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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15일, 제72주년 광복절 경축식 현장에서 인상 깊은 장면이 연출됐다. 한국광복군 여성 대원 출신인 원로 애국지사 오희옥(92)씨가 무대에 올라 <올드 랭 사인>의 곡조에 맞춰 <독립군 애국가>를 부른 것.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오씨가 반주 없이 애국가 1절을 부르는 동안 식장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지켜보는 문재인 대통령의 눈시울도 붉어졌다.

지난 8월 15일 제72주년 광복절 경축식 무대에서 <독립군 애국가>를 부르는 한국광복군 출신 오희옥 애국지사
 지난 8월 15일 제72주년 광복절 경축식 무대에서 <독립군 애국가>를 부르는 한국광복군 출신 오희옥 애국지사
ⓒ K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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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원로 여성독립군이 부른 애국가는 SNS에서 급속도로 확산되며 누리꾼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한편으로 그동안 역사의 그늘에 가려진 채 주목받지 못하던 여성 독립운동가의 존재를 환기시키는 계기가 됐다.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오랜 시간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남성 위주의 역사에서 늘 그늘에 가려져왔던 여성들은 독립운동사에서조차 소외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성 독립운동가에 관한 책 한 권 없던 현실에 충격

이번에 출간한 <서간도에 들꽃 피다> 7권을 소개하는 이윤옥 소장
 이번에 출간한 <서간도에 들꽃 피다> 7권을 소개하는 이윤옥 소장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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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뒤편에 가려져있던 그들의 존재는 이제야 조금씩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그 중심에 이윤옥(59)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이 있다.

이윤옥 소장은 오랜 세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알리기 위해 외로운 '전쟁'을 치러왔다. 시인이기도 한 그는 '시'를 무기로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존재를 세상에 알려왔다. 지난 2011년부터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시로 풀어낸 <서간도에 들꽃 피다> 시리즈를 집필해오고 있는 것.

무엇이 그로 하여금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삶에 집착하게 만들었을까. 지난달 28일, 서울 종로의 한 문화공간에서 이 소장을 만나 가슴 속 깊은 얘기를 청해 들었다.

"내가 어쩌다 이 일을 시작하게 됐는지..."

이 소장은 대뜸 한숨부터 쉬었다. 대학에서 일본어를 전공한 그는 원래 고대 한·일 간의 문화교류사 연구가 자신의 전공 분야라고 했다.

그가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삶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일본 와세다대학의 연구원으로 근무하던 이 소장은 도쿄에 위치한 2.8 독립선언 자료실에 갔다가 그곳에서 우연히 '김마리아', '황에스더'라는 이름을 발견하고 호기심을 가졌다. 두 사람은 2.8 독립선언에 참여했던 여성 독립운동가들이었다.

"더 많은 여성독립운동가들이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 책을 찾아봤는데 한 권도 없었어요. 순간 '아, 이분들의 삶을 시로 쓰지 않고서 어떻게 다른 주제로 시를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그분들의 삶을 알리고, 또 그분들께 헌정하는 차원에서 시집을 쓰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때부터였다. 이 소장은 자신의 전공분야는 뒤로 하고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시로 풀어내는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정부로부터 서훈을 받은 여성 독립운동가 명단 200여명을 토대로 한 명 한 명 그들의 삶을 찾아 헤매는 기나긴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그렇게 이 소장은 한 권당 20명씩 총 10권의 책을 내기로 마음먹고 시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참고문헌을 찾고, 생존 애국지사를 만나 증언을 청취하는 등 몸이 부서져라 뛰었다. 그가 써내려간 시 한 소절, 한 소절에는 땀과 눈물이 깊게 배어있었다.

출판사마다 문전박대, 스스로 책 출간

하와이에서 전수산 지사의 외손자인 티모시 최(왼쪽)와 이덕희 하와이이민연구소 소장(오른쪽)과 만난 이윤옥 소장
 하와이에서 전수산 지사의 외손자인 티모시 최(왼쪽)와 이덕희 하와이이민연구소 소장(오른쪽)과 만난 이윤옥 소장
ⓒ 이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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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지난한 작업을 홀로 해내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터. 실제로 거창한 포부와는 달리 책 한 권 세상에 내는 것은 생각처럼 쉽게 풀리지 않았다. 원고를 들고 여러 출판사의 문을 두드렸으나 모두 문전박대당하기 일쑤. 결국 스스로 출판사 등록을 하고 자비로 출간하기에 이르렀다.

