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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도는 그의 시조 '오우가'에서 대나무를 두고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누가 그리 시켰으며/ 속은 어이하여 비어있는가/ 저리하고도 사계절 늘 푸르니/ 그를 좋아하노라"고 했다.

<하늘을  걸어가거나 바다를 날아오거나> 박남준, 한겨레출판
▲ 책 표지 <하늘을 걸어가거나 바다를 날아오거나> 박남준, 한겨레출판
ⓒ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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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준의 악양편지'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하늘을 걸어가거나 바다를 날아오거나>를 읽으면 윤선도의 오우가가 떠오른다. 먼저는 부제에서 '편지'라고 했으니 서간집이겠거니 하겠지만, 사실은 시집인지 산문집인지 묻게 하는 형식에서 그렇다.

이어서 계절이 바뀔 때마다 소소한 일상을 담아 들려주는 이야기에서 수석(樹石)과 송죽(松竹)에 동산의 밝은 달을 친구로 삼았던 고산의 정취가 묻어난다. 그 속에서 따스한 봄날부터 열정의 여름을 지나 결실의 가을과 삭막한 바람만 부는 겨울까지 자연을 벗 삼아 사는 시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형식이야 어찌됐든 더위가 물러나며 책 읽기에 딱 좋은 계절에 사진까지 곁들인 시와 산문을 통해 어느 시인의 삶을 엿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대동강물을 팔아먹은 봉이 김선달쯤은 '아주' 우습게 여기는 대범한 시인의 삶 말이다. 박남준은 2014년 봄, 교보문고 광화문 글판에 "환하다 봄비/ 너 지상의 맑고 깨끗한/ 빗자루 하나"를 걸쳐 놓았던 '빗자루 시인'이다.

그러니까 내가 말씀이야
대동강물을 팔아먹었다는 봉이 김선달은
아주 우습게 여긴다 이거 아니겠어
그냥 하늘에서 떨어지는 봄비를
깨끗한 빗자루라고 우겨서 시를 팔아먹었는데
세상에 그 빗자루를 또 서울 한복판
광화문 빌딩에다 떡 하니 내걸어놓고 돈까지 주네
그런데 사람들이 막 그 빗자루 앞에서
실실거리거나 함빡함빡 웃음을 지으며 사진을 찍고 있지를 않나
신문짝에 기사가 나질 않나  
- 빗자루와 새(112쪽)

    
김선달이 누군가? 장원급제를 할 정도로 명석한 두뇌를 가졌던 희대의 사기꾼 아닌가. 혹자는 그를 지역차별에 저항한 선비라고 하지만, 의도적으로 피해자를 발생시켰던 경제사범이다. 오죽했으면 요즘도 질 나쁜 경제사범들을 칭할 때, 봉이 김선달 운운하겠는가.

그런 김선달을 '아주' 우습게 여긴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자신을 김선달과 비교하며 스스로 희화화시키는 것은 어지간한 자신과 여유가 없다면 할 수 없는 말이다. 시인의 이런 여유는 지리산자락 하동군 악양의 자연과 더불어 사는 데서 나왔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누군가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지리산의 햇빛과 바람, 새소리와 처마 끝 풍경 소리와 작은 개울물 소리를 엮어서 곶감을 만들었습니다. 양도 많지 않고 때깔도 그리 곱지는 않지만 맛보시기 바랍니다. 깨끗이 말리기는 했으나 땀내 나는 제 손길이 꼼지락꼼지락 간을 더하여 심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 편지(15쪽)

박남준은 앵초꽃 봉오리를 보고 갓난 아기 주먹이라고 표현했다.
▲ 앵초꽃 박남준은 앵초꽃 봉오리를 보고 갓난 아기 주먹이라고 표현했다.
ⓒ 박남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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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글을 읽다 보면 사진이 아니라도 자연스레 한 폭의 그림이 그려진다. 생기가 느껴지고, 예순을 넘긴 사람이라고 보기 힘든 익살에는 배꼽을 잡게 된다.

너 어디다가 주먹질이냐
뭐가 못마땅한 거야
아흐 그거 맞는다고 아프기라고 하겠냐
간지럽겠다
갓난아기가 주먹을 쥐고 있는 것처럼
자자 그러지 말고 손 펴봐
그래그래 착하지^^흐
앵초꽃이 피었다 
- 누구를 꾀자고 너는 그렇게(41쪽)


우선 '주먹질', '아흐'라는 표현이 눈길을 끈다. 김정은도 무서워한다는 중2 학생들의 말을 엿듣는 것 같다. 이처럼 다소 과격하다 할 수 있는 표현들이 시에 쓰였는데도 그게 참 앙증맞게 들리는 건 시인의 재주다. 게다가 이모티콘까지 쓰다니, 참 젊게 사는 시인임에 틀림없다.

그렇다고 시인이 마냥 가볍거나 촐랑거리는 건 아니다. 나잇값을 고민하며 자연과 더불어 자족하며 사는 모습은 도통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온갖 꽃들이 가득 하고, 사시사철 그들이 풍기는 생기와 변화 속에서 유유자적하며 꽃들과 대화하는 모습은 무릉도원 속 신선의 삶을 닮았다. 그렇다고 해도 발을 딛고 사는 현실은 다른 법이다.

키를 넘게 쌓여 있던 장작더미도 깨끗하게 비워졌다
그래 흘러가는 것이다
추억이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다
다시금 돌이켜도 식은땀이 나는 장면이나
분노는 왜 없겠는가
문득 나이 생각이 들고 나도 이제 육십의 나이에 맞는 품성을 길러야 할 텐데
그런 생각을 하다가
-중략-
비가 와서 마당에 부려놓은 나무들 속 깊이 젖지나 않았을까
- 젖은 시간이 마르는 동안(104쪽)

                                             
<하늘을 걸어가거나 바다를 날아오거나>를 읽으며 가장 부러웠던 것은 시인이 혼자이면서도 혼자가 아닌 모습이었다. 비록 몸은 지리산 자락에 홀로 살지만, 그는 혼밥을 하는 법이 없다. 밥상에는 그와 마주한 사람은 없어도 꽃이 올라와 말을 걸고, 빗소리 새소리, 고양이마저 친구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그는 사색한다. 이 가을에는 독한 생각보다 순한 생각을 할 수 있었으면 소망해 본다.

그래 저 순한 애호박을 먹고 순한 생각을 하고
저 독이 오를 대로 오른 매운 고추를 먹고 독한 생각도 하고… 
- 순하고 독한 생각(141쪽)

                            
박남준 시인은, 1957년 전남 법성포에서 태어났으며, 1984년 시 전문지 <시인>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세상의 길가에 나무가 되어>(1990) <풀여치의 노래>(1992) <그 숲에 새를 묻지 못한 사람이 있다>(1995)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2000)와 산문집 <쓸쓸한 날의 여행>(1993) <작고 가벼워질 때까지>(1998) <별의 안부를 묻는다>(2000) <꽃이 진다 꽃이 핀다>(2002) <박남준 산방 일기> 등이 있다. 전주시 예술가상, 거창 평화인권문학상, 천상병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하늘을 걸어가거나 바다를 날아오거나 - 박남준의 악양편지

박남준 지음, 한겨레출판(2017)


태그:#박남준, #시인, #광화문글판, #빗자루, #김선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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