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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읍성의 일부. 4월 14일 부산진성을 함락한 일본군은 그 다음날인 15일 동래읍성을 공격했다. '싸우려면 싸우고 아니면 길을 비켜달라'는 1만 3,000여 일본군의 요구에 백성까지 합해도 3,000명 불과한 동래읍성의 수령 송상현 부사는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라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동래읍성의 일부. 4월 14일 부산진성을 함락한 일본군은 그 다음날인 15일 동래읍성을 공격했다. '싸우려면 싸우고 아니면 길을 비켜달라'는 1만 3,000여 일본군의 요구에 백성까지 합해도 3,000명 불과한 동래읍성의 수령 송상현 부사는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라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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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4월 15일, 전날 부산진성(첨사 정발)을 짓밟은 일본군은 동래읍성(부사 송상현)을 공격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군사 100여 명을 남문으로 보내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비켜 달라'고 요구했다. 동래 부사 송상현은 단호했다. 그는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라고 대답했다.

14일 부산진 함락, 15일 동래 함락

전투가 벌어졌다. 너무나 중과부적이었으므로 송상현, 양산 군수 조영규, 비장 송봉수와 김희수, 겸인 신여로, 향리 송백, 백성 김상 등 무수한 사람들이 적과 싸우다 순절할 수밖에 없었다. 동래교수 노개방, 학생 문덕겸과 양조한 등도 동래향교에서 적에 맞서다 장렬히 전사했다. 생포되었던 송상현의 첩 금섬은 사흘 내내 적을 비난한 끝에 결국 살해되었다. 동래성이 적의 손에 들어갔다.

부사 송상현 등 동래읍성 전투에서 순절한 영령들을 기리기 위해 만든 송공단(왼쪽)과 '송상현 선생 상'
 부사 송상현 등 동래읍성 전투에서 순절한 영령들을 기리기 위해 만든 송공단(왼쪽)과 '송상현 선생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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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일본군은 일부 군사를 보내 다대포 진성도 점령하려 했다. 주력 부대가 동래성으로 가고 소수 병력만으로 이루어진 공격이었으므로 아군은 진지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동래성을 함락한 1만 8000여 적군이 한꺼번에 몰려온 이튿날까지 무사할 수는 없었다. 첨사 윤흥신을 비롯한 모든 아군이 전사하면서 싸움은 끝났다.

동래성을 점령한 일본군은 다대포진을 공격했다. 이곳을 지키던 첨사 윤흥신 등 아군 역시 중과부적이었던 탓에 모두 순절했다. 사진은 윤흥신 첨사 등을 기려 세워진 윤공단(왼쪽)과 윤흥신 장군 석상이다. 모두 부산에 있다.
 동래성을 점령한 일본군은 다대포진을 공격했다. 이곳을 지키던 첨사 윤흥신 등 아군 역시 중과부적이었던 탓에 모두 순절했다. 사진은 윤흥신 첨사 등을 기려 세워진 윤공단(왼쪽)과 윤흥신 장군 석상이다. 모두 부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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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되어 있는 김해읍성의 일부. 1592년 4월 20일 일본군에게 점령당했다.
 복원되어 있는 김해읍성의 일부. 1592년 4월 20일 일본군에게 점령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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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낙동강 너머 김해는 4월 20일 적의 손에 넘어갔다. <합천 군지>에는 '4월 17일에서 20일까지 4일간에 걸친 김해성 싸움은 순수 의병과 의병 지휘자만으로 왜군과 싸운 임진왜란 최초의 격렬한 전투'라고 기술되어 있다. 관군 대장이 이끈 부산진성, 동래 읍성, 다대포진 전투와 달리 김해성 전투는 의병들만으로 적과 결전을 치렀다는 뜻이다.

관군은 어디로 갔을까? 도망쳤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소수 병력을 보내어 침탈을 시도해온 4월 17일과 18일에는 대장 격인 김해 군수와 부장 격인 초계 군수가 성내에 있었다. 하지만 침략군 1군인 소서행장의 본대가 대구를 향해 진격한 뒤, 늦게 상륙한 구로다 나가마사의 3군 1만 3000여 명이 밀어닥친 19일에는 어느새 줄행랑을 놓고 없었다.

