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기사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후지TV에서 방영된 2017년 일본 애니메이션 <쓰레기의 본망>.

ⓒ Lerche


동명의 만화가 원작인 <쓰레기의 본망> 애니메이션은 자극적이다. 막장 드라마처럼 인물들의 심리는 어딘가 엇나가 있고, 인물 간의 대화보다는 행동 묘사와 독백이 주를 이룬다. 작품의 내용은 특별한 사건 없이 흘러간다. 이 모든 게 일반적인 시선으로 보았을 때 정상적인 구성의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자극적임에도 잔잔한 물결과 같은 여운이 있다. 이 작품은 마치 달지 않은 민트 초콜릿을 먹는 듯한 느낌을 준다. 분명 달콤한 것도 같지만, 밀려오는 뒷맛이 이상하다.

<쓰레기의 본망>이라는 제목을 대강 해석하자면 "쓰레기가 진심으로 바라는 것" 정도가 된다. 그렇다면 쓰레기는 누구를 칭하는 것일까. 여기서 쓰레기는 단지 작품의 주연이 되는 두 고등학생 남녀를 칭하는 것이 아니다. 주연을 포함한 여섯 명의 인물 모두를 칭한다. 서로 다른 모습을 한 이들의 사랑은 개인의 욕망에 충실하고 타인의 욕망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은 모두 상대를 사랑하지만 정작 상대가 원하는 것의 본질에는 손을 끼치지 않는다. 얽매이지 않는 타인의 욕망에는 자신이 사랑하는 상대의 욕망이 포함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상대방을 배려하고 이해해야 할 사랑의 관계가 성립될 수 없다. 때문에 모두가 제대로 된 사랑을 이루지 못한다. 결국, 이러한 이기적인 관계는 충족되지 않는 결핍에서 끝없는 자기파괴를 부른다. 작품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자기파괴가 진행되며 마침내 이를 극복하는 인물들의 성장이다.

6명의 인물이 모두 같은 공간에 있다는 점은 작품을 이해하기 쉽게 만든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만큼 단순하다는 뜻이다. 학교의 선생과 학생, 그리고 친구들이라는 설정은 사건을 따라가는 독자에게 통합적인 정보를 제시한다. 작품이 전개되는 공간과 시간이 크게 구분 지어지지 않으니 말이다. 학교면 학교, 집이면 집, 한정된 공간에서 많은 정보를 제시한다. 많은 정보를 제시하지만 헛갈리지는 않다. 정보의 제시가 주로 인물의 행동보다는 독백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작품의 절반 이상이 독백이기에 명확하게 개인의 입장이 규정되어 있다. 따라서 독자들이 캐릭터의 행동과 마음에 추론과 설명을 할 필요가 없고, 순수하게 감정이입만을 할 수 있는 자리가 완성된다. 독자들은 자신의 가치관과 맞는 캐릭터를 찾아 자신을 동일시한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애니메이션보다는 커다란 연극처럼 보인다.  

게다가 사건이라고 할만한 것도 없다. 오로지 평탄함만이 있을 뿐이다. 물론 누군가에겐 전혀 평탄하지 않은 전개이겠지만 분위기가 그렇다. 배경으로 깔리는 음악은 잔잔하고, 독백만이 계속된다. 인물들에게 특별한 배경이 있는 것도 아니다. 동성애자, 소꿉친구, 선생님과 친구들. 모두가 평범한 인물들이다. 부모님 한 분이 안 계시는 설정은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모두 다 똑같은 사람이고 친구일 뿐이다. 평범하게 학교생활을 하고 성적 또한 나쁘지 않다. 대인관계가 엇나간 것도 아니다. 작품의 포커싱은 사랑의 가치관에 집중되어 있다. 이러한 설정은 등장인물들 사이의 관계를 유기적이고 끈끈하게 만들어 작품의 진행을 한층 매끄럽게 만든다. 인물의 감정과 성격을 표현하기 위한 사건은 치우고, 오로지 인물 그 자체에만 집중한다. 누구에게나 개인의 사정이 있고, 어느 각도에서 바라본 나의 모습은 타인과 같다. <쓰레기의 본망>이 다른 연애 장르의 애니메이션과 차별화 되는 점은 그것이다.

