석은 어머니와 두 달이 일본군에 저항하다 죽은 일을 기리고, 오른쪽의 작은 비석은 죽은 세 모녀의 시신을 지키다 굶어죽은 개를 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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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차별 살해와 능욕을 저지른 일본군

봉양면 장대리에도 왜군이 밀어닥쳤다.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지만 정태을의 집에서는 그의 아내 박씨와 두 딸이 사로잡혔다. 왜군들이 욕보이려 하자 박씨는 부엌에서 칼을 들고 나왔다. 그러나 대응이 될 리가 없었다. 그녀가 손에 칼을 잡자 왜군들은 오히려 재미있어했다.

어쩔 수 없었다. 박씨는 칼로 두 딸을 찌르고 스스로도 목을 찔렀다. 왜군들이 놀라서 뒷걸음질을 쳐 사라졌다. 피란을 갔던 마을 사람들이 며칠 뒤 돌아와 보니 세 여인의 시신은 산짐승이나 까마귀가 건드린 흔적 없이 온전했다. 봉양면 장대리 산29, 요즘은 도로가 나서 길가에 붙은 산비탈이지만 당시만 해도 산짐승이 유유히 돌아다니던 곳이었다.

딸을 직접 죽인 어머니

세 사람의 주검 옆에 바짝 마른 개 한 마리가 죽어 있었다. 집에서 기르던 개는 주인인 세 모녀가 죽자 그 옆에서 시신을 지켰다. 산짐승이나 까마귀가 덤비면 죽을힘을 다해 쫓았다. 그 덕분에 시신은 온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개는 굶어 죽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 자리에 모녀를 기리는 비석 '열녀 정태을 처 박씨지려 효랑 정 정'을 세우고, 바로 옆에 별도의 작은 비석 '의구'를 세웠다. '열녀 정태을 처 박씨지려 효랑 정 정'에서 '정 정'은 두 딸을 가리키고, '의구'는 의로운 개를 기린다는 뜻이다.

의성군 점곡면 사촌마을 만취당의 김사원 3형제는 모두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이었다.
 의성군 점곡면 사촌마을 만취당의 김사원 3형제는 모두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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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 떠도는 어떤 글은 의성 점곡면 사촌리 207 만취당(보물 1825호)을 류성룡 생가로 지목하기도 한다. 사실이 아니다. 류성룡의 외할아버지 김광수(1468∼1563)와 결혼 이전 및 류성룡 출산 이후 어머니가 살았던 집은 허물어지고 없다. 만취당도 김광수의 증손자 김사원(1539∼1601)이 1582년부터 시작하여 3년에 걸쳐 지은 집이다. 즉 류성룡(1542∼1607)이 태어나고 거의 40년 뒤에 지어진 만취당을 그의 생가라고 할 수는 없다.

안동김씨 종택도 1576년에 김사원이 지었으므로 역시 류성룡 생가가 아니다. 그뿐만 아니다. 류성룡은 집이 아니라 마을 옆의 천연기념물 405호 사촌숲에서 태어났다는 전설도 전해지므로 애당초 생가가 없을 수도 있다.

만취당은 김사원 형제의 임진왜란 유적

만취당을 임진왜란 유적이라고 하면 사실이 된다. 김사원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하여 의병장으로 활동했고, 두 동생 김사형과 김사정도 화왕산성에서 곽재우 군의 일원으로 왜적에 맞섰다. 만취당, 당당한 임진왜란 유적이다.

류성룡의 외할아버지 김광수가 세운 정자 영귀정. 김광수는 류성룡 샐생 이후 40년을 더 생존했다. 류성룡이 이 정자에 많이 출입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류성룡의 외할아버지 김광수가 세운 정자 영귀정. 김광수는 류성룡 샐생 이후 40년을 더 생존했다. 류성룡이 이 정자에 많이 출입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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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곡면 사촌리 319 강변에 있는 영귀정(문화재자료 234호)은 '세운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500년경으로 추정(문화재청 누리집)'되는 건물이다. 이 정자 또한 의미 있는 임진왜란 유적이라 말할 만하다. 생가가 남아 있지 않은 류성룡이 어릴 적에 기어 다녔거나, 아니면 뛰어놀았을 개연성이 높은 집이기 때문이다.