"가장 힘든 건 재정적인 어려움이죠. 출판까지는 자비로 하고 있는데, 홍보 비용까지 마련할 도리가 없습니다. 보도자료를 배포하면 몇몇 언론사가 받아 써주기도 하지만, 그게 끝이에요. 더 관심을 갖고 홍보해주는 곳이 없습니다."

후원이 절실했던 이 소장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진심을 담은 편지를 손으로 꾹꾹 눌러쓴 뒤, 자신의 책과 함께 홍보 활동에 나섰다. 그러나 "이런 건 정부가 나서서 도와줘야 하지 않겠느냐"며 남의 일처럼 얘기하는 반응이 부지기수였다. 이 소장은 "지금도 좁은 집 안에 팔리지 않은 책들이 먼지로 덮인 채 쌓여 있다"고 씁쓸하게 웃었다.

여성 의열단원 출신으로 민족시인 이육사와 함께 활동했던 故 이병희 애국지사와 만난 이윤옥 소장
 여성 의열단원 출신으로 민족시인 이육사와 함께 활동했던 故 이병희 애국지사와 만난 이윤옥 소장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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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때면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싶어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불쑥 불쑥 들곤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고 이병희(1918~2012) 애국지사와의 약속 때문이었다. 의열단 출신의 이병희 지사는 민족시인 이육사와 함께 활동했던 여성 독립운동가였다.

"요양원에 누워계신 이병희 애국지사를 만났을 때 '나도 화장을 하면 예쁠 거야'라며 환하게 웃던 모습을 잊지 못해요. 자신의 삶을 들려주실 땐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베이징 감옥에서의 기억을 말씀하셨죠. 얼마나 한이 맺혀 있었으면 그랬겠어요."

이 지사는 자신을 찾아온 이 소장의 손을 꼭 맞잡고 "과거의 기억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 그리고 얼마 뒤 94세의 나이로 요양원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빈소를 찾은 이 소장은 고인이 남긴 당부가 떠올라 비감에 젖었다. 그 당부는 흔들리던 이 소장을 바로 잡아준 계기가 됐다.

<서간도에 들꽃 피다> 7권 출간, 벌써 140명 조명

올해 4월 전수산 지사가 잠든 하와이 호놀룰루의 다이아몬드헤드 공원묘지를 찾아 헌화하는 이윤옥 소장
 올해 4월 전수산 지사가 잠든 하와이 호놀룰루의 다이아몬드헤드 공원묘지를 찾아 헌화하는 이윤옥 소장
ⓒ 이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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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그는 <서간도에 들꽃 피다> 7권을 출간했다. 1권에 20명씩 담았으니 벌써 140명의 생애를 재조명한 셈이다. 이번에 출간한 7권에는 미주에서 독립운동을 펼친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담아냈다. 그들의 흔적을 찾기 위해 이 소장은 사비를 들여 직접 하와이에 다녀오기도 했다. 그 결과 전수산, 심영신, 박신애, 황마리아 네 명의 여성 독립운동가를 새롭게 발굴해낼 수 있었다.

전수산, 심영신, 박신애, 황마리아 지사는 자금난을 호소하는 백범 김구 선생의 편지를 받고 현지에서 사탕수수밭 노동으로 벌어들인 돈을 모두 독립자금으로 보내는 등 임시정부의 든든한 후원자를 자임했다. 특히 박신애와 심영신은 김구 선생이 <백범일지>에 그 이름을 기록했을 정도로 각별한 사이였다.

"살면서 <백범일지>를 여러 번 읽었지만 특별히 그 두 분의 이름에 주목할 일은 없었죠. 하와이에 가서야 그 두 분의 이름이 나온다는 얘기를 듣고 처음부터 다시 정독했습니다. 마침내 박신애, 심영신이라는 이름을 발견했을 때의 희열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 소장이 처음 시집을 낼 2011년 당시만 해도 서훈을 받은 여성 독립운동가는 202명에 불과했으나 그 사이 서훈자는 296명까지 늘었다(2017년 8월 15일 기준) 그러나 이 소장은 여전히 멀었다고 말한다.

