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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칭 '교통 오타쿠', 자칭 '교통 칼럼니스트'가 연재합니다. 우리가 매일 이용하는 교통, 그리고 대중교통에 대한 최신 소식을 전합니다. 가려운 부분은 시원하게 긁어주고, 속터지는 부분은 가차없이 분노하는, 그런 칼럼도 써내려갑니다. 여기는 <박장식의 환승센터>입니다. - 기자 말

 재건호 열차의 내부 모습.
 재건호 열차의 내부 모습.
ⓒ 대한뉴스(K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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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빠른 열차라고 한다면 '새마을호'를 꼽는 사람이, 그리고 현대에는 KTX를 꼽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1960년대 당시에는 가장 빠른 열차가 '재건호'라고 가르치는 경우가 많았다. 더욱이 재건호는 당시 인기가수였던 백야성이 노래로 만들어 불렀을 정도로 국가 경제 회복의 상징이었다.

9월 18일은 한반도에 첫 철도인 경인선이 개통되어 제물포-노량진 간을 오가는 첫 철마가 오간지도 118년째 되는 날이었다. 1937년부터 지금까지 기념해 온 철도의 날이기도 하다. 9월의 '마지막' 철도의 날을 기념해 현대의 사람들이 잘 모르는 '재건호'라는 열차에 대해 깊이 알아보는 기회를 가져본다.

일제의 수탈 현장을 6시간 40분에 주파한 폭주기관차

일제가 오래 전 대한민국을 점령하고 가장 신경썼던 것은 국내의 철도망을 개설하고 관리하는 것이었다. 그 중 경부선은 예나 지금이나 가장 최신의 열차가 다니는, 그야말로 교통 기술의 최신 기술이 모두 모이는 노선이었다. 한반도의 제1 도시와 제2 도시를 잇고, 이어 경의선과 직결되어 대륙으로 나가는 통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일제는 대륙으로의 진출 욕구를 경부-경의축 철도의 개량으로 '승부'를 보려 했다. 그 결과 도쿄에서 오사카를 거쳐 시모노세키까지 달려온 열차에서 부관연락선으로 갈아타 부산에서 열차를 타고 한 번에 북경까지 가는, 새로운 계통의 열차를 만들었다. 새벽에 출발하는 열차여서 그런지, 대륙 침략으로의 '희망'을 담았는지, 이 열차의 이름은 '아카츠키(暁, 새벽)'였다.

아카츠키 호는 서울과 부산을 엄청난 속도로 이었다. 증기기관차로 1930년대 당시 서울과 부산을 6시간 40분이라는 경이로운 속도로 달렸다. 부관페리와 이어지는 대륙행 열차 히카리, 노조미, 대륙, 흥아호 역시 운행되었는데, 이들 열차 역시 서울과 부산을 7시간대에 주파한데다가 초호화 시설을 갖춘 열차로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1962년 첫 운행한 재건호의 모습.
 1962년 첫 운행한 재건호의 모습.
ⓒ 대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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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시간 40분의 벽' 회복에 17년 걸렸다

하지만 이들 열차는 8.15 해방, 즉 일제의 패망으로 인해 운행을 영원히 중단하게 되었다. 열차 대부분은 태평양 전쟁 당시 총력전을 위해 다시 녹여 총탄을 만들었고, 이들 기술 역시 일제가 철수하면서 모두 가져갔다. 그런 열악한 상황 속 1946년 영등포 공착장에서 생산된 국내 기술로 만들어진 첫 열차가 '조선해방자호'였다.

조선해방자호는 당시 철도종사자들의 피땀을 녹여가며 만든 열차였지만 소요시간은 천안, 김천, 대구, 삼랑진 등 주요역에만 정차했어도 9시간 40분이나 소요되었다. 하지만 '제로베이스'나 다름없었던 미군정 당시 남한의 철도상황에 비하면 이러한 소요시간은 기적이었다. 하지만 6.25 전쟁 탓에 이들 기술 역시 정착할 새도 없이 인프라가 파괴되었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상황이 나아졌다. 미군이 당시 자국군에서 사용한 철도차량을 원조하여 현대의 2001호 등 다양하고 질이 좋은 기관차와 객차를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철도 기술은 점점 진보했고, 통일호(2004년 폐지된 통일호와는 이름만 같다)가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4년 오히려 소요시간을 10분 단축한 9시간 30분에 서울-부산을 주파했다.

이후 지속적인 선로, 차량 개량을 통해 1956년 서울-부산 9시간, 1957년 서울-대전-대구-부산 네 역만 정차하여 7시간 30분을 달성했다. 1960년 무궁화호가 생겨나면서 특급 아카츠키가 달렸던 소요시간인 6시간 40분을 다시 회복했다. 일제강점기 수탈의 상징이었던 '아카츠키'의 속도로 다시 되돌아오기까지 무려 17년이 걸린 셈이었다.

재건호가 초월한 속도계, 새마을호와 KTX의 밑거름

1962년 발매된 백야성의 '마도로스 도돔바' 앨범.  A면 2번 수록곡에 <재건호는 달린다>가 있었다.
▲ 1962년 발매된 백야성의 '마도로스 도돔바' 앨범. A면 2번 수록곡에 <재건호는 달린다>가 있었다.
ⓒ 아세아레코드(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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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칙칙폭폭 칙칙폭폭 기차는 달린다 / 낙동강 추풍령 재건호는 달린다 / 이등차로 가는 사람 삼등차로 가는 사람 / 똑같은 철길 위에 차창 밖엔 / 산도 가고 물도 가네 또 나도 가네" - 백야성의 <재건호는 달린다> 중에서

1962년, 드디어 국산 기술을 총동원하여 만들어진 열차가 등장했다. 앞에 '재건' 마크를 붙인 전용기관차부터 객차까지 모두 인천공착장에서 만들어진 서울 - 부산 간 재건호 열차였다. 재건호는 1962년 당시 서울과 부산을 6시간 10분에 주파했다. 특급 아카츠키 운행 중단 이후 17년, 아카츠키 호의 등장 이후 32년만의 속도 돌파였다.