과거와 현재

 후지TV에서 방영된 2017년 일본 애니메이션 <쓰레기의 본망>.

ⓒ Lerche


작품을 크게 세 가지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초반부에서는 주연인 두 명의 남녀(무기, 하나비)가 궁극적인 사랑의 결핍(짝사랑)을 해소하기 위해 서로에게 다가간다. 두 명의 남녀가 짝사랑하는 상대(아카네, 나루미)는 서로를 사랑하게 되고, 주연들은 서로가 짝사랑하는 상대의 비밀을 알게 된다. 자신이 짝사랑하는 상대의 비밀은 지금 현재 위로를 받는 가짜 연애 상대로부터 알려진다.

사랑을 주고받는 두 편도의 방향에서는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으나, 그것이 편도가 아닌 곡선으로의 회귀가 될 때 문제가 생긴다. 작중의 두 주인공은 서로의 짝사랑 상대에게 연심이 전해지지 않자 대신 사랑을 받아줄 상대를 만든다. 하나비와 무기는 일종의 유사 연애 상태에 있는데, 섹스가 없는 섹스 프렌드처럼 보인다. 야외에서의 키스나 집안에서의 애무는 그들을 명백하게 연인으로 규정짓는다. 그러나 서로 섹스 이전까지의 행위를 하면서도 섹스만큼은 하지 않는다.

섹스 프렌드라는 이해 타산적인 관계는 마음이 없는 인형으로서의 상대에게 자신의 이상향을 투영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서로가 좋아하는 상대와의 섹스를 상상하며 대리 만족을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만난 관계임에도 마음은 완벽하게 합쳐지지 않는다. 두 인물 간의 성격 차이에서 오는 괴리는 정과 정이 통하는 행위인 섹스에 대한 거부감으로 나타난다. 섹스라는 게 사랑하는 상대에 대한 지켜야 할 정조로 인식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고, 같은 이익과 목적을 가지고 행동하나 본질에서는 다른 성격을 지닌 두 인물에 대한 어긋남의 묘사이기도 하다. 즉, 두 인물이 섹스하지 않는 건 본인의 마음에 대한 거부감의 표시이다.

두 인물이 가진 성격의 차이는 전에 겪었던 섹스 행위로 묘사된다. 하나비는 살면서 섹스를 해보지 않았지만, 무기는 중학교 때부터 이해관계에 따른 타자와의 섹스 프렌드 관계가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동정이 아니다. 위에서 말했듯, 섹스 프렌드와 섹스라는 두 요인은 사랑에 대한 두 인물의 태도를 명백하게 보여준다. 하나비가 사랑하는 상대에게만 몸과 마음을 내어준다면, 무기는 몸과 마음은 따로이기에 사랑 없이도 섹스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무기가 계속해서 하나비에게 서로의 짝사랑 상대를 상상하며 대리 만족을 위한 섹스를 요구하는 것은 일종의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행위처럼 보인다. 사랑은 그 자체가 아니라, 이용 가능한 무언가라고 말이다. 물론 그 과정이 강압적이지는 않다. 결국, 지속적인 합의 끝에 두 사람은 섹스의 목적성을 달성하지만, 서로가 짝사랑 상대를 대하는 태도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느끼고 다시는 섹스를 하지 않는다.

