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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비하인드'는 서울시 공무원들이 일상 업무에서 느낀 점이나 뒷이야기들, 주장 등을 자유롭게 공유하는 공간입니다. [편집자말]
추가로 개방된 구간을 보기위해 덕수궁 돌담길을 찾은 시민들.
 추가로 개방된 구간을 보기위해 덕수궁 돌담길을 찾은 시민들.
ⓒ 서울시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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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년만에 세상 빛을 보게 된 100m 구간

지난 8월 30일 덕수궁 돌담길 100m가 추가 개방됐다. 1884년 4월 영국대사관이 덕수궁 북측에 입지하고 1959년부터 점유하면서 일반인의 발길이 통제되었던 이곳이 58년 만에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구세군 중앙회관부터 과거 회극문이 있던 자리까지다. 이 길은 고종황제가 선왕들의 어진(초상)이 모셔진 선원전, 경희궁 등으로 드나드는 길목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날 그날 임금의 행로가 기록돼 있는 <승정원일기>나 <고종실록> 1901년 6월 13일자에 나와 있는 '회극문에 나아가 선원전 각실의 영정을 맞이하다'라는 문구 등으로 그같은 사실을 미루어 알 수 있다.

덕수궁 돌담길은 가수 진송남이 부른 '덕수궁 돌담길'에선 여인이 혼자 걷는 비오는 밤거리로, 이문세가 부른 '광화문 연가'에서는 연인들이 걷는 애잔한 길로, 1954년 정비석의 소설 '자유부인'에는 사랑의 언덕길로, 2016년 드라마 '도깨비'에서는 도깨비 공유와 저승사자 이동욱의 첫 만남 장소로 각각 각광받는 길이 되었다.

담장 위에 지붕을 얹은, 세계 어느 도시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형태의 덕수궁 돌담길은 위치에 따라 다른 특징이 있다. 대한문에서 정동교회 앞 분수대까지는 돌담이 높고 반듯하며 선형이 곧아 아름다우면서도 위엄과 기품이 있어 보이는 반면, 이번에 추가 개방된 길은 과거 영성문길처럼 낮은 지붕 위에 나뭇가지가 드리워져 있고 영국식 적조담장이 마주하고 있어 낭만적이면서도 독특한 분위기를 갖는다.

덕수궁 돌담길 추가개방 실무를 맡았던 이승석 서울시 안전총괄본부 도로계획과 도로정책팀장.
 덕수궁 돌담길 추가개방 실무를 맡았던 이승석 서울시 안전총괄본부 도로계획과 도로정책팀장.
ⓒ 서울시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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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돌담길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보고해 달라"

덕수궁 돌담길 추가 개방은 약 3년간의 긴 줄다리기 끝에 빛을 보게 되었다. 새로운 부서에 배치되어 자리 잡을 즈음인 2014년 9월, 나는 갑자기 '덕수궁 돌담길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보고해 달라'는 시장 요청사항을 받아들게 되었다. 덕수궁 돌담길이 어쨌단 말인가? 서울시 공무원으로 25년 가까이 시청 주변을 오가며 덕수궁 돌담길을 맴돌았지만, 뭐 덕수궁 돌담길이 해결할 문제라도 있었던가?

그러나 저간의 자료조사와 현장조사를 하면서 나는 이 길이 무엇인지,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시장 요청사항의 의미를 알아차리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이 길은 지난 58년간 끊어진 길, 아니 1884년 이래 130년 동안 잊고 지낸 우리의 길이었다. 구한말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고종이 정궁인 경복궁에서 처참히 아내를 잃고 1년 15일간이나 러시아 공사관에 의탁하다 1897년 2월 25일 대한제국의 국권을 바로세울 기개를 품고 돌아왔던 길이었고, 힘없는 나라를 한탄하며 선왕들의 어진을 찾아 갔던 길이었을 것이다.

