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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군경은 보도연맹원과 형무소 수감 재소자 등을 불법으로 학살했다. 충북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됐다. 특히 청주, 청원, 보은군 내북면 아곡리, 낭성면 호정리 도장골, 남일면 두산리 지경골, 오창초등학교 곳곳에 민간인 유해들이 묻혀 있다. 이 사건으로 아버지를 잃은 박태용씨는 이후 20년 동안 경찰에 의해 감시 당했다. [편집자말]
충북 영동군 황간면 신흥리 황주동 구장(이장)을 맡고 있던 박태용은 1970년부터 1980년대 말까지 근 20년 동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영동경찰서의 사찰(査察) 대상이 되었다. 왜 감시대상이 되었을까? 아버지 박기철이 6.25 당시 보도연맹원으로 처단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박기철은 이미 죽고 없는데, 왜 그 아들을 감시할까? 이유는 영동경찰서에서 1970년 8월 20일 작성한 '관찰보호자카드'에 적시되어 있다.

'부, 박기철은 보도연맹원에 가입활동하다가 6.25당시 처단당한 가족(사람)으로 정부에 대한 불만을 포지, 간첩 및 불순분자와의 접선우려(가) 다분함으로 관찰보호를 요함.'

정부에 의해 보도연맹원으로 불법적으로 학살된 것도 억울한데, 그 가족을 20년간 감시해, 연좌제로 목줄을 죄고, 불이익을 주었다니 기가 막힐 일이다. 그러면 영동경찰서는 누구를, 얼마나 감시했을까? 치안국의 지시를 받은 영동경찰서는 소위 '빨갱이 가족'에 대해 감시하는 '관찰보호자카드'를 작성했다.

주요 대상자는 한국전쟁 때 사상과 사건에 휘말린 가족들이지만 그 이외의 인물들도 포함되어 있다. 의용군 입대자 중 월북자 및 행방불명자, 처형된 보도연맹원과 남로당원, 월북자, 형무소 출옥 후 월북 및 행방불명자, 부역자의 가족이 그 대상이다. 소위 '좌익가족'을 감시한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들만이 아니라 반공포로, 인민군 귀순자와 같은 반공인사도 그 대상이었고, 사상과는 전혀 무관한 정신병자도 그 대상이 된 것이다. 대략 500명에 대해 카드가 작성되었다.

간첩이 내려오면 접선할 것 같아서, 감시?

그렇다면 정말 간첩이 남파되어 보도연맹원, 남로당원 가족과 접선하려 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보도연맹원은 과거의 좌익활동가들이 전향해 대한민국에 충성을 서약한 반공인사들로 북로당과 김일성, 북한에 반대하는 사람들이었다.

6·25 전쟁 초기 후퇴하는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전국에서 약 20만 명의 보도연맹원들이 학살되고, 불행 중 다행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이 약 10만 명 이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남한으로 내려 온 북한군은 보도연맹원들을 배신자 취급했고, '사상검증'을 이유로 그들을 총알받이로, 의용군으로 보낸 바 있다.

즉 보도연맹원들은 남과 북으로부터 동시에 버림을 받은 것인데, 1950~60년대 북한이 간첩을 남파하면서, 이 역사적 인식이 전환되었다고 볼 수 있는 근거는 전혀 없다. 정부가 북한을 핑계 삼아 전쟁 피해자들의 가족을 감시하고, 탄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박태용이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는 점이다. 아버지 박기철은 15년 동안 일제에 저항한 독립운동가인데, 해방 후 빨갱이로 몰려 보도연맹 사건으로 학살됐다. 2017년 현재까지 박기철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도 못하고, 보도연맹 사건과 관련해서도 명예가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그 아들 박태용은 과거 10년 동안 마을 이장(1969~1979)을 맡으며 국가에 충성을 다 했는데도, 그 기간 동안 간첩이 내려오면 접선할 것 같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감시를 당했다.

"무궁화 수를 놓아 액자 뒤에 감춰라!"

황간 보도연맹원 사무실 터 앞에 선 박태수씨.
 황간 보도연맹원 사무실 터 앞에 선 박태수씨.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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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용의 아버지 박기철(1916년생)은 15세부터 독립운동에 참여하는데, 그 배경에는 아버지의 절대적 영향력이 존재했다. 박태용의 조부 박석하(1894년생)는 연희전문(현재 연세대학교의 전신)을 나와 금융조합 수석이사로 재직했다. 쇼와(昭和)가 천황이 된 1926년에 영동의 유지들이 모 식당에서 모임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박석하는 "쇼와가 천황이 되니 비도 안 온다. 정국이 험하다. 우리가 힘을 합쳐 궐기를 해야 하지 않느냐!"고 선동적인 발언을 했고, 이 이야기는 곧바로 경찰서에 전달되었다. 박석하는 공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일제에 저항하는 독립운동의 바통은 아들 박기철에게 이어졌다. 박기철의 막내아들 박태수(69세, 영동읍 거주)가 할머니 손경분으로부터 아버지의 활동에 대해 들은 이야기다. "느(너의) 아버지가 야학 선생할 때, 처자들에게 무궁화 수를 놓아 액자 뒤에 감춰라! 태극기를 만들어라"고 했다 한다. 3.1 만세 운동 이후 제2의 만세운동에 대비해, 여성과 주민들에게 태극기와 무궁화꽃을 만들어 민족의식을 심어주려 한 것이다.