하나비가 짝사랑하는 나루미는 어렸을 때부터 남매처럼 자라온 옆집 오빠로, 현재 하나비가 다니는 학교에 선생님으로 부임해있다. 아버지가 없는 가정에서 자란 하나비에게 오빠이자 아버지의 역할을 담당했다. 무기가 사랑하는 아카네는 중학교 때 과외를 해주던 가정교사로, 현재 무기가 다니는 학교에 선생님으로 부임해있다. 아카네는 다른 여자들이 원하는 남성을 유혹해 짝사랑 상대를 빼앗긴 여성의 모습에서 희열을 느끼는 비열한이다. 작중의 두 주인공이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에서 만족을 느낀다면 아카네는 단순히 사랑을 받는 것뿐만이 아닌, 누군가의 사랑을 가로채야만 만족을 한다. 두 주인공과 아카네는 사랑을 주고받는 방법에 있어 대칭의 관계이며, 이 세 사람은 작품의 제목인 <쓰레기의 본망>에 부합하는 가장 대표 격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나루미에 대한 하나비의 연심은 엘렉트라 콤플렉스를 떠올리게 한다. 아버지의 역할을 대체하는 나루미를 사랑하는 딸 역할의 하나비와, 아버지의 옆에 있는 연인 아카네를 질투하면서도 자기 자신 또한 아카네를 닮아가는 모습에 회의감을 느끼고 끝없는 자기파괴의 길로 들어선다는 점이 그렇다.

아카네는 하나비가 짝사랑하는 상대가 나루미라는 것을 알고는 의도적으로 나루미에게 접근해 사랑에 빠지게 만든다. 아카네가 나루미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상태에서 하나비는 짝사랑 상대인 나루미의 모습을 보며 사랑을 빼앗긴 박탈감을 느낀다.

아카네는 하나비에게 상처를 주려고 일부러 나루미와의 깊은 관계를 암시하는 모습을 보인다. 상처를 받고 아카네에 대해 이것저것 알아보던 하나비는 아카네의 본망을 알게 되고, 무기가 사랑에 대한 박탈감을 느낄 것을 우려해 사실을 무기에게 숨기고자 한다. 그러나 무기는 아카네를 사랑하고 얼마 되지 않던 중학교 때부터 이미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럼에도 자신이 아카네를 바꾸어 놓겠다는 마음으로 그녀를 짝사랑한다. 아카네 본인도 자신이 지닌 본성을 숨기지만, 그것이 드러났을 때는 딱히 부정하려 들지 않는다.

사랑과 비밀

 후지TV에서 방영된 2017년 일본 애니메이션 <쓰레기의 본망>.

ⓒ Lerche


결국, 하나비 혼자만이 간직하던 비밀은 사실상 더 비밀이 아니게 된다. 무기는 처음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아카네는 그것을 숨기려는 마음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로가 공유하는 비밀은 같지만, 그것이 인식되는 과정은 차이가 있다. 중학교 때의 무기가 아카네의 비밀을 알게 된 것은 그녀가 전날 입었던 옷과 오늘 입었던 옷이 같으며 모텔 샴푸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뒤를 밟은 것도 있다) 고등학생인 현재의 하나비 또한 동일한 이유로 아카네의 비밀을 알게 된다. 그러나 아카네의 잠자리 상대가 자신이 사랑하던 나루미라는 사실을 아카네에게서 직접 전해 듣는다. 무기가 모든 걸 알고도 묵인한 방관자의 위치라면, 하나비는 사건을 목격한 목격자이자 범인에게 피해를 본 피해자이다.