관군 지휘관은 도망하고 백성들만 남았다

지휘관이 어떻게 도망을 갈 수 있을까, 하고 놀랄 것도 없다. 낙동강 동쪽의 육군을 총지휘하는 경상 좌병사 이각도 동래성 전투가 벌어지기 이전에 도망쳤고, 수군을 총지휘하는 경상 좌수사 박홍도 싸움 한번 없이 수영성을 적에게 헌납하고 달아났다. <선조실록> 1592년 4월 13일자는 '(적이 밀려오자 경상좌도) 병사 이각은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달아났다. 200년 동안 전쟁을 모르고 지낸 백성들이라 각 군현(郡縣, 대략 요즘의 군과 면)들은 풍문만 듣고도 놀라 무너졌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김해 전투에서 순절한 송빈, 이대형, 김득기, 류식 선비를 기리는 송담서원(왼쪽 사진), 송빈 의병장 순절 장소인 김해 서상동 고인돌(기념물 4호, 가운데 사진), 송담서원의 전신인 송담사가 세워졌던 진례면 신안리의 '삼충대' 빗돌(작은 원이 빗돌 위치, 큰 원이 빗돌을 확대해서 본 모습).
 김해 전투에서 순절한 송빈, 이대형, 김득기, 류식 선비를 기리는 송담서원(왼쪽 사진), 송빈 의병장 순절 장소인 김해 서상동 고인돌(기념물 4호, 가운데 사진), 송담서원의 전신인 송담사가 세워졌던 진례면 신안리의 '삼충대' 빗돌(작은 원이 빗돌 위치, 큰 원이 빗돌을 확대해서 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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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담서원 내력


1708년(숙종 34), 이순신의 현손 이봉상이 김해 부사로 와서 <금주지(金州誌)>를 보고 김해 읍성 전투의 전말을 알게 되었다. 감격한 이봉상은 김해 의병들을 기리는 현충 시설의 건립을 조정에 건의했고, 이윽고 송담서원이 세워졌다.
서원은 1833년(순조 33) 표충사(表忠祠) 사액도 받았다. 그러나 1868년(고종 5) 서원 철폐령을 맞아 훼철된다. 그 후 1871년(고종 8) 김해 부사 정현석 등의 상소에 힘입어 사충단(四忠壇, 경상남도 기념물 99호)으로 다시 태어난다. 현재의 서원 건물들은 1995년에 복원된 것이다.

군수를 비롯한 지도부가 관군 병사들을 이끌고 달아나버린 김해 성내에는 몇백 명의 백성들만 남았다. 이들은 송빈, 이대형, 김득기, 류식 선비를 비롯한 김해 백성들이었다. 관군 지휘관 없이 순수 백성들만으로 적에 맞섰다.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 군이었다. (<임진왜란 최초 의병, 누군지 정확히 아십니까> 기사 참조)

최초의 의병이 되어 일본 대군에 맞서다

일본군은 인해전술 전략을 펼쳤다. 구로다 나가마사는 1만 3000명이나 되는 군사의 숫자를 활용했다. 1만 3000명이 달려들어 들판의 보리를 베어 성곽 아래에 쌓았다. 순식간에 보릿단은 성벽은 덮었고, 적병들은 그것을 타 넘고 성안으로 밀려왔다.

이대형, 김득기, 류식을 비롯한 김해 의병들은 모두 순절했다. 송빈도 마지막까지 칼을 휘두르며 싸운 끝에 전사했다. 그가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해 절을 올린 뒤 최후의 전투를 벌인 곳은 고인돌 위였다. 그 고인돌 위에는 지금도 송빈을 기려 세워진 비석이 남아 있다.

이대형 의병장을 기리는 관천재(왼쪽 사진), 류식 의병장이 판 것으로 전해지는 우물 '류공정', 류식 의병장을 기리는 낙오정(오른쪽 사진).
 이대형 의병장을 기리는 관천재(왼쪽 사진), 류식 의병장이 판 것으로 전해지는 우물 '류공정', 류식 의병장을 기리는 낙오정(오른쪽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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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과 김해를 점령한 일본군은 한양을 향해 북상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1군은 청도를 거쳐 대구로, 가토 기요마사 2군은 울산을 거쳐 경주로 진격했다. 구로다 나가마사의 3군은 성주를 거쳐 추풍령 쪽으로 나아갔다.

(* 다음 편에 계속)


태그:#동래읍성, #송상현, #류식, #김득기, #송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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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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