또한 박기철은 황간주재소 지서주임과도 우호적 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인다. 박태수는 할머니로부터 "일본 순사가 느 아버지를 잡으러 올 때 신흥교부터 말안장을 칼로 두드렸다. 그 방울소리가 피신하라는 의미이므로 아버지가 도망을 갔다"란 이야기를 들었다. 이외에도 박기철이 일제시대 농민운동과 청년운동을 하며 저항한 일화는 숱하게 많다.

2008년에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실시한 <한국전쟁기 민간인집단희생 관련 피해자현황조사 용역사업 최종결과보고서-영동군 편>을 대표집필한 지수걸 교수에 의하면 박기철은 영동청년회-영동청년동맹-영동적우동맹에 참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1930년부터 해방될 때까지 농민운동과 청년운동을 통해 일제에 저항하는 독립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투옥되었다는 재판자료를 아직 발견하지 못해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지 못한 상황이다.

사지(死地)에 제 발로 찾아간 박기철

박기철은 해방 직후 황간초등학교에서 열린 '광복 축하 면민대회' 위원장을 했고, 면민들에 의해 초대 황간면장으로 추대되었으나 극구 사양했다. 정부 수립 후 국민보도연맹이 만들어졌을 때 일제시대 활동을 같이 한 동지들이 그에게 "자네가 안 들어오면 우린 뭐냐?"라고 강권해, 제일 막바지로 가입해 황간면 책임자가 되었다.

한국전쟁 발발 후 황간지서에 소집 된 보도연맹원들이 1950년 7월 19일 모두 학살된 후 박기철은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졌다. 일제시대부터 같이 활동했던 동지들이 정부에 의해 학살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지서장의 구명운동에 힘입어 1차학살을 면했지만, 동지들이 모두 죽자 "모든 사람들이 죽었는데 나만 살아서 무엇하냐? 도대체 왜 죽였는지 따져 봐야 겠다"며 지서로 발걸음을 옮겼다.

고 박희찬의 증언에 의하면 신흥교 앞에서 박기철이 지서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한다. 그런데 갑자기 스리쿼터(짐 싣는 차량)가 급정거하면서 "저기 박기철이 있다"는 소리와 함께 적재함에 그를 강제로 태웠다. 이윽고 그는 집단뭇매를 당했고, 삽으로 찍히기도 했다. 이들은 서북청년회원들로 설황세가 주모자였다. 서북청년회원들에 의해 지서로 끌려간 박기철은 그 후 황간면 마산리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1950년 7월 20일이었다.

그런데 2008년 작성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희생관련 최종결과 보고서-영동편>에는 역사적 사실이 상당부분 왜곡되어 있다. 즉 박기철이 혼자만 살아남기 위해 지서에서 도망치다 특무대원에 의해 사살됐다고 기록돼 있는 것이다. 하지만 유족들의 증언에 의하면 본인은 피신해서 살아 날수도 있었는데, 사지(死地)로 들어가 죽음을 자초했다는 것이다. 2009년 진실화해위원회가 작성한 <충북지역 국민보도연맹사건 결정문>도 위의 오류를 그대로 답습했다. 시신수습 장소를 살펴보면 본인들의 주장이 전적으로 옮음을 알 수 있다.

황간면 사회운동의 1세대는 최진(최판흥, 1897년생), 추교경(1900년생), 손순흥(1902년생)이다. 박기철은 2세대로 위의 선배들과 함께 약 15년간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최판흥은 전쟁 전 월북했고, 추교경과 손순흥은 보도연맹사건으로 학살되었다. 그 중 손순흥은 독립운동가로 추서되었다. 하지만 박기철은 보도연맹사건과 관련해 명예회복도 못하고 독립운동가로 추서되지도 못했다.

아버지 일로 인해 20년간 감시를 당했던 박태용(79·영동군 황간면)씨는 인터뷰 내내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마을 구장(이장)을 10년간이나 봤는데도 한편으로는 나를 감시했다니..." 박씨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자괴감에 빠졌다.

독립운동가가 빨갱이로 몰려 학살되고, 그 아들은 간첩이 남파되면 접선할 것 같다는 이유로 20년간 감시당한 기막힌 현실이다. 역사를 바로 잡으려면 과거에 저지른 국가범죄에 대해 국가가 사죄하고 응당한 보상을 치러, 유가족들의 눈물을 씻어줘야 한다.


태그:#관찰보호자카드, #보도연맹, #독립운동가, #진실화해위원회, #영동경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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