주어진 비밀에 대한 인식이 하나비에게는 있고 무기에게는 없었다. 무기가 진실을 아는 것을 아카네는 몰랐고, 하나비는 아카네에게 자신의 비밀에 대한 풍문을 흘려들었다. 두 주연의 태도 차이는 이것에서부터 선명하게 갈리게 된다. 무기가 이제 막 돌아선 골목길에서 맞닥뜨린 진실을 품에 안고 화염 속으로 뛰쳐 들어가고 싶어 하는 나방이라면, 하나비는 눈앞에 닥쳐온 재앙과도 같은 진실을 부정하고 멀리서 지켜보는 나비와도 같다. 회피하여 자신의 마음이 편안해지기 때문에 회피와 이기는 하나와도 같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러한 이기성은 후반부에 아카네가 무기를 유혹할 때 폭발하여 하나비에게 상처를 준다. 하나비의 회피성은 마주할 수 없는 상처를 마음속에 축적해 주변인을 혼란스럽게 하고, 혼란스러운 무기의 이기성은 진실을 외면해 아카네가 나루미를 유혹하는 것을 말리지 않음으로써 하나비에게 상처를 준다. 또한,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짝사랑 상대(아카네)와의 섹스를 통해 자기파괴에 빠진다. 몸과 마음의 분리된 인식이 무기를 빠져나올 수 없는 탐욕스러운 잠자리로 이끌었고, 그 사이에서 선택받지 못한 하나비는 유사 연인 관계가 사라진 자리 위에서 이리저리 방황하게 된다. 진실을 받아들이는 두 인물의 태도가 이기적 행위로 갈리는 것이다.

중반부로 갈수록 두 남녀의 고뇌는 주변으로 확장되어 서로가 짝사랑하는 상대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한다. 그리고 이야기가 주변 인물로 확장되며 짝사랑 중인 자신을 짝사랑하는 각자의 상대가 등장한다. 어렸을 때부터 무기를 짝사랑해온 노리코라는 인물과 우연히 마주친 하나비를 사랑하게 된 동성의 사나에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노리코는 어렸을 적 무기와 자신을 왕자님과 공주님으로 연관 지은 어른들의 말이 머릿속에 박혀 무기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왕자님과 공주님이라는 강박에 빠져 자기 자신을 공주처럼 치장하고 행동하는데, 마치 유사 약혼의 관계에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하나비는 자신과 가짜 연애 관계에 있는 무기로 인해 노리코로부터 끝없는 견제를 받게 된다. 노리코는 하나비와 무기가 진짜 사랑을 위한 가짜 사랑을 연기하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하나비의 짝사랑 상대를 가로챈 아카네와,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노리코의 짝사랑 상대를 가로챈 하나비는 사실상 같은 본질을 가졌다. 그것을 깨달은 하나비가 끝없는 자기파괴에 빠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자신이 가장 증오하고 미워하는 상대와 동일한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버렸으니 말이다. 이해관계에 따라 몸을 섞는 무기 또한 아카네와 그 성격이 같다. 아카네와 무기의 사랑과 몸의 분리는 세세함이 다르나 큰 틀에서 같다. 다만 상처의 방향이 내면으로 향하는지 외면으로 향하는지가 다를 뿐이다.

무기는 여태까지 몸과 마음은 분리가 되어 있다는 생각으로 살아왔고, 그것에 대한 것이 행동으로 나타난다. 자신이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이상향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왔고, 마음속의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여러 여자와 사랑 없이 몸을 섞었다. 마침내 무기는 순수한 이상향으로서의 아카네를 발견했으나, 결국 진실을 맞이하고도 자신과 비슷한 성격을 가진 아카네를 계속해서 사랑하게 된다. 사랑의 목적성이 "자신이 아카네를 바꾸어놓겠다"라는 것으로 바뀐 채로 말이다. 무기의 지속적인 짝사랑은 결국 자기파괴로 향하는 지름길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정작 무기는 그런 목적성을 지니고서도 아카네와 동일한 행동을 하게 된다. 자신을 짝사랑하는 노리코에게 마음 없이 데이트 신청을 하며 잠자리에 든 것이다. 물론 사랑이 없기에 결합에 이르지는 못한다. 결국, 작품의 제목인 <쓰레기의 본망>에서 쓰레기가 의미하는 것이 단 아카네 혼자만이 아니게 되고, 하나비 또한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된다. 무기는 아카네와 사실상의 동일 선상에 놓여있다. 그래서 쓰레기는 세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된다.