5월 15일 첫 기적을 내뿜은 열차는 그야말로 만인의 집중이 되었다. 개통 첫 날 열차표는 판매 개시부터 1등 객차, 2등 객차, 3등 객차가 찰나에 차례대로 매진되었다. 개통 첫 날 경향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단 1분의 오차도 없이 정시성을 지켰으며, 엷은 코코아색의 객차에 농민들도 일손을 놓고 열차를 바라보았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당시 호화로운 식당칸도 붙어 있어 식사를 하며 열차를 이용할 수 있던 재건호는 모든 이의 선망이 되었다. 각부 요인들이 출장 때 재건호를 이용하는 모습이 신문 기사에 나는가 하면 가수 백야성은 <재건호는 달린다> 음반을 발매했다. 재건호를 타기 위해 열차 삯의 1.5배에서 두 배에 이르는 웃돈을 주고 암표를 사야만 한다는 보도 역시 났을 정도였다.

재건호의 성공은 국산 열차가 안전하며, 믿을만하다는 인식을 주기에 충분했다. 속도 역시 처음으로 시속 100km의 벽을 넘었다. 평균 시속 역시 76km/h였기 때문에 그간의 열차에 비해 빨랐다. 그로 인해 서울 - 부산 간 통일호와 서울 - 목포간 태극호 역시 8월을 기해 국산 객차로 개선되었고, 증속 운행에 돌입하여 소요시간을 줄일 수 있었다.

철도의, 국가 경제 재건의 신호탄을 울렸던 재건호는 증속을 거듭해 1965년 6시간만에 서울 - 부산을 이었다. 재건호의 아성을 무너뜨린 것은 5시간 45분이라는 시간에 서울 - 부산을 이었던 맹호호였다. 1966년 월남 파병에 즈음해 운행한 맹호호는 당시 대전, 대구만 정차했는데 이 때문에 '서울 대전 대구 부산 찍고~'라는 노래가 유행하기도 했다.

재건호는 국산 최초의 특급열차로의 아성을 지키다, '1%를 위한 열차'인 관광호가 1969년 운행되기 시작하면서 운행을 중단했다. 관광호는 에어컨이라는 단어조차 생소하던 당시 에어컨을 달고, 독립된 회의실이 있었으며 철도병원에서 나온 의사와 간호사가 의무실을 지키던 초호화 열차였다. 관광호는 추후 개량에 개량을 거듭해 지금의 새마을호가 되었다.

재건호는 운행 중단 이후 객차와 기관차가 뿔뿔이 흩어져 지금은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재건호가 한국 철도의 역사에서 갖는 위치를 생각해보면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변변한 제철소, 제련소 하나 없던 1960년대 당시 혼신을 다하여 국산 객차를 만들던 기술은 세계에서 네 번째로 고유 기술로 만든 KTX-산천에까지 남아 많은 승객을 태우고 있다.

다시 기념하는 철도의 날, 한국 경제개발사와 함께한 철도 조명하길

철도의 날은 그간 왜색 논란에 휩싸여 왔다. 일본의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 높았던 1937년, 조선인들을 통치하기 위해 1899년 일제의 손으로 지은 경인선의 개통 축하를 기리며 시작한 날이었기에 더욱 그렇다. 그래서 올해 철도의 날을 마지막으로 9월 18일 대신 다른 날 철도의 날을 기념한다고 한다.

그 날은 바로 1894년 6월 28일. 갑오개혁으로 인해 조선 최초의 교통 관련 부서인 궁내부 철도원(후 철도국으로 이름 바뀜)이 생긴 날이다. 궁내부 철도원은 당시 조선 내의 철도 부설을 추진했고, 경인선과 경부선 개통 이후 잠시나마 철도를 관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듯 철도에 6월 28일이 갖는 의미가 꽤나 큰 것이다.

다음 철도의 날에 바라본다. 철도의 날이 왜색에서 벗어났으니 만큼, 경부선과 경인선의 역사에서 벗어나 재건호, 관광호, 조선해방자호와 같은 한국의 경제개발사와 함께한 철도 역사를 조명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말이다. 더욱이 한국의 철도가 지금도 새로운 발전을 하고 있기에, 이들 발전의 실질적 효시가 된 열차를 조명하는 것은 더욱 큰 의의가 될 수 있다.

전쟁 이후 조각난 기술을 한 데 모아 만든 조선해방자호, 한국을 비로소 1일 생활권으로 만들어 준 새마을호, 그리고 국산 열차가 처음으로 일본의 기록을 뛰어넘었던 재건호까지 다룰 역사는 많고, 다뤄야 할 사료도 많다. 이런 철도 역사가 더욱 많이 조명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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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교통 기사도 쓰고, 교통 칼럼도 날리고, '능력자' 청소년들과 인터뷰도 하는, 그러면서도 '라디오 고정 게스트' 한 번 서고 싶어하는 대딩 시민기자이자 '자칭 교통 칼럼니스트'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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