38세에 영귀정을 지은 외할아버지 김광수는 외손자 류성룡이 출생할 무렵 75세였다. 그 후 김광수는 20여 년을 더 생존해 96세에 타계했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 아직 류성룡은 22세로 과거 합격 이전이었다.

생가는 없지만, 류성룡이 뛰어논 영귀정은 남아 있다

그 22년 동안 류성룡은 몇 번이나 영귀정에 갔을까. 횟수까지 밝힐 수는 없지만 영귀정에 류성룡이 간 적이 없을 리는 만무하다. 즉 영귀정은 틀림없는 임진왜란 유적이다. 영귀정 앞 안내판에는 '선조 때 임진왜란을 평정한 영의정 서애 류성룡의 외조부'가 지은 정자라고 뚜렷하게 적혀 있다.

학록정사가 금성산을 배경으로 서 있다.
 학록정사가 금성산을 배경으로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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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면 푸른 금성산을 배경으로, 노랗게 물결치는 벼논을 전경으로 아름다운 모습을 뽐내는 학록정사는 유형문화재 242호이다. 1750년(영조 26년)경 건립된 금성면 산운리 474의 학록정사는 서원 성격의 공간이지만 현재는 강당 건물이 사당 광덕사의 재실 역할을 하고 있다.

사당은 이광준(1531∼1609)을 기린다. 이광준은 1562년(명종 17) 문과에 급제했고,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당시 강릉 부사로 재직 중이었다. 강릉에서 적을 물리치는 전공을 세운 이광준은 뒷날 의병을 일으키기도 한다.

의성군 비안면 산제리 1429의 만장사에는 땅속에서 발굴된 유형문화재 불상이 있다. 만장사에서 뒤로 오르면 화장산성 터가 나온다.
 의성군 비안면 산제리 1429의 만장사에는 땅속에서 발굴된 유형문화재 불상이 있다. 만장사에서 뒤로 오르면 화장산성 터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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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의 화장산성, 화왕산성 승리와 비슷해

의성군이 자랑할 만한 임진왜란 유적에는 '화장산성 터'가 있다. 이름에 '터'가 붙은 데서 짐작되듯이 이곳에는 뚜렷하게 남아 있는 성곽은 없고 여기저기 돌무더기뿐이다. 보통은 조선 시대 산성으로 여겨지는데, 성곽 흔적이 엿보이는 능선 가까운 곳의 만장사에 통일신라 작품으로 여겨지는 석조여래좌상(유형문화재 322호)이 있어 신라 고성이 아닌가 추정되기도 한다.

이 산이 화장산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부터이다. 1592년 4월 비안현청이 가등청정 군대에 점령될 때 관리와 군인들은 문서 등 중요한 것들을 이 산에 숨겼다. 그 후 지역민들은 산으로 올라와 농성에 들어갔다.

한성에 누가 먼저 입성하는가를 두고 소서행장과 경쟁 중이던 가등청정은 호락호락해 보이지 않는 화장산성 공격을 포기하고 그냥 물러갔다. 이곳 관·군·민은 정유재란 때 가등청정이 창녕 화왕산성 아래까지 왔다가 그냥 물러나 함안 황석산성 공략에 나섰던 것과 같은 결과를 얻었다. 싸우지 않고 물리쳤으니 이보다 멋진 승리가 어디 또 있을까.