하나비를 사랑하는 사나에라는 인물이 있다. 사나에는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보러 가던 중 지하철에서 만난 치한으로부터 자신을 구해준 하나비를 짝사랑하는 인물이다. 사나에의 사랑은 동성 간의 사랑이고 성적인 사랑이다. 마음으로만 연결된 사랑이 진짜 사랑이라 주장할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몸이 연결된 사랑은 마음 혼자 존재하는 것보단 깊은 사랑임이 틀림없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타 인물들보다 자신이 사랑하는 상대에게 가장 적극적으로 들이대는 사나에의 사랑은 가장 깊은 사랑이라고 보인다. 물론 다짜고짜 들이대는 사나에가 정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다른 인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상이라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적극적이면서도 배려를 하는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하나비가 사랑하는 인물이 있기에 묵묵히 바라만 볼 뿐이다. (노리코와 마찬가지로 진짜 사랑의 대상이 있다는 것은 몰랐다)

결말에 이르는 후반부는 모든 사랑이 어떤 형태로든 결실을 맺는다. 성공과 실패를 판가름할 수 없게 말이다. 가짜 연애 관계를 청산하고 진짜 연애 관계로 이루어지기 위해 두 주연은 자신들의 진짜 사랑을 청산하기로 한다. 그 방법이란 게 고백해서 차이고 깔끔하게 정리하는 것이다. 두 주연은 깔끔하게 차이고 이제 막 사귀어야 했으나 무기의 고백을 들은 아카네가 무기를 유혹하고, 거기에 넘어간 무기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는 와해한다.

가짜 사랑에서 진짜 사랑으로 나아가기로 함으로써 가짜와 진짜의 구분에 대한 개념이 모호해진다. 나에게는 이것이 마치 사랑에 대한 궁극적인 물음처럼 보인다. 여러 인물을 통해 사랑의 여러 면을 보여주고 있지만 이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우리가 위조품을 구매하고 진품을 가진 것과 같은 만족감을 얻는 것처럼, 사실 진짜와 가짜에 대한 마음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게 내가 사랑하는 그의 어떤 부분을 좋아하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만들어낸 허상에 가까운 무언가를 보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이러한 불확실성이 우리를 사랑으로 이끄는지도 모른다. 사랑은 그토록 단순하다.

그리고 또 다른 마음

 후지TV에서 방영된 2017년 일본 애니메이션 <쓰레기의 본망>.

ⓒ Lerche


한편 하나비가 나루미에 대한 연심을 접은 것을 알게 된 아카네는 이제 나루미에 대한 사랑을 연기하는 것을 그만두려 한다. 아카네는 자신의 성격답게 돌려 말하지 않고 지금까지 자신의 행실을 고백하며 자신은 쓰레기이니 떠나달라고 한다. 그러나 나루미는 아카네의 그런면조차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한다. 자신이 당신의 성격을 바꿀 수 있게 해달라고 기회를 달라고 말하며 청혼한다.

작품 내내 그저 순수하고 올곧은 성격을 가진 것으로 보이던 나루미다. 아카네의 노골적인 섹스 어필조차 무의식적으로 거부한 인물이다. (물론 무의식이 깨어지는 취중 상태에서는 순수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도 아카네의 자기 고백을 듣고서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자신이 생각해오던 "청혼"을 그대로 실행에 옮기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아마 작가는 이런 불이해성을 의도했을 것이다. 나루미에게는 자신이 사랑하는 아카네의 과거는 상관없고 함께할 미래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른바 맹목적인 사랑이다. 죄를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하느님의 말씀이 생각나기도 한다. 인물은 인물이고 인물에 대한 사랑은 분리되어 있다는 건데, 이것은 아카네가 가진 몸과 마음의 분리의 다른 방향이기도 하다. 몸이 인물 그 자체라면 마음은 인물에 대한 사랑인데, 나루미에게 있어 사랑은 그저 마음만이 있으면 되는 것이다. 겉으로 보면 극과 극을 달리는 아카네와 나루미의 사랑은 "마음"을 중요시하는 사랑의 담론으로 연결되어 결실을 본다.