"독립운동가 중 남성은 서훈자가 1만4779명입니다. 그러나 여성은 여전히 백 단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수형자들의 카드를 분석한 결과 176명의 여성 독립운동가가 투옥된 사실이 밝혀졌는데, 그중에서 서훈을 받은 이는 고작 13명에 불과합니다."

이 소장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관심이 늘었다고는 하지만 대표적인 아이콘 한 명만 부각시키고 나머지는 기억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한 예로 유관순과 동풍신을 들었다. 동풍신(董豊信: 1904~1921)은 1919년 3.1혁명 당시 함경북도 명천에서 만세시위에 참여한 소녀였다. 그는 일제 경찰에 피체된 후 서대문형무소에 투옥, 1921년 17살의 꽃다운 나이에 순국했다.

"2012년 기준으로 유관순은 단행본이 20권, 논문은 150편이나 나왔는데, 동풍신에 관해서는 자료 한 줄 찾을 수가 없더군요. 천안에 유관순 사당과 기념관을 세우고 교과서에 실어 누구나 기리게 하면서도 정작 비슷한 삶을 살아간 동풍신에 대해서는 나몰라라 한다는 사실에 화가 났습니다."

모교인 한국외대에 출강 중인 이 소장은 강단에 설 때마다 그러한 '벽'을 느낀다. 첫 수업에 앞서 학생들에게 "남녀 독립운동가들을 아는 대로 써보라"고 주문하면 대부분 남성 독립운동가는 10명 정도 쓰지만, 여성 독립운동가는 유관순이 끝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한 사람이라도 더 알리기 위해 강의와 집필 활동에 매진한다. 여성 독립운동가에 관한 강의 요청이라면 그곳이 어디든 먼 길 마다 않고 달려간다. 그래서 '21세기 여성 독립군'이라는 별명도 생겼다.

일본인들이 더욱 관심 갖는 것에 대해 부끄러워

올해 1월 일본 도쿄 고려박물관에서 열린 "침략에 저항한 불굴의 조선여성들(侵略に抗う不屈の朝鮮女性たち)" 특강에서 여성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발표하는 이윤옥 소장
 올해 1월 일본 도쿄 고려박물관에서 열린 "침략에 저항한 불굴의 조선여성들(侵略に抗う不屈の朝鮮女性たち)" 특강에서 여성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발표하는 이윤옥 소장
ⓒ 신한국문화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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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이 소장은 한·일 문화교류 활동을 목적으로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를 설립했다. 그리고 시를 쓰는 틈틈이 일본에 있는 고려박물관과 연대하여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일본에 알리는 활동도 전개하고 있다.

이 소장은 한국에서조차 외면한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일본인들이 더 적극적으로 공부한다는 데 적잖이 놀랐다고 했다. 실제로 강연을 해보면 다들 '나라를 구하기 위해 여성들이 나섰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정부가 가르쳐주지 않은 역사의 진실을 비로소 깨닫고 반성했다'는 반응들이 쏟아졌다.

"정작 우리나라 사람들이 외면하는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일본인들이 주목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지금 하고 있는 활동을 더욱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소장에게 책 제목의 의미를 물었다.

"들꽃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죠. 일제강점기 많은 한인들이 들꽃처럼 끈질기게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스러져갔습니다. 비록 그들의 삶은 화려하지 않았어도 우리에게 뜨거운 감동을 줍니다. 그래서 책 제목도 <서간도에 들꽃 피다>로 지은 거고요."

일제강점기 학생, 맹인, 기생 등 신분과 나이를 막론하고 많은 여성들이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나라를 되찾기 위한 그들의 투지와 열정은 남자들 못지않았다. 심지어 아기를 안고 광복군에 입대한 여성도 있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 그들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왔다. 어쩌면 역사를 기억하는 우리의 태도에도 차별이 내재화되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들을 기억의 저편에서 해방시키는 것은 우리 모두의 과제일 것이다.


서간도에 들꽃 피다 1 - 시로 읽는 여성독립운동가 20인

이윤옥 지음, 얼레빗(2011)


태그:#이윤옥,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 #서간도, #들꽃, #여성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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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사학과 박사과정 (한국사 전공) / 독립로드 대표 / 서울강서구궁도협회 공항정 홍보이사 / <어느 대학생의 일본 내 독립운동사적지 탐방기>, <다시 걷는 임정로드>, <무강 문일민 평전>, <활 배웁니다> 등 연재 / 기사 제보는 heigun@naver.com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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