너무나 맑고 깨긋한 만장사 석불좌상

그래도 견물생심이라는 촌철살인의 진리는 무시할 수가 없다. 눈에 보이는 성곽이 없고, 곽재우 같은 '스타'가 없으니 화장산성은 화왕산성처럼 '손님'을 유치해내지 못한다. 답사자는 비안면 산제리 1429 만장사의 석불좌상만 뵙고 돌아설 수밖에 없다. 그래도 유형문화재 322호인 이곳의 석조여래좌상이 그 어느 곳의 불상보다도 더 맑고 깨끗한 얼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성곽을 밟아보지 못한 채 돌아서지만, 공연히 마음은 편안해지는 느낌이다.

<정만록>을 남긴 이탁영을 기려 세워진 충효사
 <정만록>을 남긴 이탁영을 기려 세워진 충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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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사도 의성이 자랑하는 임진왜란 유적이다. 충효사가 기리는 인물 이탁영(1541∼1610)은 전쟁 발발 초기에는 순찰사 김수 진영에서, 1593년부터는 초유사 김성일과 도체찰사 류성룡의 참모로 활약했다.

임진왜란의 실상을 사실적으로 증언하는 <정만록>

이탁영은 임진왜란 종군을 통해 남다른 업적도 남겼다. 보물 880호인 <이탁영 정만록(征蠻錄)>을 후세에 남긴 일이다. 문화재청 누리집의 해설을 읽어본다.

'조선 선조 때 경상감사의 막하 참모였던 이탁영의 일기로 건·곤의 순서를 단 2권 2책으로 되어 있다. 이탁영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순찰사였던 김수의 막하로 들어가 참모로 활동했으며, 1593년에는 학봉 김성일의 막하에서 전쟁의 여러 전술을 건의하여 승리에 공헌한 바가 많았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나라에서 내리는 상을 굳이 사양하였고, 후에 중추부사에 증직되었다.

이탁영을 기려 세워진 사적비가 사당 왼쪽 담장 너머에 세워져 있다.
 이탁영을 기려 세워진 사적비가 사당 왼쪽 담장 너머에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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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1592∼1598년까지의 일기로 건권은 표지 뒷면에 임진왜란 당시 참전한 영상 이하 여러 관리들의 좌목(座目, 자리의 차례를 적은 목록)이 있고, 다음에 「임진변생후일록」이라는 제목 아래에 그날그날 보고 듣고 겪은 일들을 적고 있다. 다만 임진 기사는 날마다 기록하였고, 1593년에서 1598년까지는 연월 중심으로 중요한 사건만 적었다.

곤권은 임진왜란의 시작과 하루하루의 기록, 통문 등을 기록하게 된 이유를 적고, 이어 7년 동안에 있었던 중요한 교서, 통문, 격문 등을 고스란히 싣고 있다. 1592년 4월 14일 임진왜란이 시작된 날로부터 시작하여 그해 연말까지는 약 10일간 기록하지 아니한 것을 제외하면 완전하게 적혀 있다.

이 책은 임진왜란 연구의 매우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며, <정만록>이라는 책이름이 선조 임금이 정해준 것이라는 점에서 자료로서의 가치가 더해진다.'

충효사는 의성읍 상거리 579에 있다. 사당으로 올라가는 삼문에는 '양전문(兩全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충과 효 두 가지를 모두 실천한 인물을 참배하러 가는 길이라는 뜻이다.

충효사 옆에 작은 기념관이 건립되기를

충효사(忠孝祠)는 이곳 전체의 이름이면서 동시에 사당의 이름이다. 이곳을 찾았을 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문이 굳게 닫혀 있다는 점이다. <이탁영 정만록> 실물이 안동 한국국학진흥원에 보관되어 있어 이곳에서 볼 수 없다는 점도 아쉬운데 충효사 참배도 불가능하니 이를 어쩔 것인가.

사당 왼쪽에 넓은 빈 터가 눈에 띈다. 그곳에 작은 기념관을 한 채 지으면 좋으련만.


태그:#정만록, #이탁영, #김치중, #신지제, #장현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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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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