아카네에 대한 나루미의 진심을 전해 들은 무기는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사랑하는 이를 바꾸는 일"을 이미 나루미에게 빼앗겨 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카네에 대한 마음을 접는다. 위에서 언급했듯 아카네와 나루미의 사랑이 맺어진 것은 "마음"에 대한 부분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본질적으로 아카네와 같은 본성(몸과 마음의 분리)를 공유하고 있던 무기는, 자신의 자리가 되어야 할 것이 나루미에게 대체되어 버렸음을 알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을 드러낸 것은 매력이 없다. 수면 위로 드러난 빙산처럼 겉으로 일부가 드러난 것은, 수면 아래의 것에 미치도록 집착하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가 수면 아래에 있는 거대한 것들을 알아갈수록 점점 흥미를 잃게 된다. 권태는 그것에서 오고 많은 커플이 믿음이 깨어져 결별에 이른다. 나루미와 무기는 이런 사랑의 맹목성에서 차이가 있다. 그 때문에 여러 섹스 프렌드를 전전하며 몸을 섞던 무기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맹목성의 한계를 느끼고 오랜 사랑을 금세 포기하게 된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 가장 큰 걸림돌은 믿음이기 때문이다. 무기는 누군가를 믿을 자신이 없었던 거다. 그래서 그만큼 사랑에 정착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것이고.

무기와의 결별 이후 방황하던 하나비는 나루미가 아카네에게 청혼했다는 사실을 알고 거듭된 절망에 빠진다. 그런 하나비에게 사나에가 다가와 빈틈을 메꾸려 한다. 그러나 사나에 또한 하나비에 대한 마음을 접는다. 무기와는 정반대의 이유로 말이다. 무기가 자신을 대체해버린 누군가(나루미)가 있기 때문에 연심을 접었다면, 사나에는 자신이 사랑하는 상대가 본래 사랑하던 것(나루미)을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연심을 접었다.

사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대체품이다. 모두가 마음속에 바라는 순수한 이데아의 세계가 있고 이데아의 사람이 있다. 그 이상적인 것이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기에 그것에 가장 가까운 것을 취하고 그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사랑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이상형이라고 부르는 마음속의 사람에 가까운 사람을 취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사나에는 현실과는 동떨어져 보이는 작품의 인물 중에서 가장 현실적으로 보인다. 현실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대체할 수 없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작중에 인물들과 사랑에 대한 담론을 상징하는 요소가 여러 가지 것이 있다. 일단 공통적인 요소로는 섹스를 대하는 태도가 있다. 위에서 말했듯 작품에서 6명의 인물 모두 한 번씩은 섹스하는 장면이 나온다. 한 인물이 여러 인물과 섹스를 하기도 하고, 한 인물과 섹스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말로 정과 정이 통하는 사이는 드물다. 대부분 그 전의 단계에서 그만둔다. 정이 통하는 삽입이라는 행위 직전에 섹스를 그만두는 것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섹스라는 건 단순히 사랑뿐만이 아닌, 상대방에 대한 깊은 이해와 배려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섹스 프렌드의 관계라도 말이다. 그렇기에 작중에서 가장 많이 섹스에 대한 망설임을 보여주는 무기의 태도는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진짜 사랑이라고 생각되지 않기에 단순한 육체적 관계라도 맺을 수 없다.