오랜 기간 돌보지 않아 길가에는 이끼가 무성하고 돌담은 퇴색되고 썩은 연목(연재가락)과 귀 떨어진 지붕은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2014년 10월 22일 영국대사관에 협력사업 제안서를 들고 찾아간 날, 영국대사관 부대사는 "옛날 덕수궁에서 대사관으로 조선의 왕이 드나들던 비밀문이 있었다고 전해진다"고 위로하면서 다행히 우리의 제안서에 흔쾌히 협력할 의사를 내보였다.

이듬해 5월 14일 박원순 서울시장이 찰스 헤이 영국대사와 협력사업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약 2년여간 서울시와 영국대사관(영국외교부)은 서울시 소유 부지 100m와 영국대사관 소유 부지 70m, 합 170m를 열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영국대사관 측은 본국의 보안 및 폭파엔지니어와 관계 공무원을 서울에 파견하여 조사, 평가하고 협의를 통해 방법을 찾고자 최선을 다했다. 서울시도 시장, 부시장, 안전총괄본부장 등 관련 간부 모두가 관심을 갖고 중지를 모아 개방 방안을 논의하고 협의를 이끌어갔다.

박원순 서울시장과 찰스 헤이 주한영국대사 등 내빈들이 덕수궁 돌담길 개방행사에서 테이프커팅을 하고 있다.
 박원순 서울시장과 찰스 헤이 주한영국대사 등 내빈들이 덕수궁 돌담길 개방행사에서 테이프커팅을 하고 있다.
ⓒ 서울시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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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만에 거둔 '결실', 그러나 남은 숙제도

협의가 순조로울 것으로 기대되던 2016년 9월, 아쉽게도 영국대사관 업무빌딩의 보안문제가 결국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

2년여간 끈질기게 노력했지만 보안문제는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사람의 생명과 안전을 온전히 담보할 수 있어야 하고 더 많은 고민과 협의와 상호이해가 있어야 하며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인정되어야 할 것이었다. 결국, 우선 문제의 70m를 제외하고 100m만을 개방하기로 합의하였다.

추가 개방을 위해서는 그동안 방치되었던 도로와 돌담을 손보고 가로막았던 철문을 철거할 필요가 있었다. 문화재 현상변경이라는 심의를 통해 문화재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문화재 관련전문가 등이 참여하고 규정에 따른 심의를 통해 설계를 마무리했다.

공사는 좁은 장소에서 서울시와 영국대사관, 문화재청이 동시에 힘을 합쳐 수행해야 했다. 유난히 비가 많았던 여름 날씨에 문화재청의 적극적인 협조로 그동안 관리되지 못했던 덕수궁 돌담은 기와지붕과 연목을 모두 걷어내고 보수했다.

과거 회극문 자리에 덕수궁으로 통하는 협문도 만들어 덕수궁 내방객들이 출입할 수 있도록 했다. 도로는 돌담에 어울리는 화강석으로, 돌담 밑에는 선(線)조명을 넣어 돌담의 고고한 자태를 밝히도록 했다.

2017년 8월 30일 드디어 58년만에 숨겨진 역사의 뒤안길이 열렸다. 이날 서울시장은 지역주민과 인근 덕수초등학교 학생대표를 초청하고 시의회의장과 영국대사, 문화재청장 및 중구청장과 함께 개방을 축하하는 행사를 주관했다.

개방 이후 열흘이 지난 오늘까지 많은 시민들이 이곳을 찾았다. 특히 주말에는 수천 명의 남녀노소가 이 길을 찾아 즐기고 있다. 과거 힘없던 시절, 고종황제가 외롭고 힘들게 걸었겠지만 이제 이곳을 찾는 많은 시민들과 함께 그 외로움이, 아픔이 이 길에 다시는 없길 바란다. 오는 가을, 붉게 물들면 시간이 멈춰버린 이 길을 함께 걸어보자.

이번 추가 개방으로 조금은 부담을 내려 놓았지만 아직 숙제가 남았다. 시민들의 염원을 담아 돌담길을 따라 덕수궁을 온전히 돌 수 있도록 연결되기를, 나아가 경복궁에서 광화문광장을 거쳐 청계광장과 덕수궁길을 따라 구러시아공사관 자리, 정동공원으로 한 번에 걸어볼 날을 기대해 본다.


태그:#덕수궁 돌담길, #덕수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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