과거에 무기는 사랑하지 않아도 아무하고 잠자리를 하는, 아카네와 같은 부류의 인물이었지만 가짜 연애 관계에 있는 하나비가 자신과의 섹스에 대해 "진짜 사랑"의 의구심을 품는 것을 보고 성격이 변하게 된다. 무기가 하나비에게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이지만, 하나비 또한 무기에게 영향을 끼친 것이다. 이것은 미묘하지만 중대한 변화로, 자신을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노리코와 잠자리 또한 거부하는 이유가 된다.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심으로 사랑하는 아카네가 자신을 유혹할 때 거부하지 못하는 계기가 된다. 이것은 다시 하나비의 방황으로 이어진다.

하나비가 무기의 섹스에 대한 태도를 바꾸어 놓았다면, 아카네의 섹스에 대한 태도를 바꾸어 놓은 것은 나루미이다. 나루미의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사랑 그 자체만을 바라보는 맹목적인 태도"는 지금까지 아카네가 믿어오던 "사랑을 받는 것"에 대한 가치관을 틀어놓는다. 타인이 사랑하는 대상을 빼앗아 그 물줄기를 자신에게 향하는 것으로 마음을 씻어내리던 아카네는 자기 자신만을 바라봐주는 가장 순수한 의미에서의 사랑을 맛본 것이다. 즉, 사랑 그 자체에서 사람 그 자체로의 전이이다. 무기처럼 말이다.

반대로 사람 그 자체에서 사랑 그 자체로의 전이가 이루어진 인물이 있다. 노리코와 사나에이다. 노리코가 어렸을 때부터 왕자님인 무기 하나만을 사랑해야 한다는 강박감에 시달렸다면, 사나에는 자기 자신을 구해준 이에게 보답해야 한다는 일종의 보상 심리로 하나비를 좋아하게 되었다. 이것들을 상징하는 것이 각각 노리코의 리본이고 사나에의 사탕 껍질이다. 왕자와 공주의 환상에 빠져 자신을 공주님처럼 치장하던 노리코의 리본은 자신을 묶어놓던 결박의 요소이고, 첫 만남에 고등학교 입학 시험장을 같이 향하며 하나비가 사나에에게 준 사탕의 껍질은 사탕이라는 보상이 빠진 허울뿐인 껍데기이다. 

죄책감, 물, 씻다

 후지TV에서 방영된 2017년 일본 애니메이션 <쓰레기의 본망>.

ⓒ Lerche


결말부에서 이들은 각자의 사랑을 포기하며 한층 더 성장하게 된다. 공주님 같은 자신의 의상을 학교 축제의 패션쇼에서 내보이는 노리코의 모습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무기에게 가둬놓지 않겠다는 의지를 반영한 결과이다. 평소에 하고 다니던 리본 또한 더 이상 하지 않는다. 타인으로부터 설명되는 나의 모습에서 온전한 나의 모습으로 변화한 것이다. 무기의 공주님인 내가 아닌, 나 자신으로써 말이다. 사나에는 하나비가 좋아하던 긴 머리를 자르고 자신을 좋아하던 남자아이의 곁에 있게 된다. 사탕 껍질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독자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달렸을 것이다. 그녀가 미련을 버렸을지, 아닐지는 아무도 모른다.

작품은 이런 배반적 사랑 행위에 대한 죄책감을 물의 이미지로 은유한다. 물은 더러운 것들을 씻어 내리는 순수함과 청결, 그리고 신화적으로는 탄생의 의미가 있다. 작품에서 수시로 보이는 하나비와 무기가 마시는 생수는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부정성을 부정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순수함(생수)을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대책인 셈이다. 결말 부에 모든 갈등이 해소되고 쓰레기통에 버려진 생수병을 의도적으로 비추는 건 이러한 죄책감의 해소를 의미하는 것이다. 서로가 짝사랑하던 상대가 사라져 "가짜" 사랑에서 "진짜" 사랑으로 나아갔기 때문에 두 인물은 더 죄책감이 없다.

이러한 물을 몸에 끼얹는 행위는 죄책감을 씻어 내리는 행위이다. 작중에서는 그것이 샤워, 목욕, 온천, 비의 형태로 나타난다. 하나비는 목욕을 하며 무기와 아카네는 함께 샤워한다. 나루미와 아카네는 함께 온천을 가며 아카네, 무기, 하나비, 사나에는 빗속에서 서 있는 장면이 나온다.

하나비의 목욕은 죄책감의 해소를 위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카네와 무기의 샤워는 자신이 부정하며 겉으로는 느껴지지 않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은연중인 죄책감을 씻어 내린다. 이런 죄책감은 후반부에 무기가 아카네에게 이제껏 아카네를 사랑해왔던 마음을 접겠다고 말을 하는 장면에서 다시금 되살아난다. 비가 내리는 밤에 육교에서 만나는 장면이다.

비라는 것은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져 더러운 것들을 씻어 내린다. 마치 샤워처럼 말이다. 샤워는 애초에 인류가 비를 모방한 인공적인 행위이다. 그렇기에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우산으로 막는 두 인물의 모습은 죄책감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밤은 어둡고, 육교는 두 인물을 공간적으로 분리한다. 앞으로의 두 인물의 방향이 다름을, 그러나 그 본질은 변하지 않음을 암시한다. 죄책감을 해소하지 않았으니 그렇다.

반대로 하나비와 사나에가 여행을 간 펜션 뒷뜰에서 비를 맞으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무기와 아카네의 관계와는 대조적이다. 비를 맞으며 대화를 나누는 행위는 두 인물 사이의 죄책감에 대한 해소의 은유이다. 또한, 같은 공간에서 마지막으로 나누는 키스는 관계의 완벽한 종언을 선언한다. 앞으로 서로를 회피하지는 않지만, 둘 사이에 접점은 없게 된다. 따라서 연인 간의 관계에서 친구 사이로 관계의 지향성이 달라진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하나비와 나루미의 마지막 만남에서는 비가 내리지 않는다. 두 인물 사이에는 순수한 사랑 (유사 남매간의 끈끈함.)이기 때문에 씻어내릴 죄책감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나루미를 이성적 사랑의 대상으로 본 하나비만이 홀로 눈물을 흘린다. 

나루미와 아카네가 함께 여행을 간 온천에서는 나루미가 아카네에게 청혼한다. 그동안 자신을 향한 누군가의 사랑에 무색하던 아카네가 나루미의 청혼을 받아들인 것은, 온천에서 몸을 씻고 나온 말끔한 순수한 상태에서 고백을 맏닥뜨렸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고백에 앞서 깨어진 나루미의 안경은 그 순수함에 대한 회귀를 의미한다. 하나비가 좋아하게 된 나루미의 모습은 안경을 쓰지 않던 때부터였고, 임용고시에 붙고 나서야 안경을 겨우 쓰게 되었기 때문에, 안경 없이 마주한 나루미의 모습은 선생님(목적이 있는 관계)으로서가 아닌 순수한 사랑을 베푸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하나비도 안경이 있는 쪽보다는 없는 쪽을 더 좋아했고, 따라서 아카네의 권유에 따라 안경 대신 렌즈를 끼게 된 나루미의 모습 또한 존중해준다. 아카네가 더 이상 부도덕한 목적으로 자신의 옛사랑을 마주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결국 2명의 남녀와 서로가 짝사랑하는 상대, 그리고 남녀를 짝사랑하는 2명의 인물을 포함한 6인 모두는 사랑이라는 큰 틀에서 미묘하게 변용된, 같은 사랑을 하고 있다. 하나비는 결핍된 사랑, 무기는 만족하는 사랑, 아카네는 빼앗는 사랑, 나루미는 관념적 사랑, 노리코는 주어진 사랑, 사나에는 운명적 사랑이다. 작품은 사랑의 여러 가지 모습들을 보여주고 독자에게 물음을 던진다. "진짜" 사랑의 모습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말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선호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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